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2. 3. 00:03ㆍ중국 여행기/광동,광서,귀주성 배낭여행

진마마터우(금마부두)와 이어진 길이 바로 마을의 중심도로인
진마지에(금마가(金馬街)가 되고 강에서 마을을 바라보고 오른쪽으로는 또 다른 길인
린지앙지에(임강가:臨江街)가 보입니다.
거리 이름이 그럴 듯 해 보여도 글자 그대로 보면 강 따라 난 길이라는 아주 단순한 이름입니다.
이 길이 청나라 도광 14년(1832년)에 강을 따라 건설한 양메이의 일번가라고 합니다.
오래된 길인데 한 번 걸어봐야 하지 않겠어요?
우리 부부와 함께 걸으실까요?
길이가 약 300m 정도이고 폭은 3.8m의 도로에 그때 이미 하수도를 만들고
그 위를 청석으로 석판을 깔아 놓았답니다.
윈난 성 리지앙에 오화석판을 깔아놓은 것처럼 이곳은 청석을 깔아 놓았습니다.
이제 계속 마을 골목 구석구석을 걷겠습니다.
이 골묵을 따라 볼만한 것들이 제일 많습니다.

지금의 이 초라한 마을이 발전하려면 뭔가 일을 꾸며야 합니다.
우리나라 정동진은 간이역이 있는 정말 작은 어촌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모래시계라는 드라마에 비실거리는 소나무 한 그루가 보이는 기차역 때문에
갑자기 사람이 몰려가는 곳이 되었습니다.
소나무 팔자 정말 모릅니다.
옛날 우리 어렸을 때 그곳에는 해수욕도 가지 않았습니다.
만약 양메이가 음모에 성공했다면 팔자 한 번 고치는 것 아니겠어요?
이곳도 수많은 사람이 드나들었으며 특히나 베트남과의 국경무역도 빈번히 일어난
곳인데 왜 사연이 없겠습니까?
없다면 제가 이곳에 석 달 열흘 주저앉아 이야깃거리라도 만들어 주고 오고 싶습니다.
건너편에 있는 아무 바위나 보고 베트남 아가씨인 쓰언 흐엉(春香) 바위라고 하면 됩니다.
그래야 베트남 관광객도 몰려옵니다.
바로 아래 사진에 보이는 바위가 어떻습니까?
지금은 배를 묶어두는 바위지만 그럴 듯 하지 않습니까?
마치 두 사람이 부둥켜 안고 격정적으로 입맞춤 하는 모습으로 보이지 않습니까?
사랑에 굶주린 佳人 눈에만 그리 보이나요?
佳人과 같은 느낌을 지니신 분도 사랑의 입마춤을 간절히 원하시는 분이시군요?
마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으로 나오는 비비안 리와 클라크 게이블의 격정적인 입맞춤....
그리고 스칼렛의 한 마디 "Tomorrow is another day"라고 하며 돌아설 것 같은 형상이 아닙니까?
그러면 양메이의 내일은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지 않겠어요?

예전에 베트남 흐엉 아씨와 중국의 마오(毛)군과의 국경을 초월한 사랑 이야기를 만드는 겁니다.
그때 여권이 있었겠습니까?
비자받을 일도 없었을 겁니다.
그냥 물길을 따라 베트남과도 교역이 있었을 테니까요.
보여줄 게 없으면 이야기라도 만들면 됩니다.
"떠나는 님 보내오며 서러운 마음에 끝내는 눈물 흘리고 말았지요.
눈물 보이지 않으려고 돌아서서 소매로 슬며시 훔쳐버렸지요.
소매가 더러워질까 봐 그러는 게 아니라 맺은 정 끊어질까 두려워서 그러지요."
정주고 야반도주 말라는 쓰언 흐엉(春香) 아씨의 손을 뿌리치고 돈 벌어 다시 오겠다는
미스터 마오의 하룻밤 풋사랑이야기.
그리고 이곳으로 와, 번 돈 모두 밍월이에게 털리고 개털이 되어 내 사랑 베트남 흐엉이 있는
서쪽만 바라보고 흐르는 강가에서 흐엉 흐엉 부르며 눈물짓던 못난 사내 이야기 말입니다.

그러다가 건너편에 있는 아무 바위 보고 그 사내는 그곳에 바위로 변했다고 뻥을 치는 겁니다.
아니면 안개 심한 바람 부는 날 홀연히 강에 흐엉 아씨의 얼굴이 보이고 마오 군은 미친 듯이
흐엉을 부르며 물속으로 들어가다 강물에 휩쓸려 죽었다고 해도 좋습니다.
그리고 흐엉 아씨는 한 마리 나비가 되어 파르르 강을 건너 날아갔다고 해도 좋습니다.
원래 드라마란 해피 엔딩보다 안 해피 엔딩가 더 사람 마음을 짠하게 만듭니다.
두 사람 모두 보내버리면 전설의 고향이 되니 한 사람만 보내버려야 더 애처롭습니다.

