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3. 21. 09:00ㆍ동유럽, 발트3국, 러시아 2017/리투아니아
트라카이 성 안에 있는 궁전에는 예배당도 있습니다.
이 성을 짓기 시작한 케스티투스는 요가일라에게 암살당하고 케서방의 아들인 비타우타스와
요가일라가 서로 리투아니아 대공 자리를 두고 경쟁할 때 비타우타스가 완공했다지요?
그러나 요가일라는 폴란드 왕비와 결혼함으로 기독교에 귀의하게 되었고 나중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국의 왕으로 재임하며 리투아니아에 기독교가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네요.
지금은 국민의 80%가 천주교 신자라고 합니다.
오늘은 대공의 궁전 내부 모습을 주로 구경합니다.
궁전의 모든 방이 바로 통하지 않아 서로 막혀있는 곳이 많습니다.
통로가 있더라도 위의 사진처럼 한 사람이 간신히 통과할 정도로 좁습니다.
그러다 보니 건물 밖으로 만든 나무 회랑을 통해 드나들거나 오르내려야 하네요.
14세기 초까지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수도였으나 빌뉴스로 수도를 옮긴 후
이곳 트라카이는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며 점차 잊힌 옛 수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사람이나 집이나 돌보지 않으면 더 빨리 늙어가는 게 아닌가요?
그러나 지형적으로 호수 위의 아름다운 곳에 성이 있기에 리투아니아에서는
외국 사절을 맞이할 때는 이곳을 많이 이용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영빈관이나 별장의 용도로 사용했다는 말인데 워낙 주변의 풍경이
뛰어나기에 오히려 왕궁보다는 그런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 맞지 싶습니다.
크게 두 개의 건물로 나누어졌는데 입구 왼편에 있는 기다란 건물은 주로 병사와
가신이 거주했고 왕을 위시한 왕족은 이곳에 거주했다네요.
1410년 그룬발트 전투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은 독일의 튜튼 기사단을
궤멸시키고 이 성을 방어 기능에서 거주 기능으로 바꾸어 리투아니아 대공작들의
주거지로 변모했다고 합니다.
처음 이 성을 지은 사람은 켕스투티스(Kęstutis 또는 케스투티스)라고 합니다.
그는 튜튼 기사단에 맞서 리투아니아 서부 국경을 지켜낸
리투아니아 대공(Grand Duke)이었다지요?
그의 아버지는 바로 그 유명한 게디미나스 대공이고요.
게디미나스 대공이 리투아니아를 통치했을 때 동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대국이었다는데 켕스티투스는 그의 일곱 아들 중 하나였다네요.
아버지가 죽자 아들 사이에 권력다툼이 일어나고...
원래 자식이 많다 보면 역사적으로 볼 때 늘 있는 일이지요.
이때 켕스티투스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공이 된 야우니티스를 다른 형제와 함께
밀어내고 알기르다스(Algirdas)를 내세워 둘이서 공동통치에 들어갑니다.
권력 앞에는 형제도 부모 자식도 없는 게 역사를 통해 보아 왔던 사실이 아닌가요?
권력뿐인가요?
돈 앞에서도 재벌 후손이 싸우는 것을 보면 사람의 마음이 모두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후 이 지역을 늘 넘보던 튜튼 기사단을 공격해 무력화시킴으로 세력을 확보했으나...
나중에 알기르다스가 죽자 그의 아들 요가일라가 대공이 되며 조카와 알력이 생겨
그들 형제를 제압하고 스스로 리투아니아의 대공이 되었답니다.
그러나 리투아니아가 지배하고 있던 러시아 땅에서 일어난 반란을 제압하려고
위의 사진에 보이는 켕스티투스가 이곳을 비운 사이 감옥을 탈출한 요가일라가
이곳 트라카이와 빌뉴스를 점령해버렸답니다.
반란을 제압하고 이를 모른 체 트라카이로 돌아온 켕스투티스는 바로
체포당하고 크리아바스로 보내진 뒤 살해되고 말았다네요.
정말 믿을 사람 하나도 없네요.
요가일라는 그 후 폴란드 왕이 되어 브와디스와프 2세로 불렸고 켕스티투스의
아들인 비타우타스와 갈등을 겪게 되자 마침 이웃인 폴란드에서 그곳 여왕과
혼인을 추진하자 얼른 넘어가 버렸다고 합니다.
이로써 폴란드 여왕인 야드비가와 혼인함으로 폴란드에서 야기에우워 왕조가
시작되었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체제가 시작되어 한동안 중부 유럽에서는
아주 강력한 세력으로 존재했다고 하네요.
이렇게 트라카이 성을 짓기 시작한 그는 이곳 트라카이에서 체포되 유배되어
죽자 위의 사진에 보이는 그의 아들인 비타우타스가 대를 이어
1430년 완공한 곳이라고 합니다.
결국, 그도 역시 이 성에서 죽음으로 부자가 트라카이 성과는 영욕을 함께한 셈인가요?
아버지가 짓기 시작해 이곳에서 체포되어 귀양길에서 죽고 그의 아들이 완공했지만,
그도 이곳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동양에서 볼 때 분명 마가 낀 터였다고 하지 싶습니다.
이렇게 성을 짓던 부자가 죽자 트라카이 성도 점차 버림받고...
그 후 1655년 여름 러시아와 스웨덴과의 전쟁통에 성은 폐허가 되고 말았답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이렇게 버려졌던 이곳 트라카이성은 1962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역사박물관으로
재단장하게 되며 세계인이 찾아오는 유명 관광지로 탈바꿈하였답니다.
이제 여름철만 되면 이곳 고성에서 음악회가 열리고...
오페라와 발레 공연이 열린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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