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정용담(九鼎龙潭)에서 맑은 샘이 솟아나는 속하고진

2017. 2. 16. 09:00중국 여행기/윈난성 여행 2016

 

아주 오래된 돌다리가 보입니다.

이 다리가 수허마을에서는 유명한 청룡교(靑龙桥)라는 다리입니다.

많이 훼손된 석판을 바라보니 세월의 흐름이 이곳에도 살포시 내려앉았네요.

리장의 반질거리는 오화 석판과는 달리 이곳의 석판은 거친 박석이 대부분이네요.

 

 

이 다리는 리장에서도 볼 수 없는 아주 큰 돌다리입니다.

이 다리를 경계로 서쪽 산 밑으로는 나시족이 제일 먼저 자리 잡았던 동네가 되네요.

그리고 동쪽으로는 쓰팡지에를 중심으로 마방의 교역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신도시인 셈이고요.

 

 

다리가 유명한 이유는 명나라 때 만든 다리라 아주 오래되었다고 합니다.

중국의 옛날 다리 모습을 보면 대부분 무지개 모양의 홍교가 많지요.

저런 아치형 다리가 개발됨으로 로마는 수도교를 비롯해 콜로세움 등

건축사에 큰 획을 긋기도 했을 것이고요.

이제 다리를 건너 옛 마을로 들어갑니다.

 

세월이 제법 많이 흘렀지만, 아직까지도 제 역할을 충실히 하는 오래되고 튼튼한

돌다리가 있으며 이 다리를 건너 많은 마방이 차마고도를 따라 건너 다녔지 싶습니다.

그나마 말을 이용해 장사 다녔던 마방은 행복했을 겁니다

 

 

차마고도를 따라 장삿길에 나선 많은 사람 중 말 한 필 살 돈 없어

이렇게 등짐을 지고 다녔던 사람도 많았다네요.

장사를 위해 등어리에 짊어진 이 여인이 짐은 우리 눈에는 한숨과 눈물과 땀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어렵고 힘든 일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가족과

희망이라는 등짐이 아니었을까요?

그런 희망조차 없는 사람에게는 이런 일은 고통이고 죽지 못해 하는

노동에 불과했을 겁니다.

 

 

이 마을이 한창 북적일 때는 리장을 출발해 북으로 올라가는 마방이 이곳에 머물렀다고

하는데 많았을 때는 3.000여 필의 말이 머물다 떠났다 하니 그때 번창했을 모습이

느껴지기도 하니 그때 이 마을에는 마방의 제일 큰 어른인 우두머리

마궈터우(马锅头)가 살았던 집도 있다네요.

 

 

혹시 이 집이 옛날 마방의 우두머리였던 마궈터우가 살았던 집은 아닐까요?

느낌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수허 꾸전을 근거로 마방이 꾸려졌다는 말이기에 이 마을이 그때는 번창한 마을이었을 겁니다.

 

 

수허꾸전에는 두부를 파는 작은 가게가 여럿 보입니다.

이 지방의 명물이라고 하는데...

 

 

각각 10원에 팝니다.

워낙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 그냥 지나쳤다가 나중에 한가해진 시간에

다시 찾아 맛을 보았습니다.

 

위의 두부는 석병 두부라고 하는 작고 동글동글한 구운 두부도 있습니다.

맛은 우리나라 두부와 다른 게 없습니다.

그냥 심심풀이 두부입니다.

 

 

이곳 주민 대부분은 관광객을 상대로 장사하든지 아니면,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데 예전에는 그랬겠지만, 지금은 관광객이 모여들며 장사는

나시족의 몫이 아니라 한족의 몫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현상은 중국 어디나 같지 않을까요?

 

 

수허마을도 모든 상권은 왕 서방인 한족이 휘어잡지 않을까요?

심지어 박물관이나 이런 곳에 나시족 복장을 하고 근무하는 직원까지

나시족이 아니라 한족이었습니다.