마을 입구에는 쿠웨이성로우(괴성루:魁星樓)라는 서낭당 같은 곳이 있습니다.
그곳의 용도가 아마도 뱃사람의 안녕을 기원하는 게 아닐까요?
그러면 한국의 심청이를 빌려 오는 겁니다.
여기에서 풍랑을 잠재우는 水神에 제사를 지내고 중국판 심청이를 태우고 떠난 자리였다고요.
아비가 눈이 멀었다고 하면 너무 속 보이니까 걷지 못했다고 합시다.

유치하다고요?
제가 생각해도 부끄러운 정도로 많이 유치합니다.
그러나 원래 사랑이야기가 유치한 게 아닙니까?
본인이야 목숨 건다고 심각하겠지만....
사랑이요?
그거 유치하기도 하고 무척 신비한 겁니다.
그 이유는 사랑에 대해 설명을 하고 정의를 단번에 명쾌하게 내리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13억 중국사람의 사랑이야기는 모두 13억 개나 되니까요.
예전 클래식한 영화를 보면 엄앵란과 신성일이의 "나 잡아봐라~" 게임도 얼마나 유치합니까?
푸른 초원에 한 그루 나무 있고 그 나무를 돌며 여자가 뛰면 왜 남자는 반대로 가거나
서 있기만 해도 여자를 잡는 데 같은 방향, 같은 속도로 빙글빙글 돕니까?
보는 관객 돌아버린다고 온종일 돌지는 않더군요?
세월이 지나 지금 보면 촌스럽지만, 그래도 그 당시에는 무척 인기 있는 명장면이었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푸른 잔디에 팔베개하고 누워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 두둥실 떠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유치하기 짝이 없는 자유당 때 이상한 성우의 코맹맹이 목소리로 "아이~ 몰라~"하며 대사 합니다.
왜 그런 날은 소나기도 퍼붓지 않는 답니까?
아마 그때 그런 영화를 찍었던 감독이나 출연 배우가 지금 그 영화를 다시 보면
자신이 부끄럽다고 할 겁니다.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오페라로 만들어 공연하면 아마도 이 작은 마을인 양메이는
밀려드는 관광객으로 하여금 정신 못 차릴지도 모릅니다.
왜 중국사람들 가는 곳마다 무슨 공연 잘 만들잖아요.
장예모인가 누군가 하는 사람 말입니다.
없는 역사도 만들고 시시한 이야기도 과대 포장하여서 말입니다.

인건비 싸다고 늘씬한 처자를 무지하게 많이 동원하여 옷은 입은 듯 마는 듯하여 관객의 정신줄
쏙 빼게 하고 조명발로 화려하게 번쩍거리게 하고
서커스보다 더 난이도를 높인 공중곡예며 쭉쭉 빵빵 예쁜 아가씨를 출연시키면 많은 구경꾼이 몰려옵니다.
제목도 춘향지애(春香之愛)면 어떻고 호접지몽(蝴蝶之夢)이면 또 어떻겠습니까?
인상 쓰지 않는 안인상 佳人 夫婦는 어떻겠습니까?
차라리 눈을 감고 들어도 어깨가 저절로 들썩이고 우리의 혼을 깨워주는
사물놀이가 훨씬 제 마음을 감동하게 합니다.
사물놀이를 처음 보고 그 소리를 들었을 때 佳人은 심장이 터지고 숨이 멎는지 알았습니다.

그리고 만약 장계가 낙방하고 배를 타고 가다가 해가 저물어 이 마을에서 하룻밤이라도
자고 갔다면 풍교 야박보다 양메이 야박이나 용담 야박이라는 시를 썼을지도 모릅니다.
오지 않았다면 오게 하면 됩니다.
장계의 고향도 사실 정확히 모르는 걸요.
쑤저우에서 여기까지는 너무 먼가요?
그 시 한 편 때문에 볼 것도 변변치 않은 한산사로 오늘도 관광버스로 미어터지게 실어 나르잖아요.
한산과 습득도 함께 주워올까요?

"달 지고 까마귀 울고 찬 서리는 하늘에서 가득히 내리는구나......로 시작하는 풍교 야박에
용담 석영(龍潭夕影)에 비치는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근심 속에 잠을 청하는데,
주오지앙(左江)이 휘몰아치며 만들어낸 깊은 연못 쪽빛 물 위로 저녁 황금 노을이라도
비출라치면, 용의 비늘인 양 잔잔한 황금빛 물결이 출렁이누나."라고 슬쩍 바꾼 시를
남겼는데 얼마 전에 발견되었다고 하며 한지에 시를 쓰고 소여물 쑤는 데 넣어두었다
꺼내 말리면 아주 오래된 것처럼 누렇게 변색되어 연대측정마저 어렵습니다.
그리고 관제시죽처럼 멋진 돌에 글을 새겨놓으면 탁본도 뜨고
그 시를 보기 위해 양메이로 몰려듭니다.

