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르나 예술을 꽃 피운 아멘호테프 4세,9

2023. 4. 21. 04:00이집트여행 2024

 

아멘호테프 4세는 파격적으로 수도를 아마르나로 옮기며 당시로는 급진적인 개혁행동을

많이 했던 인물로 알려졌지요.

원래 개혁이란 사실 혁명보다 어려운 일이지요.

차라리 부수고 새로 나라를 만드는 게 더 쉬웠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에 꽃 피운 아마르나 예술은 지금 많은 사람으로부터 재조명받고 있다네요.

 

 

아멘호테프 4세의 조각상에 남아 있는 모습이 워낙 특이하고 인상적이다 보니 그의 이단아적인

행동이 유전적 기형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이들도 많았다고 하지만, 2010년 아케나톤의 것으로

판명된 미라를 연구해 본 결과 정신이상을 의심할 만한 심각한 유전병의 징후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누구나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세력은 새롭게 변화하는 개혁에는 점심 싸들고 다니며

반대하는데 그냥 반대만 하면 좋은데 무리를 지어 힘을 키우고 오히려 엎어버리려고

했다는데 그는 개혁가이며 풍운아이고 탐미주의에 빠진 로멘티스트였을까요?

 

 

그러나 그의 부인은 위의 사진에 보이는 고대 이집트에서 가장 아름다웠다고 하는

그 유명한 3대 미녀 중 으뜸이라는 네페르티티(미녀가 오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클레오파트라 7세와 람세스 3세가 죽도록 사랑했던 그의

부인으로 알려진 네페르타리보다 더 아름다웠다고 하는데...

 

 

위의 사진에 보이는 그녀의 두상이 후에 발견되어 지금은 독일 베를린의 노이에스 박물관에

소장 중인데 눈밑에 잔주름까지도 그대로 표현한 것을 보니 아마르나 예술의 극치를 보는 듯한데

이런 미인을 부인으로 두고 살았으니 아마르나 예술도 그의 시대에 꽃 피웠을까요?

이 작품을 만드는 도중 미완성인지 아니면 작품이 바닥에 떨어지며 손상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왼쪽 눈이 제대로 표현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이야기하기를 아마르나 예술의 최고 작품은 바로 네페르티티의 흉상이라고

하며 이 작품도 아마르나에서 발견되었다는데 독일에 몰래 반출해 현재 독일 노이에스 박물관

별실에 네페르티티 흉상 하나만 따로 보관했다고 합니다.

이집트에서는 돌려줄 것을 요구하지만, 독일은 먼산만 바라보고 있다지요.

 

 

1912년 아마르나에서 발굴하는 당시의 사진입니다.

네페르티티의 흉상이 소중한 보물임을 알아챈 독일 발굴팀은

몰래 상자 깊숙이 숨겨 독일로 가져갔다고 하네요.

 

 

가져간 후 몰래 감추고 있다가 10년이 지난 1923년 처음으로 공개했다고 합니다.

약소국의 비애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아멘호테프 4세와 부인 네페르티티 사이는 말년에 원만하지는 않았나 봅니다.

아들을 낳지 못해 소박이라도 맞았나요?

사실 네페르티티는 아멘호테프 4세의 부왕인 아멘호테프 3세의 부인으로 보내졌는데

당시 풍습으로 부왕의 모든 여인은 자연스럽게 승계를 했다는데 네페르티티의 미모가

워낙 출중해 왕비로 발탁되었다고 합니다.

 

 

아멘호테프 4세의 모습은 예술적인 표현을 하기 위해 과장했을까요?

아니면 근친혼의 결과로 보통사람과는 다른 모습이었을까요.

아멘호테프 4세의 모습을 보면 어느 석상에서는 그의 모습이 마치 여성으로 생각되기도 하네요.

위의 조각에 보이는 여성화 현상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아무튼 그는 우리가 상상했던 이상으로 신비스러운 존재임이 분명합니다.

 

 

좌우지간, 인물이나 성격은 일반적인 파라오는 아니었을 듯합니다.

아멘호테프 4세가 아크나톤으로 이름을 바꾸고 사후 150여 년 후 모세가 이집트를 떠난

출애굽이 있었다고 하니 혹시 모세도 아멘호테프 4세의 유일신 사상의 영향을 받았을까요?

기독교에서는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유일신 사상이잖아요.

