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읍성의 답성(踏城)놀이

2023. 1. 27. 03:54금수강산 대한민국/전라북도

고창읍성(모양성)은 조선시대 초기의 석축 읍성으로 알려진 곳이지요.

단종 원년(1453년)에 쌓았다는 고창읍성은 축성을 하게 된 이유가

일본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전라도민들이 유비무환의 슬기로 축성한 자연석 성곽이라고 하네요.

 

오늘까지 고창에서는 위의 사진에 보듯이 여자들의 성벽 밟기 풍습이 전해 내려 오는데,

이는 한 해의 재앙이나 질병을 막는 의식으로 여겨진다지요.

아마도 축성을 하며 성벽을 쌓을 때 돌을 머리에 이고 져 날랐기에 이런 풍습이 생기지 않았을까요?

 

특히 고창읍성에는 전통적인 성벽 위를 밟으며 도는 답성(踏城) 놀이가 유명하다고 합니다.

우리도 어린 시절 고향마을에서 어른을 따라 다리밟기인 답교놀이도 하기는 했기에

이런 모습이 전혀 낯설지는 않지요.

 

고창에서는 성을 밟으면 병이 없어 오래 살고 저승길엔 극락문에 당도한다는 전설 때문에

매년 답성놀이 행사가 계속되고 있으며, 성 밟기는 저승문이 열리는 윤달에 해야

효험이 많다고 하며 같은 윤달이라도 3월 윤달이 제일 좋다고 합니다.

 

또한 엿새날이 저승문이 열리는 날이라고 하여 초엿새, 열엿새, 스무엿새 날에

답성 대열이 절정을 이루고 있으며 성을 "한 바퀴 돌면 다리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며 세 바퀴 돌면 극락 승천한다."라고 한다네요.

 

성을 돌 때는 반드시 손바닥만 한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돌아

성 입구에 다시 그 돌을 쌓아 두도록 되어 있다고 하네요.

고창 읍성이 아낙네들의 힘만으로 축조되었다는 전설적 사연으로 답성도 부녀자들 만의

전유 민속이 되어버렸답니다.

 

흙 한 줌, 돌 한 개도 모두가 부녀자들의 손과 머리로 운반, 구축되었던

당시의 대역사를 되새겨 보는 뜻으로 돌을 머리에 이고 도는 풍습이 남아있다.

이는 아낙네의 노고를 위로하는 의미로 이런 답성놀이로까지 발전하지 않았을까요?

 

또한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도는 관습은 여인네들의 체중을 가중시켜

성을 더욱 단단히 다지게 하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깊은 뜻은 이 성곽의 축성 배경이 왜침을 막기 위한 것이 아니겠어요?

 

그렇기에 이런 답성놀이를 통해 유사시의 돌로 침입하는 적을 무찌르기 위해 무기로 사용하기 위해

미리미리 돌을 져 나르는 유비무환의 예지로서 머리에 인 돌을 성안에 쌓아 두고 갔다는 전설도 모두가

호국의 예지를 빛내 주는 이야기들이겠지요.

 

고창군에서는 답성민속을 기리기 위해 음력 9월 9일인 중양절을 군민의 날로 정하고

모양성제와 함께 답성놀이를 재현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날은 고창읍내가 떠들썩하는 가장 큰 축제의 장이 펼쳐지지 않을까요?

 

음력 9월 9일을 전후하여 4일간 모양성제가 열리며, 이때 조선시대 관군 복장을 갖춘 수문장이

고창읍성을 수호하는 장면을 재현된다고 합니다.

고창 읍성의 성곽 주위에 수십 개의 옛 진영 깃발을 꽂아 고을 수령(현감)이 재임하던 시절을 재연하고...

 

관아의 위엄을 갖춰놓고 형형색색의 멋진 조선시대 관군복에 칼을 든 수문장과

흑백색의 순라 복장에 창을 든 포졸을 공북루에 배치한다네요.

 

특히, 스스로 관군이 되어보기를 원하는 관광객을 위해 관리사무소에 관군복을 비치해 놓고

이를 빌려줌으로써 사진 촬영을 통해 관군으로서의 체험도 직접 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도 마련해 놓고 있다고 하니 무척 흥미로운 일이기도 합니다.

 

이곳 읍성 안에서는 쇄국정책의 대명사격인 위의 사진에 보이는 척화비도 볼 수 있습니다.
이 비는 조선 말기에 대원군이 펼친 쇄국정책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병인년에 비문을 만들고 신미년(1871)에 세워진 것이라고 합니다.

 

비문의 내용은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친을 하자는 것이요,

화친을 하자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 임을 온 백성에게 경계한다."라는 뜻이지요.

당시로는 이런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을까요?

 

이 비문을 지은 병인년에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도 도화선이 되어 병인양요가 발생하였고,

비를 만들어 세운 신미년에는 미국 군함이 강화도를 침범한 신미양요가 발생하였던 해였지요.

국력이 약했던 조선 말기에는 이렇게 주변의 작은 바람에도 흔들렸지요.

 

읍성 내에는 22동의 관아 건물이 있었으나, 전화로 소진되고 1976년부터 지금까지

위의 사진에 보이는 동헌과 내아 건물 외에도 객사 등 12동의 관아 건물을 복원 완료하였고

나머지 10동도 복원할 계획으로 있답니다.

모두 다 복원이 끝나면 예전의 모습으로 많은 사람의 눈길을 끄는 멋진 우리의 역사로 남지 않을까요?

축성에 사용된 석재는 거의 자연석이지만 초석, 대리석, 당간지주 등 어느 절에서 나온듯한

석재들을 깨뜨려 쓴 것도 가끔 끼여 있기도 하다는데 특히 북문인 공북루의 주춧돌 높이는

제각각이라서 1m쯤 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아예 땅에 깔려

기둥이 바닥까지 내려온 것도 있어서 이채롭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의 읍성들은 평야지대에 양면을 돌로 쌓아 만들고 성문 위에는 누각을 지어

적을 감시하고 전투를 지휘했으며 성내에서는 관민이 함께 생활하였다지요.

 

그런데 고창읍성만의 특징은 나지막한 야산을 이용하여 바깥쪽만 성을 쌓는 내탁법 축성 기법을

사용하였으며, 성문 앞에는 옹성을 둘러쌓아 적으로부터 성문을 보호할 수 있도록 축성하였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여러 곳을 다녀봤지만, 이곳 고창읍성처럼 느낌이 좋은 곳도 많지는 않았습니다.

여기는 추천하고 싶은 곳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