만약 남기지 않았다면 시를 그럴듯하게 한 수 지어 2천 년 전의 佳人이라는 시인이라고
한 사람을 설정하고 만드는 겁니다.
원래 중국이 없던 역사도 무슨 공정이니 하며 잘 만드는 나라가 아닙니까?
그리고 중국은 바로 그 자체가 전설의 고향으로 가득 찬 나라가 아니겠습니까?
황망하게도 조조 무덤을 이곳으로 옮길까요?
아니면 꾀돌이 제갈량이 남만 정복 길에 배를 타고 양메이를 지나는데 갑자기 광풍이 몰아쳐
佳人 얼굴을 그려 뱃머리에 붙였더니 순식간에 광풍은 잠잠해져 제갈량도 놀라
이곳 양메이 강변에서 3박이나 하고 갔다고...
그래서 제갈량 쇼를 화려하게 만드는 겁니다.
원래 시안에서 공연하는 양귀비 쇼에는 가짜 양귀비만 있잖아요.
마을 북쪽 옛 나루터 주변에 용담석영(龍潭夕影)이 있습니다.
이곳 용담은 저녁 해가 서산을 넘어갈 때 비추는 석양의 경관이 아름답다고 소문이 난 곳입니다.
연못은 아니고 강이 휘돌아 나가며 마을 안쪽으로 깊이 파인 곳이 연못처럼 보입니다.
아래 사진이 바로 용담석영의 대낮입니다.
그러나 황금에 약한 여자를 이곳에 데리고 와 황금빛으로 물드는 저녁에
청혼이라도 하면 "커이~ 커이" 한답니다.

용담석영에 얽힌 이야기는 산제마오(삼계묘:三界廟) 앞 연못에서 시작된다고 합니다.
삼계묘란 불교용어로 指色界, 慾界, 無慾界를 말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天界, 地界, 人界를 일컫는다고 합니다.
"강물이 굽이치며 만들어낸 깊은 연못의 쪽빛 물 위로 햇살이 비추면 용의 비늘인 양
잔잔한 은빛 물결이 출렁인다.
연못 옆의 큰 바위는 마치 용머리 같았다."
그래서 이 곳을 용담이라 불렀답니다.

이곳의 명소와 건물 중 몇 곳을 더 돌아봅니다.
지루하시죠?
오늘로 양메이는 안녕하겠습니다.

우선 봉래선경(蓬萊仙境)이라고 아름다운 곳이 있습니다.
봉래선경이란 도교에서 말하는 무릉도원 정도 되는 이상향이라지요?
이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저녁 일몰 경치 또한 일품이라고 합니다.
그래도 이 정도로 봉래선경이라 함은 좀 약합니다.

청대 건륭년간에 황서까오(黃世高)라는 사람이 건축한 사저인
황 씨 장원(黃氏庄園)이라고 있습니다.
집을 지은 지 이미 200년이 넘었다고 합니다.

이 집은 지금도 주민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입구에서 이미 입장료를 받았기에 마을 안에는 모든 사람에게 무료개방을 하고 있습니다.
문당도 허접해 보이고 호대도 두 개정도라 크게 돋보이는 집은 아니지만,
크게 내세울 게 없는 마을이라....

원래 이 동네 사람이 아닌 집주인은 장사를 하여 큰돈을 벌었고 어쩌다
여기 양메이에 정착을 하게 되었답니다.
그가 이 집을 지은 후 양메이의 모든 집은 황 씨 장원을 따라 집을 짓게 되어
이 집이 이곳 주택의 모델 하우스가 된 셈입니다.
청대의 전통적인 양식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답니다.
이런 것을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뺀다고 하나요?

거인옥(擧人屋)은 두 씨(杜氏) 가문의 개인 저택입니다.
들어가는 입구에 벽돌 두 장 크기의 작은 팻말이 있어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쉽습니다.

淸代 도광 8년(1829년) 15대 손인 두위엔춘(杜元春)이 구이린(桂林)에서 실시한 과거에
거인으로 급제한 뒤 거인(擧人)이란 편액을 대문에 내건 뒤부터
거인옥이란 이름으로 불렸답니다.
거인(擧人)이란 明, 淸代에 3년에 한 번 각 성에서 실시된 과거시험인
향시에 합격한 사람에게 내리는 칭호였다 합니다.
그러니 잘났다는 의미로 들어가는 문위에 걸어놓았겠지요?
요즈음 우리나라도 누가 메달 따거나 고시 패스하면 마을 입구에
"우리의 꿈동이~ 뉘 집 몇 째"하며 플래카드 걸잖아요.
지금이나 그때나 같은 의미가 아니겠어요?

