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호애묘(麻浩崖墓)와 형가자진(荊軻刺秦)

2013. 10. 7. 08:00삼국지 기행/삼국지 기행

어촌에서 우리나라 순두부와 비슷한 두화판(豆花板)이라는 것으로 간단히 요기하고

또 길을 나서는데 어촌이라는 마을은 마치 강호의 무림고수들이 겨루었던 중국 무협영화에서나

봄직한 그런 작은 마을이었고 어촌을 지나 아까 보았던 홍교와 풍우교를 섞어찌개로 만든

다리 방향으로 가는데 왼편에 위의 사진에 모이는 마호애묘라는 곳이 보입니다.

낙산대불을 가시는 분은 여기를 놓치지 마시고 보세요.

제법 볼만 한 곳입니다.

 

우리가 들어올 때 산 입장권에 여기 마호애묘와 방금 설명한 섞어찌개 다리를 건너면 오우사라는

절로 갈 수 있는 통표이기에 시간이 있으신 분은 여기도 구경하고 가는 게 좋을 듯합니다.

아무래도 이곳은 많은 분이 지나치실 것 같아 여기 사진을 올려봅니다.

 

마호애묘(麻浩崖墓)의 마호는 이곳 지명이라 합니다.

그러니 마호라는 지역에 있는 석벽을 파내고 무덤을 만든 곳이라는 말일 듯하네요.

애묘란 사랑하는 고양이가 아니라 이런 절벽을 깍아 만든 형태의 묘지이기 때문이죠.

안으로 들어가면 위의 사진처럼 석벽을 파내고 그 안에 시신을 관에 넣어 보관했다 합니다.

 

그 관이 목관일 수 있으나 여기는 제법 지체 높은 사람들이 묻힌 곳이기에 모두 석관을 사용했다

하며 일반 풀뿌리 민초와는 달리 죽어서까지 차별화 전략을 사용했으며 당시로는 가장 화려한

명품 석관에 넣어졌나 봅니다.

죽어서도 무덤 안에서 마차를 두고 마부까지 부리고 싶었던 겁니까?

석곽에 아주 멋진 조각으로 멋을 부렸네요.

어느 곳에서는 순장했던 곳을 보니 정말 마차도 말도 마부까지도 모두 묻기도 했지요.

 

옛날에는 이런 형태의 무덤을 이 지방에서는 그냥 애묘라고 불렀다 합니다.

그 모습을 보면 마치 벌집 모양의 무덤인 셈입니다.

죽은 자의 아파트인가요?

아니면 연립주택인가요?

죽어서도 심심하지는 않았겠어요.

이렇게 모여 있으면 귀신들끼리 모여 반상회도 하지 않았을까요?

 

이번에는 주작이 새겨진 관입니다.

주작은 사신 중 남쪽을 지키는 영험한 상상의 동물로 생각했죠.

공작의 모양에서 유추했을 것이고 이를 봉황의 모습이라고도 하지요.

이 새가 나타날 때는 세상이 평화로울 때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무덤 안에서는 주작이 통닭만도 못한 존재가 아닐까요?

죽고 난 후 아무리 화려하고 폼 나게 만들어도 살아 돌아다니는 佳人만 하겠어요?

 

사신도의 위치는 동쪽은 청룡, 서쪽은 백호, 북쪽은 현무라고 했을 겁니다.

살아서 핏대 올리고 살며 죽어서도 격식을 따지니 인간은 참 피곤한 존재가 맞나 봐요.

이렇게 동서남북을 각각 전문적으로 책임지는 영험한 동물을 만들어

인간은 그런 동물에 내세를 맡겼나 봅니다.

佳人은 알 수 없는 동물을 내세워 다음 세상보다 사바세상에서 마눌님과 행복하게 살렵니다.

위의 사진은 악령을 잡아먹는 백호의 모습이라 합니다.

 

그러기에 석관을 보면 이렇게 동서남북에 따라 각각의 동물을 새겨놓았습니다.

그런데 죽은 자에게 동서남북을 지켜준다고 뭐가 달라질까요?

무덤 안에는 석관만 있는 게 아니라 평소 사용했던 물건도 함께 넣어두어 당시의 문물을

알 수 있기에 당시 모습을 슬쩍 들여다 봅니다.

오래전에는 사람도 순장했다고 하지만...

