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부는 나시족 정치의 일번지, 스팡지에는 경제의 일번지.

2017. 2. 27. 09:00중국 여행기/윈난성 여행 2016

리장 중심에 목부라고 있습니다.

목부는 바로 이 지역을 다스렸던 목 씨 성을 지닌 토사의 궁입니다.

토사란 대를 이어 이 지역을 다스린 사람이라 하네요.

목 씨는 원나라 시기인 1263년 리장을 다스린 토사가 된 이래 명나라와 청나라를 거쳐 22대 470년간

제법 긴 세월 동안 이 지역을 다스렸던 가문이죠.

이 정도 기간이라면 근본도 없이 중국 중원의 무수히 명멸했던 왕조보다도 더 정통성을 보이지요.

 

그러나 위의 사진처럼 목부로 들어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문이 하나 있죠.

바로 충의라고 쓴 현판이 걸린 문입니다.

이곳 나시족은 목부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한 것이 바로 충의문입니다.

위의 사진에 보이는 충의라는 글자 위를 보시면 두 마리의 용이 보이고 그 가운데 성지(聖旨)라는 글이 보입니다.

 

성지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임금의 뜻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임금의 뜻을 적어놓은 문으로 돌로 만든 석패방이죠.

명나라 만력 48년, 그러니 1620년 목 씨 토사가 건립한 아주 오래된 패방이지요.

 

이는 목 씨 토사가 명나라 조정을 향해 충과 의는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의미로 건립했다네요.

신토불이가 아니라 충의불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이곳 목부에 있는 토사는 명나라 황제를 하늘처럼 떠받들고 견마지로로 충과 의를 다하겠다는

충성맹세라고 봐야 하겠지요.

당시 많은 양의 은을 조정에 공물로 바치자 황제가 충의라는 글자를 하사했다고 하네요.

이들은 처세술이 대단했나 봅니다.

 

이들 나시족은 "따리에는 숭성사 삼탑이 유명하고, 리장에는 충의문이라는 석패방이 유명하다."고 자랑할 만큼

이 문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합니다.

네 개의 기둥이 있고 그 앞에 각각 석사자가 있습니다.

따라서 출입문은 세 곳이지요.

아마도 가운데 문은 아무나 드나드는 문이 아니었을 겁니다.

 

당시 이 근방에서는 정치의 중심은 바로 이곳이 아니겠어요?

경제의 중심은 쓰팡지에였을 거고요.

그러나 지금의 쓰팡지에는 예전의 그 기능을 그대로 지니고 있지만, 이곳 목부는 관광객이 입장료 60원을 내야

들어가는 구경거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때는 이 앞에 서서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고개를 들었겠어요?

 

이곳을 다녀간 명나라 때 여행가 서하객이 또 한마다 남겼다고 해 그 글도 적어두었습니다.

리장의 목부를 일컬어 "궁실의 화려함은 제왕과 겨룰만하다.(궁실지려의우왕자:宫室之丽拟于王者)

지금은 그때의 모습은 많이 사라졌을 것이니...

규모도 많이 축소되고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 서하객을 초대한 목 씨 토사 목증(木增)은 궁 내부를 모두 구경시켜주지는 않았다 하네요.

이를 눈치챈 서하객은 "듣자 하니 목부 안에는 누각이 대단하여 제도를 어긴 곳이 많아

안으로는 손님을 들이지 않는다."라는 글도 남겼다 하니 서하객이 본 것은 일부였다는 말이 아니겠어요.

아마도 모두 보여주지 않은 것은 목부가 너무 화려하고 큰 규모 때문에 중원의 미움을 받을까 걱정하여

공개하기를 꺼렸을 겁니다.

 

목부를 예전에는 그랬다 합니다.

"북부에는 고궁이 있고 남쪽에는 목부가 있다."고 했다네요.

이 말은 베이징에는 자금성, 리장에는 목부라는 의미가 아니겠어요?

그만큼 이곳 목부에 대한 자부심 또한 대단하지요.

 

이들은 이미 원나라 때부터 중앙권력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며 이곳을 거쳐 남하하려는 쿠빌라이를 도와

따리의 남조국을 정벌하려는 일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려고 따리 창산을 넘어 뒤통수치는 길을 앞장서 인도한 대가로

이곳에 지방 정권으로 인정받아 떵떵거리며 살았잖아요.

따리의 바이족과는 형님, 동생하며 이웃으로 살갑게 살았지만, 자기 살자고 하루아침에 배신하고 말았지요.

그래서 지금도 따리 바이족은 이곳 나시족과는 혼사도 꺼린다 합니다.

 

원나라를 거쳐 명, 청에 이르기까지 지문이 남지 않을 정도로 확실하게 손바닥을 비비며 엎드려 살았을 겁니다.

약한 민족의 비애일까요?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는 확실한 믿음일까요.

덕분에 목 씨 토사는 대를 이어 이 지역을 다스렸으며 아마도 이곳에서는 중원의 황제만큼 위세를 누렸지 싶습니다.

먼저 알아서 긴 덕분에 든든한 백그라운드와 중원의 견제 없이 살았으니까요.

사실 황제란 궁 안에서만 대빵이지 궁 밖으로 나오면 그냥 그런 존재일 뿐이잖아요.

 

원나라가 멸망하고 명나라가 들어서자 이곳 나시족은 제일 먼저 주원장을 찾아가 네 발로 바짝 기어들어가

앞으로 견마지로를 다하겠다고 하자 주원장은 이를 어여삐 여겨 그의 성인 주(朱)에서 삐침과 획 하나를 빼고

木이라는 성을 하사했다고도 하는 이야기도 있더라고요.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를 태어날 때부터 제대로 안 나시족이 아닌가요?

그 이전까지는 성도 없이 살았다고도 하네요.

성이 없었다는 말은 근본도 없이 살았다는 의미일까요?

사실은 대부분의 중국인이 성도 없이 살았지요.

 

당시 정사를 논하던 의사청이라는 건물입니다.

그때는 리장 정치 일번지가 이곳이 아니었을까요?

그랬던 영화도 지금은 춘삼월 봄눈 녹듯 사라지고 남은 것은 또 무엇입니까?

 

목부로 들어가는 입구에 천우 유방(天雨流芳)이라고 쓴 패방이 보입니다.

이 말은 글을 읽어서 후세에 명성을 남기자는 의미로 "공부하러 갑시다."라는 나시족의 말이라 하네요.

약소민족이라 배워서 남을 이기는 방법 외에는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네요.

 

실제로 그 패방 옆에는 조형물을 만들어 놓아 공부를 독려하는 모습을 그렸네요.

실제 이들 나시족은 중원을 제외한 소수 민족 중 학구열이 가장 높은 민족이었다 합니다.

그런 이유로 상형문자인 동파문이 아직도 전해 내려오지 않겠어요?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세상을 살맛 나는 세상으로 만들고

아름다움으로 가득하게 하고 엉킨 실타래처럼 꼬인 오해를 풀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일은

바로 우리의 마음을 여는 일입니다.

닫힌 마음으로는 오해와 불신과 짜증 나는 세상만 있을 뿐입니다.

지금 우리 주변의 모습을 보면 모두 자기 마음의 문은 닫아놓고 상대방만 열라고 하는 듯합니다.

욕설과 빈정거림만 있고 격려와 토닥임은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 본문에 맞는 일에 충실해야지 너도나도 모두 자기 주장만 하면 세상은 점점 짜증나는 세상이 됩니다.

우선 내 마음의 문을 먼저 열고 다가가야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