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로서도(鳥路鼠道)라는 차마고도

2017. 2. 14. 09:00중국 여행기/윈난성 여행 2016

 

마방의 우두머리인 마궈터우가 마을에 들어와 숙박할 때는 어느 말잡이보다도

더 좋은 곳에서 잠을 자고 그가 머무는 방의 구조도 달랐다고 합니다.

위의 사진처럼 이곳에 터를 잡았던 수허꾸전의 마방 모습이 남다르지 않습니까?

마을로 들어서는 마궈터우의 모습에서 카리스마가 보이고 위풍당당함이 느껴집니다.

 

 

헉! 위의 사진에 보이는 사람이 더 위풍당당하고 카리스마가 있어 보이는데요?

이들은 장삿길에서 산적이나 맹수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에 늘 이렇게 무사를 거느리고

다녔으며 마궈터우의 침대는 특별히 우리나라의 뒤주처럼 생긴 위로만 열리는 침대 위에서

잠을 잤고 그 안에 귀중품을 넣어두었다고 하는데 이는 당시 마방은 도적의 표적이었을 테니까요.

이렇게 마궈터우는 모든 마방 조직의 재산과 생명을 책임져야 하기에

잠을 잘 때도 다른 방법으로 잤다고 합니다.

 

 

마방의 조직은 지금의 택배회사처럼 큰 조직으로 이루어져 대규모로 직영으로

운영되기도 했고 작은 상회에 소속되어 소규모로 움직였던 곳도 있었을 겁니다.

물론, 소규모 조직이 연합해 지입제로 조직을 키워 큰 조직에 대항하기도 했을 것이고요.

또 이 지역에 있는 민족별로 조직되기도 했고 여러 민족이 연합하기도 했다네요.

벌써 국제적인 감각을 키웠다는 말인가요?

 

 

이는 다른 민족의 지역에 장사하러 갔을 때 다른 언어나 관습 등을

쉽게 해결하기 위해서랍니다.

이들은 일단 근거지를 떠나면 이동하다가 직접 밥을 지어먹었을 것이고요.

그런데 특이한 것은 티베탄 마방은 말이 쉴 수 있는 숙소를 피해 주로 노숙을 했다네요.

 

 

이는 돈도 아끼고 티베탄은 유목민족이었기에 노숙이 몸에 배었기에 그리했지 싶습니다.

그러나 보니 천막 생활에 익숙했고 경비 또한 절감되니 노숙을 주로 했을 것 같습니다.

대문 밖이 바로 그들의 세상이었으니까요.

 

 

마방 조직 중 특이한 것은 절에서도 직접 마방 조직을 꾸려 운영함으로

부족한 시주를 채웠지 싶습니다.

이렇게 다니며 돈을 벌어 점차 마방 조직의 규모를 키워나갔을 겁니다.

작은 마방의 꿈은 많은 돈을 벌어 큰 마방이 되고 나중에는 회사를 설립해 그 아래

여러 마방조직을 두고 또 지역마다 지점을 두어 최종적으로 재벌 마방이 되는 일이지 싶네요.

 

 

이들은 짧게는 며칠간의 장삿길에 나섰으며 길게는 반년 이상을 다니기도 했다네요.

길이 끊어지고 강을 만나면 줄을 양쪽에 연결해 건너기도 했고 암벽의 바위는 정으로

일일이 깨어가며 새로운 길을 만들기도 했다고 하네요.

이러다 보니 난공사를 만나기라고 하면 몇 달간 그 지역에 머물러야 하기에

그곳 꾸냥과 눈이 맞아 그냥 눌러앉아 살기도 했다고 합니다.

 

 

또 한 번 떠나면 오래도록 객지에 머물러야 하기에 일부 지역에서는 여러 형제가 한 명의

여자를 부인으로 두고 부인을 공유하는 재미있는(?) 풍습마저 생기기도 했다네요.