 

 

어쩌면 그는 개혁가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개혁이 당대로 그치며 실패로 돌아갔기에 개혁가가 아니고 몽상가가 되어버렸습니다.

실패의 가장 큰 이유로는 사제집단의 세력이 워낙 강했고 이후 세대가 유일신 사상을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기에 실패했지 싶습니다.

원래 개혁이란 혁명보다도 더 어렵다고 하잖아요.

 

 

그러나 실패의 가장 큰 이유로는 민초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태양신 아텐은 아멘호테프 4세인 자신만을 위한 신이었고 그 외의 일반의 백성에 대해서는

아멘호테프 4세 자신을 신으로서 숭배하도록 말했던 것이었기에 평범한 많은 사람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했기 때문에 위의 사진을 보면 미라 덮개 얼굴이 많이 훼손된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아멘호테프 4세는 수도를 옮기면서 까지 종교개혁을 했지만, 그의 아들인 투탕카멘에 의해

 다시 원위치하는 결과를 초래했기에 결국은 실패한 개혁이 되며 그의 이름은 파라오 명단에서

제외되는 기록말살형에 처한 일이 생겼으니 죽은 후에도 너무 슬픈 파라오가 되었네요.

 

 

그의 미라가 들어있는 관의 덮개에 새겼던 이름마저 위의 사진에 보듯이

긁어버린 것이 보이는데 이는 족보에서 조차 파버렸다는 말인데...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 것이 아닌가요?

 

 

다음 왕조였던 제19왕조 세티 1세의 신전에 있는 역대 76명의 파라오의 왕명록에서도

위의 사진에서 보듯이 아멘호테프 3세에서 호렘헤브로 바로 넘어가는 것으로 되어 있어

투탕카멘도 같이 삭제되었는데 투탕카멘의 경우는 일찍 사망했기 때문에 그다지 치세가

길지도 않아 특별히 한 일도 없었기에 삭제해 봤자 덜 섭섭했지 싶습니다.

그러나 아멘호테프 4세의 경우는 그렇지 않잖아요.

 

 

부왕 때문에 갑자기 족보에서 사라져 버린 황당한 일을 투탕카멘은 당했지만, 다행히 무덤이

도굴꾼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진 덕분에 보란듯이 화려하게 세상에 컴백하게 되었잖아요.

그러나 아멘호테프 4세는 위의 사진에서 보듯이 이름을 지운 모습을 볼 수 있네요.

한편으로는 새로운 왕조인 19 왕조는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세티 1세는 이전 왕조의

아멘호테프 4세와 투탕카멘을 역사에서 지워버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케나톤이 죽자 아톤 신앙은 바로 종말을 고했다고 합니다.

기존의 신관들은 파라오가 죽자마자 어린 파라오 투탕카멘을 꼬드겨

아버지의 모든 행적을 부정하도록 만들었다고 합니다.

 

 

결국 사제들의 밥그릇 챙기기인 사심이 개입된 결과였다고 생각됩니다.

위의 투탕카멘과 그의 부인인 안케세나멘의 모습이 보이는 황금의자에는

아직 아톤 신앙으로 대표되는 태양과 빛 내림의 형상을 볼 수 있습니다.

 

 

원래는 투탕카멘의 이름도 아톤과 관련이 있는 투탕카톤이었으나

아문 신앙으로 복귀하면서 투탕카멘으로 바꿨다고 하고 아마르나에 있는

아케나톤의 묘로 추정되는 곳은 이름이 모두 지워져 버렸다지요.

 

 

그런데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발견된 황금마스크를 보면 귀걸이를 하게 만들어졌습니다.

이것으로 유추하면 투탕카멘이 어린 나이에 요절함으로 황금마스크를 만들 시간이 부족해

네페르티티의 황금마스크를 재활용해 대신 사용했다는 설도 있답니다.

황금마스크를 보면 남성의 얼굴보다는 여성으로 보이기도 하지요.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아멘호테프 4세가 야심 차게 건설했던 새로운 수도도 버려졌고, 예술도 중단되고 신앙마저

아톤 신앙에서 아문 신앙으로 돌아가며 모든 것은 아멘호테프 4세 이전으로 회귀했다고 합니다.

결국 사후에는 호적마저 사라지는 비참한 꼴을 당했지만, 아마르나를 발굴 하며 그의 유물이

발견되어 다시 재조명을 받고 있어 대단한 비운의 군주였음을

세상에 알린 인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