두위엔춘은 오 남매 중 유일한 사내아이로 아버지가 건강이 좋지 않았고 전쟁으로 인하여
공부를 더 하지 못함으로 아들에게 공부에 전념할 것을 말하고 지도함으로
가문의 영광인 향시에 패스를 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자랑스러웠을까요?
사실 인구가 많은 중국이기에 황제 앞에서 열리는 전시가 아니더라도
지방의 향시에만 급제했다면 대단한 일이 아니겠어요?
부모는 자식을 통하여 그 꿈을 이루었고 자식은 아버지의 격려와 보살핌에 가문을 빛냈으니까요.
그리고 첫 번째 중당 위에는 아버지가 매우 건강이 좋지 않았기에
오래 사시라는 의미로 수(壽) 자를 새겨두었습니다.
아래 사진이 향로로 보이시나요?
아니면 수(壽) 자로 보이시나요.

淸代에 만든 금비(禁碑)도 있습니다.
무엇을 금했는지는 저도 알지 못합니다.
마작 그만 하라고 했을까요? 무르팍 썩는다고...

이런 곳을 걷다 보면 마음속으로 한 편의 소설도 떠오르고 영화도 생각납니다.
포구가 있는 곳은 리지앙처럼 역참으로 발전된 지역과 마찬가지로 다른 곳보다
더 많은 이별과 만남의 사연이 무척 많은 곳일 겁니다.
여보! 마눌님~ 이곳 난닝에 올 때 침대버스 타고 베드 신을 찍었으니
오늘 이곳에 온 기념으로 애정영화 한 편 찍고 갈까?
"사랑은 양메이 꾸전을 흐르는 주오지앙(左江)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요우지앙(右江)가에서도 꽃을 피운다."라고요.
아~ 벌써 이 마을에서 많은 영화를 찍었군요?

그래서 이곳에서도 많은 드라마나 영화가 촬영된 장소라고 합니다.
예스러운 마을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으니 Why not?
광시에 있는 덩샤오핑(鄧小平在廣西), 두견이 울다(杜鵑聲聲) 그리고
태평천국 운동의 다섯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인 풍운아 스따카이(石達開) 등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지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그래도 우리 부부 왔다간 흔적은 남겨야죠?
주오지앙(左江) 가에 저녁노을 붉게 물들고
강물은 하염없이 흘러가누나
수많은 사연을 간직한 강물은
오늘도 양메이를 스쳐 흘러가는데
무심한 아이들은
옛 영화를 아는지 모르는지
나그네인 佳人 이제 먼 길 떠나려 채비하니
초저녁 달이 강물 위를 비춰주누나.
그러나 아직 저녁 되려면 멀었습니다.
그리고 난닝으로 떠나는 막차가 4시라고 하니 떠날 채비를 해야겠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난닝에 오면 양메이 꾸전을 한 번쯤 들려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한국인 대부분은 난닝을 오는 이유가 베트남으로 가기 위함과
더티엔(덕천德天)폭포를 구경함일 겁니다.
그러기에 이곳은 별로 찾지 않습니다.
하루 정도 여유가 있으시다면 둘러보기 딱 좋습니다.
과거의 영화는 사라지고 현실에 적응하고 살아가기에 비움을 실천하기는 딱 좋은 곳입니다.
이제 천천히 걸어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습니다.

지금 시간 오후 2시입니다.
이곳에 11시 45분경에 도착했으니 2시간 조금 더 돌아보았습니다.
30분 정도 버스 안에서 기다렸다 2시 40분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4시에 난닝으로 돌아왔습니다.
이곳을 나오실 때는 마지막 차편을 꼭 확인하셔야 합니다.
이때는 4시 30분 차가 막차라고 했습니다.
숙소에 들어오는 길에 과일가게에 들러 바나나와 귤과 망고 두 덩이를 샀습니다.
비행기에서 가져온 플라스틱 칼...
망고 정도의 과일 자르는데 무척 유용합니다.

얼마나 큰지 혼자 하나를 다 먹지 못했습니다.
저녁에는 차오양 공원으로 산보하고 들어왔습니다.
이상으로 양메이 꾸전에 관한 이야기를 접습니다.
워낙 오래된 마을이라 보는 사람마다 모두 느낌이 다르리라 생각됩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佳人의 여행 이야기는 단지 佳人 생각입니다.
진정한 여행자의 배낭 속에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들어 있지만,
佳人의 배낭 속에는 엉뚱한 상상만 들어 있습니다.
이제 양메이 마을의 여행을 모두 마쳤습니다.
내일은 통링 대협곡을 중국인 관광객에 끼어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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