 

중국의 장묘문화는 땅이 넓은 곳이기에 민족마다 다르고 지역마다 달라 그 모습도

기이한 것도 많아 그 자체가 하나의 관광자원으로도 알려졌지요.

여기도 그런 곳 중의 한 곳이라고 해도 되겠네요.

이런 형태의 애묘는 동한 시기에 이곳 쓰촨 지역에 무척 유행했던 장묘 방법인가 봅니다.

 

그런데 석벽을 파고 들어가 암굴 속을 이렇게 넓게 파려면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뭐.. 죽은 자가 파는 게 아니니까 괜찮나요?

이런 사람을 살아서도 여러 사람 힘들게 하고 죽어서도 고통을 주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고 우리 같은 민초가 죽으면 이런 곳은 엄두도 내지 못할 겁니다.

 

대불이 있는 능운산과 오우산에만 이런 형태의 동굴 무덤이 약 0.1 제곱킬로미터 안에 무려

500여 개나 된다고 하니 당시는 죽은 사람 장사지내기 위해 단단한 바위를 깊게 파야 하니

산사람 잡겠습니다.

죽어서까지 민폐가 아닌가 생각되지미나, 품삯을 주며 일을 시켰다면

오히려 경제활성화에 도움이 되었지 싶네요.

아마도 이곳은 풍수적으로도 무척 좋은 지역이 아닌가 생각되네요.

 

위의 사진은 몇 년 전 구이저우 성을 구경하러 갔을 때 먀오(苗)족의 독특한 장례방식을

구경간 적이 있었는데 그곳도 여기와 비슷한 동장(洞葬)이라는 방법으로

동굴 속에 관을 안치하는 방법이었지요.

여기와 다른 것은 이곳은 후손이 동굴을 파서 만들지만, 그곳은 자연적으로 생긴 동굴 안에

죽은 자의 시신을 넣은 관을 모시는 방법이었습니다.

여기는 관도 돌로 만든 석관이지만, 그곳은 나무로 만든 목관을 사용했더군요.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도 나라와 민족에 따라 다르듯이 죽어서도 마지막 가는 길이

또 다르기에 여행이란 이렇게 다른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을 구경하는 것만 아니라

죽은 모습도 구경하고 다니나 봅니다.

그러나 이곳 마호애묘와 구이저우의 동장은 같은 동굴 속에 관을 안치했지만,

그곳은 풀뿌리 민초의 모습이고 이곳은 행세깨나 했던 사람의 모습일 겁니다.

능력 있어 돈과 권세를 가진 자는 죽어서도 차별화 전략을 사용하네요.

 

그곳은 그냥 내다 버리듯이 시신을 모셨고 이곳은 많은 사람이 아주 슬픈 듯

더 많이 울며 거창하게 모셨을 겁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니 풀뿌리나 용가리 통뼈나 모두 같아집니다.

살았다는 것과 죽었다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요?

 

살아있다는 것은 이런 곳을 구경하고 다시 나와 다른 곳으로 갈 수 있지만, 죽은 것은

이런 곳을 구경도 하지 못하고 들어와 다시는 밖으로 나가지 못한 차이일 겁니다.

 

중첨자모궐(重檐子母闕)이라는 부조입니다.

옛날에는 이런 전망대 역할을 하는 궐(闕)을 능묘 앞이나 왕궁 앞에도 세웠다 합니다.

우리가 임금이 사는 곳을 대궐(大闕)이라 함은 이 궐의 모양이 제일 크게 솟은 왕궁이기 때문에

대궐이라 부르잖아요.

 

궐을 중국에서는 관(觀)이라고도 불렀다 합니다.

아마도 감시대로 더 이용가치가 있었나 봅니다.

물론, 민초에 알리는 게시물도 궐에다 붙였을 거고요.

 

여기 사진에 보이는 부조는 두 개의 궐이 보이고 어머니와 자식이 보입니다.

두 사람이 만나 손을 맞잡고 인사를 나누는 것을 새긴 것으로 이렇게 영원히 살고 싶었나 봅니다.

누구나 이렇게 가족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게 꿈이지만, 인간이 어찌 신의 영역에 도전하겠어요.

그러니 살아있는 동안만이라도 무섭게 사랑하며 살아야겠네요.