물어보니 한족이라고 답을 하네요.

 

구정용담(九鼎龙潭)입니다.

이곳 구정용담에서는 이렇게 맑은 샘이 시도 때도 없이 여기저기 펑펑

솟아오르는데 그래서 이 마을을 천 년의 맑은 샘이 솟아나는 마을이라는

천년청천지향(天年淸泉之鄕)이라고도 부른답니다.

바로 마을의 원천이 이곳 구정용담에서 시작되었다는 의미지 싶습니다.

 

 

천 년이라...

마을이 생긴 지 벌써 천 년이 넘었다는 말이 아닌가요?

구정용담이라는 말은 아홉 개의 솥을 걸어놓은 것처럼 위의 사진처럼

아홉 구덩이에서 샘이 솟아오른다는 말이지요?

아홉 개라는 말은 상징적인 의미로 봐야겠네요.

 

 

이렇게 구덩이에서 솟아오른 물은 바로 위의 사진처럼 호수를 이루고

마을 곳곳으로 흘러내려갑니다.

천 년이라는 세월은 중국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일로 중국의 왕조가 생겨나고

사라지는데 보통 평균 2~300년 정도밖에는 되지 않은 짧은 시간이잖아요.

지금 우리는 천 년의 역사를 지닌 아주 오래된 마을을 걷고 있습니다.

 

 

사실 천 년의 세월이라면 힌두교에서 유해교반을 통해 선신과 악신인 데바와

아수라가 딜을 하며 서로 힘을 합쳐 천 년을 쉬지 않고 젖의 바다인 유해(乳海)를

휘저어서(교반:攪拌) 영원히 죽지않는 생명수라는 암리타가 만들어지는

긴 시간이 아닌가요?

 

 

구정용담이 있는 곳은 다리 건너 끝으로 삼거리가 보이는데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보이는데 아마도 수허마을에서 가장 신성시하는 곳이 이곳이 아닐까요?

바로 구정용담으로부터 흘러온 물이 방금 우리가 건넌 청룡교 아래

구룡하로 흘러 남으로 흘러가네요.

 

 

이렇게 구룡하를 가운데 두고 서쪽에 제일 먼저 나시족이 살아가기 시작했고

점차 그 영역이 늘어나 지금은 동쪽이 더 넓고 번화한 곳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리장에 비교하면 아주 작은 곳이죠.

 

 

부근에는 이곳 원주민인 나시족은 아직 밭을 일구어 농사를 짓는 모습도 볼 수 있는데

그러나 밀어닥치는 관광객은 나시족의 몫이 아니고 외지에서 들어온 한족이

대부분이지 싶고 심지어 이곳에서 식당을 하시는 한국인도 있으니까요.

 

 

수허 마을 안에도 한국인이 운영하는 한국관이라는 음식점이 있습니다.

혹시 이 부근을 지나다 우리 음식이 그리우신 분은 잠시 들러

식사하고 가시는 것도 좋지 싶네요.

우리도 이곳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습니다.

 

 

처음 이곳에 자리 잡을 때 취보산, 연화산, 용천산 이렇게 세 개의 나지막한 산을 뒤로하고

바로 그 앞으로 흐르는 구룡하를 앞으로 두고 자리했으니 확실한 배산 임수의 주거터였다고

생각되며 다만, 우리나라는 남향을 선호하는데 여기는 서쪽에 집터를 정하고

동쪽을 바라보고 터를 잡았답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이는 나시족 마음의 고향인 동쪽을 바라보고 고향을 그리는 마음은 아닌지 모르겠네요.

나시족은 집터를 잡을 때 언제나 서쪽에 앉아 동쪽을 바라보게(西座東向) 짓는다 합니다.

어디에 살든지 고향을 그리는 수구지심이라는 마음은 늘 같은 마음뿐이 아닌가요?

이제 우리는 차마고도 중간 역참 마을인 속하고진을 떠나 다시 리장으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