그러니 형제간에 집에 머무르는 일자를 정해 마방을 따라나서는 시기를 조율해 한 남자만

매번 순서대로 집에 남아 집안을 돌보며 부인과 사는 민주적인 방법을 취하기도 했다지요?

 

 

워낙 마방의 생활이 집안에 머무르는 시간은 적고 세상을 떠돌며 살아야 하기에

아주 효율적으로 공영 순번제로 운영했나 봅니다.

이런 풍습이 마방의 생활 때문에 생겨났으며 지금도 전통으로 이어져 남아있다고 하지요?

그러나 세상이 이제 마방의 시대에서 물류의 변화와 교통의 발달로

점차 사라진 사양산업이 되고 말았네요.

 

 

나시족도 원래 가장이 여자로 무척 생활력이 강해 남자가 주로 했던 일은 양지바른

담장 아래 모여 담배나 피우는 일이라고 하지요?

모수족 같은 모계사회가 지금도 있어 모든 경제력은 집안에서 가장 나이 많은 여자의

손에 있으며 남편이라고 부르기도 뭣한 사내가 밤이슬 맞으며 밤에만 조용히

창문으로 드나드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있지요.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알 필요도 없고 알 수도 없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이런 일이 이 지역의 마방이 성업했던 일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처음에는 주로 차와 말의 교역이었지만, 점차 취급했던 상품이 다양해지고 약재, 가죽,

향신료, 도자기, 비단, 소금, 모피에서 일상생활용품까지 돈이 되는 것이라면 가리는 것이

없었을 것이며 세상이 필요하다고 하면 코로나 백신처럼 어느 것이나 마방의 상품이 되었습니다.

 

 

때로는 중간 역참에 머무는 도중에 그곳 꾸냥과 눈이 맞아 사랑에 빠져 그냥 그곳에

주저앉은 마방도 있었고 덜수처럼 속으로 애만 태우다 프러포즈도 못한 체 무심한 세월만

흘러 닭 쫓던 개 지붕만 쳐다본다는 바로 그 개처럼 개가 된 개 마방도 있었을 겁니다.

당시 마방은 지금의 대기업이나 공무원보다도 직업이 안정되고 더 많은 돈을 벌었기에

뭇 꾸냥의 선망의 대상이 된 것만은 분명합니다.

 

 

처음 덜수처럼 덜렁거리며 마방 조직에 인턴으로 몸 담았다가 멘토의 도움으로

일취월장하여 대방 조직을 거느리는 마궈터우가 된 후 인턴 마방이 들어오면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해 장사란 이문을 남기는 일이 아니고 사람을 남기는 일인 게야!"라며

은퇴한 전설의 마방 덜수도 있었겠지요?

처음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에 창대해진다는 말도 있잖아요.

 

 

마방의 우두머리는 늘 말과 상품과 조직원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고

길을 선택할 때 가장 빠르고 안전한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길이 사라지거나 없을 때는 또 강물이 불어 다리가 사라졌을 때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일도 책임져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길을 내고 다리를 만들 때 드는 비용은 이 지역을 다니는 마방

조직이 공평하게 공사 비용을 모아 공동으로 충당하며 위의 사진에 보듯이

아찔한 절벽에 금을 그어놓듯 만들었지 싶습니다.

그때는 중국 정부도 하지 못한 일을 이들 스스로 했다는 것 아니겠어요?

 

 

차마고도란 이들에게는 어떤 의미입니까?

이곳에서는 우리가 그런 험난한 길을 만들며 다녔던 마방들의 애환을

잠시 느껴보는 일뿐입니다.

마방은 길이 있다면 무조건 갑니다.

길이 없다면?

그래도 갑니다.

왜? 어떻게?

 

 

길이 아니면 길을 만들면 되기 때문입니다.

원래 세상에는 길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이 다니며 위의 사진에 보듯이 새로운 길을 만들었고 생겨났습니다.

 

 

하늘길, 삶의 길, 생명의 길, 마방의 길...