 

여기의 장례풍습 또한 독특한 것이기에 이곳까지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받은 모양입니다.

이게 단지 무덤의 형태나 모습으로만 세계문화유산이 되지는 않겠지요.

여기에 석곽이나 동굴 벽에 새긴 그림이나 글자나 그리고 함께 묻은 부장품이 예술적이고

보호할 가치가 있고 역사적으로도 보존해야 할 가치가 충분한 유물이라는 의미일 겁니다.

그러니 예술적으로는 아무 가치도 없어 보이는 러산 대불만 씩씩거리며 보시지 마시고

여기를 빼지 마시고 꼭 들러보세요.

 

여기 아주 특이한 네 개의 부조가 있어 소개합니다.

형가자진(荊軻刺秦)이라는 스토리가 있는 부조입니다.

무덤 속에서 이런 부조를 보고 귀신처럼 이해한다면 무덤 안의 주인 귀신도 놀라지 않겠어요?

아주 간단한 네 개의 작은 부조이지만, 그 내용은 엄청난 이야기일 겁니다.

 

사진을 보시면 제일 오른쪽에 엎드린 자가 형가로 보이며 앞에 머리만 보이는 게 진나라를

배반하고 연나라로 도망간 번어기라는 자의 머리일 겁니다.

그리고 당시 형가는 연나라 지도까지 챙겨가 땅 일부도 바친다고 진시황을 면담하는 일까지

성공했는데 물론 비수는 지도 속에 감추어 갔을 겁니다.

 

이게 이해하기 어려운 게 그 지도는 종이도 없었을 텐데 어디다 그렸을까요?

비단에다가요?

바로 그 옆의 부조가 진시황을 살해하려고 칼을 들고 뛰어나가는 형가를 누군가 허리춤을

부여잡고 있는 모습으로 마치 레슬링에서 허리 안아 감아돌리기와 같은 자세로 보입니다.

 

물론 사기의 기록과는 조금 다릅니다.

사기에서는 어의인 하무저가 약봉지를 던졌다고 했지요.

오른쪽으로부터 세 번째 부조처럼 말입니다.

메이저리거인 류현진이가 투구하는 모습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진시황의 어의였던

허무저의 약봉지 투척 모습입니다.

 

형가라 하면 사마천이 쓴 자객 열전에 등장하는 전문 칼잡이의 대표선수가 아니겠어요?

그러나 전문 해결사라고 연나라 태자 단(丹)에게 거액 연봉으로 스카우트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최대의 먹튀였으며 덕분에 연나라는 형가의 진시황 살해의 실패로 진시황에

한방에 훅~ 가는 불행한 사태가 발생했답니다.

사마천의 사기에도 비중 있게 출연한 형가는 아마추어처럼 일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리고 왜 이 조각을 무덤 안에 새겨두었을까요?

진시황을 위대한 사람으로 알리게 함입니까?

아니면, 형가가 의로운 일을 했다는 말입니까?

혹시, 후자라면 이 무덤의 주인은 자객의 혈통을 잇는 칼잡이 집안이란 말입니까.

 

그 일이 있고 난 후 진나라 어의들은 모두 약은 짓지 않고 약봉지만 던지는 연습을 했을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 제일 왼쪽의 부조는 형가가 진시황의 칼을 맞고 "옴마야~ 마이 아파~~" 하며

숨져가는 모습으로 보입니다만, 워낙 실내가 동굴 속 무덤이라 어둡고 또 부조 보호 차원에서

유리로 막아놓아 제대로 사진 찍기가 쉽지 않아 이 정도밖에는...

뭐 어떻습니까?

아마추어 여행자인 佳人이 이 정도만이라도 찍고 다니면 되지 않겠어요?

 

사마천의 자객열전에 나오는 형가 이야기를 조금 길게 읽으시려면 클릭하세요.

자객 열전 - 형가 1 (daum.net)

 

자객 열전 - 형가 1

 오늘부터 며칠간 자객 중 그래도 역사에 기억되는 형가라는 사람에 대하여 알아볼까 합니다. 형가(荊軻)는 진나라 시황제를 살해하려다 실패한 풍운아입니다. 시황제가 누굽니까? 바로 그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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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원수를 만들지 마라.

남과 원수를 맺는 것은 스스로 재앙을 심는 것이고

선을 버려두고 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를 해치는 것이다.

(명심보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