여행 중 보았던 관우를 모신 춘추각

2024. 8. 14. 03:00佳人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발길 머물렀던 곳

 

중국을 여행하다 보면, 관우를 모신 곳을 춘추각이라고 하는 누각의 모습을

가끔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가장 흔히 보이는 게 관제묘라고 할 수 있지요.

관제묘는 중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고 아마도 중국에서 가장 많이 만든 사당이

관제묘일 것인데 그러나 춘추각은 그리 흔히 볼 수 없는 관우를 모신 누각입니다.

 

관우란 중국에서는 제왕의 반열에 속하고 황제보다 더 우대받기에 황제 묘인

왕릉(王陵) 보다 더 높이 부르는 말인 관림(關林)을 사용하지요.

중국에서는 묘를 부르는 명칭인 林은 관우의 묘인 관림과 공자의 묘인 공림 두 곳뿐이죠.

 

 

지금의 관우는 민초에게는 재산을 불려주는 재물 신으로도 효과가 있나 봅니다.

뭐 그게 다 너무 잘났기 때문이 아니겠어요?

아무튼 중국에서 뿐 아니라 아시아에서의 관우는 대단히 존경받는 사람일 겁니다.


전쟁의 달인이라는 관우가 책을 보고 있는 모습이 조금 이상해 보이지만,

사실 관우는 유비를 만나기 전에는 학동을 가르치는 훈장이었지요.

그러니 책을 읽고 있는 조각상은 별로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관우를 모신 춘추각에서는 어디나 관우가 춘추라는 책을 읽고 있는 모습입니다.

책이 춘추라는 한 권뿐이라 그랬을까요?

춘추(春秋)라는 책은 공자가 노나라 사관이 저작한 역사서에 자신의 글을 적어서 다시

편찬한 노나라의 역사서인데 역사적인 일에 매우 엄격한 잣대로 평가한 책이라고 하네요.

 

한때 관우가 조조에 잡혀 유비의 두 부인과 함께 조조의 배려로 조조의 근거지였던 쉬창에

함께 있을 때 늘 관우는 그가 머물렀던 방에서 춘추라는 책만 읽었다 합니다.

 

 

조조는 자주 사람을 시켜 "관우 뭐 하고 있니?"하고 물어보면

늘 돌아오는 답이 "춘추를 읽고 있는 뎁쇼~"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관우가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은 춘추라는 책 외에는 거의 없다고 합니다.

그랬기에 춘추라는 책을 손에 든 관우의 모습은 바로 의(義)를 의미하는 모습이라 합니다.

뭘 읽고 있는 페이지도 앞도 아니고 뒤도 아닌 늘 중간 정도였던

저 정도만 읽고 있었나 봅니다.

 

그런데 저 당시는 채륜이 종이를 발명한 시기가 약 100년이 지났지만, 사진에 보이는

저런 양질의 종이가 아니라 무척 조악한 종이였을 겁니다.

그리고 당시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글자는 죽간에 적은 게 더 널리 사용되었을 때라

정말 저렇게 멋진 책으로 만든 춘추를 읽었는지는 알 수 없지요. 

 


조조는 관우가 살 집과 온갖 보물과 하루에 천 리를 달리는 적토마까지 관우의 환심을

사기 위해 내렸지만, 관우는 오직 주군인 유비만 생각하고 눈도 꿈쩍하지 않고

춘추만 읽었다 합니다.

당시에 유비의 생사를 알지 못해 잠시 조조에 의탁해 있겠다 했으며 주군의 소식을

알게 되면 언제든지 떠나겠다고 조조에게 통보한 상태였을 겁니다.

 

이렇게 세월만 보내다가 관우가 유비의 소식을 접하고 유비에게 쓴 편지가 조조의 손에

들어가고 조조는 그 편지를 읽고 관우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 수 없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되었지요.

 

 

그게 바로 대나무와 잎사귀를 그린 그림으로 보이나 사실 잎사귀를 이용하여

교묘하게 글을 쓴 관제시죽이라는 시라고 합니다.

이 관제시죽으로 관우는 충과 의를 의미하는 인물로 후세에 추앙받게 되었지요.

 

그래서 춘추를 읽고 있는 관우의 모습을 조각으로 만든 춘추각은 충신의 모습이고

어느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이기에 중국에서는 간혹 춘추각을 만들어

관우도 섬기며 여러 사람에게 관우의 충절을 알리려 하는 가 봅니다.

아울러 관제시죽이야 말로 관우의 참모습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허구로 삼국지연의라는 소설 속에 나온 이야기로 사실인 양

중국에서는 관우를 신으로 떠받들고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