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룡 제갈공명의 무덤

2024. 5. 22. 03:35佳人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발길 머물렀던 곳

 

봉분이 봉긋 솟아오른 묘 한 기가 보입니다.

이 묘는 대단히 유명한 사람의 묘인데 묘의 규모로 보면 그리 대단하지는 않습니다.

오늘은 삼국지 기행을 한답시고 중국을 다니며 찍었던 제갈공명의 무덤을 구경합니다.

 

 

묘비에는 한승상 제갈 충무후지진묘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니 충무후였던 실존 인물인 제갈공명의 진짜 묘라는 말이겠네요.

삼국지라는 소설에서 주인공보다 더 주인공처럼 느껴지며 신출귀몰했던 와룡이었지요.

 

 

죽은 후 황제로부터 받은 시호가 충무후였지요.

그래서 공명의 사당은 무후사라고 부르는데 중국 각지에 무후사는 여러 곳이 있지만,

모두 사당이며 오장원에서 죽은 후 바로 이곳 정군산 기슭에 북쪽을 향해 누워있습니다.

 

 

제갈량은 죽을 때 이곳 정군산에 묘를 쓰라고 한 이유는 죽어서도 천하통일을 위해

북벌의 꿈을 꺾지 않겠다는 의지라고 생각합니다.

정군산은 북벌을 위해 조조군과의 첫 전투가 벌어진 곳으로 지금의 한중 부근이지요.

그러나 유비나 장비 그리고 관우의 묘에 비하여 제일 초라하고 작은 묘입니다.

 

 

사실 관우나 장비는 몸과 머리가 분리되어 시신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무덤의 크기가 어마어마합니다.

유비야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니 커도 누가 시비 걸지 않겠지만...

 

 

학우선을 손에 든 와룡과 봉추가 무언가 상의하는 모습입니다.

수경선생이 와룡과 봉추 중 하나만 얻어도 천하를 통일한다고 했는데

유비는 두 사람을 군사로 두면서도 매번 질질 짜며 도망 다니고 천하 통일은커녕 

사후에 아들은 촉한을 유지하지도 못한 채 홀랑 털어먹고 말았지요.

 

 

오장원에는 제갈량의 사당이 있고 그 뒤로는 의관총이라는 무덤이 보입니다.

여기는 공명이 죽은 곳이지만, 그의 시신은 여기에 묻지 않고 정군산기슭에 묻었습니다.

그러니 여기는 재갈 묘라고 하지만, 사당이라는 묘(廟)고 우리가 생각하는

진짜 무덤(墓)은 정군산기슭에 있습니다.

 

 

오장원(五丈原)이란 말 그대로 다섯 장의 길이로 이루어진 구릉입니다.

그 생긴 모습이 불쑥 솟은 언덕으로 길이가 다섯 장이라고 하여 붙인 지명입니다.

모습은 마치 비파라는 악기처럼 목이 오목하며 둥근 형태로 가로세로

2km와 5km 정도의 넓이로 높이는 해발 약 650m 정도라 하는데 아래는 사마의 중달이

진을 치고 배에다가 본드를 발라 바닥에 딱 붙이고 빠떼루 자세로 머물렀던 영채지요.

 

 

위에 보이는 것은 삼고초려(三顧草廬)라는 사자성어로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대목입니다.

이렇게 유비는 공명을 모시기 위해 세 번이나 공명이 머물고 있는 오두막을 찾아갔던

일화에서 나온 말로 이렇게 먼 길을 47살의 유비가 27살의 공명을 모시기 위해 말입니다.

 

 

출사표를 후주인 유선에게 올리고 북벌을 위해 출정길에 오른 공명입니다.

언제나처럼 손에는 학우선을 들고 말입니다.

 

 

공명은 아끼던 장수가 군령을 어기고 가정에서 산 위에 군진을 설치하여 북벌의 꿈을

무산시킨 마속에 대한 일벌백계의 일환으로 그를 참하라고 명령했지요.

이 일은 읍참마속이라는 사자성어로 지금까지도 우리가 자주 인용하는 말이지요.

 

 

지금까지 중국에 남아있는 명문장으로 칭송받는 "신(臣) 량(亮) 아뢰옵니다."로

시작되는 출사표.

그가 남겼다는 출사표가 위의 사진처럼 여러 곳에 돌에 새겨져 있습니다.

그 글의 대부분은 악비의 글로 알려졌지요.

 

 

초라한 오두막을 세 번이나 찾아온 삼고초려에 보답하기 위해 주군이었던 유비의 뜻을

펴기 위해 유비의 아들인 유선에게 이렇게 출사표를 쓴 후 출정한 공명은 늘 견마지로를

다했지만, 가을바람 소슬하게 불어오는 오장원에서 별이 되고 말았고 그리고 정군산에서

북벌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북을 향해 아주 작은 무덤 속에 누워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