이렇게 한번 집을 나서면 걸어서만 다녀야 하기에 수년까지도 걸렸다 하니

역마살이 끼어도 한참 끼어야 이런 생활을 했지 싶습니다.

길을 가다가 길이 끊어지면 다시 길을 내고 갔을 것이고 강을 만나면

외줄을 연결해서라도 강을 건넜을 겁니다.

 

 

이때 이들은 어떤 신발을 신었을까요?

아무래도 튼튼한 가죽으로 된 신발을 신었겠지만, 이것은 배부른 소리가 아닐까요?

 

 

위의 사진처럼 우리의 짚신 같은 것을 신기도 했다 합니다.

그런 짚신이 아직도 팔리고 있기에 찍어보았습니다.

뭐 우리 선조들도 예전에 먼 길 나서려면 이런 신발 몇 개를

예비로 챙겨서 길을 나섰지 싶네요.

 

 

차마고도...

처음에는 윈난 시짱 그리고 쓰촨 간에 교역로가 열렸고 그 후에는 더 먼 지역까지

점차 시장을 넓혀갔을 겁니다.

그러니 어디까지라고 단정할 수 없이 마방이 가는 길은 모두 차마고도의 연장선이었을

것이며 처음 시작은 윈난 지방의 차와 토번의 말과의 교역이라고요?

그러면 왜 이들은 차를 구하기 위해 그런 위험을 무릅쓰며 다녔을까요?

이런 일이 바로 차마고도를 통한 차마호시가 생겨난 일이겠지요.

 

 

왜 고원지대에 사는 유목민인 토번 사람들은 차에 열광을 했을까요?

이는 분명 이들이 살아가는 가장 기본적인 식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겁니다.

녹차는 갈증을 해소하고 소화를 돕고 음식의 느끼한 맛을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지요?

또 몸을 따뜻하게 하고 특히 녹차에 들어있는 폴리페놀의 일종인 카테킨Catechin)이라는

성분이 배뇨작용이 있어 고산 지방에 사는 사람에게는 특히 좋다고 하며 항산화 효과는 물론

함암작용도 있고 콜레스테롤 농도를 조절하는 효과와 비만이나 치매 예방에도 좋다고

하니 육식에 유제품으로만 살아갔던 유목민에게는 이만한 보약같은 식품도 흔지 않았을 겁니다.

 

 

따라서 토번에 사는 유목민에게는 그야말로 천혜의 식품인 셈이지요.

토번에 살았던 사람은 농사짓는 법을 모르거니와 농사조차도 되지 않는 척박한 땅에 살았기에

주로 육식을 하거나 가축의 젖을 마시거나 가공하여 먹었기에 고원 지방에 살았던 유목민에게는

차란 필수 불가결한 생명의 식품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겠지요.

 

 

윈난 지방 어디에서나 쉽게 자라는 찻잎을 따서 말과 가죽 등과 바꾸기 시작하며

이게 황금알을 낳는 일이 되면서 많은 사람이 마방이 되기를 원했으며

위험한 길도 마다하지 않고 떠났을 겁니다.

이런 일로 중원의 역대 정권은 이차치변(以茶治邊)이라는 정책을 펴며 차를 미끼로

주변 세력을 길들이는 방법으로 활용하기도 했다지요.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지금은 새로운 길이 열렸습니다.

조로서도(鳥路鼠道)라는 길이 신작로가 되고 그 길로 많은 화물 트럭과 화차가 다니며

대량으로 물자를 이동합니다.

이제 이들의 경쟁력에 밀려 마방은 사라지고 전설 속에만 남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까지 나라와 나라. 문명과 문명, 세상의 모든 물자와 물자를 이어주는

전령사는 그 역할을 마쳤습니다.

그러나 아직 중국은 오지가 많아 그런 문명의 이기가 닿지 않은 곳이 많습니다.

그런 곳에서는 아직도 마방이 그런 역할을 이어가고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