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사표... 그것은 다른 의미인가요?

2013. 10. 29. 08:00삼국지 기행/삼국지 기행

 

무후사.

여기로 걸어오며 오만가지 상념에 빠져보았습니다.

이렇게 혼자 하는 여행은 생각마저 자유롭습니다.

물론, 여러분이 읽기에는 너무 엉뚱한 이야기라서 당황스럽겠지만....

 

이제 무후사 입구에 도착했네요.

우리에게 무후사라고 알려진 이곳은 사실 촉한의 황제 유비의 무덤입니다. 

대문 입구에 걸린 편액이 무후사가 아니고 한소열묘라고 되어있죠?

그렇습니다.

여기는 유비와 공명의 사당이 함께 있는 곳입니다.

살아서 수어지교(水漁之交)라고 하더니만 죽어서도 이렇게 함께 지냅니다.

 

 

왜 후세 사람은 황제의 무덤을 황제의 무덤이라 부르지 않고 그의 신하였던

공명의 시호를 딴 무후사라 부를까요?

유비를 찌질이라고 생각해서일까요?

유비는 살아생전 군자라 했는데 그게 가식적인 인물이라는 말일까요?

 

그래도 여기 무덤은 기본적인 예의를 갖추었네요.

그러니 앞쪽으로는 군주인 유비를 모신 사당이 있고 그 뒤로는 조금 나즈막하게 승상

제갈량의 사당이 있고 왼쪽에 유비의 무덤이 있고 제갈량의 무덤은 지난번 우리가 들렀던

한중 근처인 미엔현이라는 작은 마을의 정군산기슭에 모셔져 있지요.

 

 

그런데 왜 무후사라는 이름으로 더 많아 알렸을까요?

후세 사람이 공명을 더 좋아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언뜻 생각하면 유비는 죽어서도 공명에 얹혀사는 마마보이로 보입니다.

공명이 스무 살이나 더 어리다는데 정말 죽어서까지 이렇게 귀신이 함께

산다는 일은 세상에 그 유래를 찾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귀신끼리도 사랑은 할 수 있을 겁니다.

 

 

중국에는 삼국지 유적이 무척 많습니다.

그러나 그 중 여기가 그 역사나 존재가치로 가장 크고 오래된 곳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입구에 당비(唐碑)와 명비(明碑)가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당비만 하더라도 809년에 세워진

오래된 것으로 원래 이름은 "촉승상제갈무후사당비"라는 긴 이름의 비석으로 당나라 명승상

배도가 글을 짓고 명서예가 유공탁이 글을 썼으며 명공예가 도건이란 사람이 비석의 각문을

조각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문장, 서법, 조각이 삼위일체가 되어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승화되었기에 삼절비(三絶碑)라고도 부른답니다.

 

 

산문을 통과하면 제일 먼저 만나는 게 이문(二門)입니다.

그 문의 편액이 눈에 들어옵니다.

명랑천고(明良千古)라고 썼네요.

 

명랑천고는 명군양신 유전천고(明君良臣 流傳千古)라는 말의 준말이라 합니다.

그 의미는 안목이 높은 군주가 아주 훌륭한 신하를 쓴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물론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군주보다는 신하가 더 마음에 드는 이유는?

유비는 세상에 태어나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었을까요?

유비가 가장 잘한 일이 바로 공명을 모신 삼고초려일 겁니다.

이게 유비에는 로또 10번 연속으로 1등에 당첨된 것보다

더 큰 행운이라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글을 자세히 보세요.

밝을 명(明)의 날 日자가 눈 目자로 바꾸어  目+月로 썼습니다.

이렇게 쓴 이유는 신하를 쓰는 유비의 안목이 천고의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탁월했다는 자랑이 아닐까요?

 

마치 레이더보다 더 정확한 관찰력 말입니다.

여기서 두 사람에 대한 자랑이 흉은 될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공명에 태클 걸 사람도 거의 없을 겁니다.

 

 

이문을 들어서면 양쪽으로 주랑이 보이고 오른쪽은 문화(文華)라고 부르고 왼쪽은

무영(武英)이라고 부르고 이 주랑을 계속 걸어가면 촉한의 문,무신의

조상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안이 들어가면 공명이 북벌을 떠나기 전에 후주 유선에 올렸다는 명문장

선출사표와 2차 북벌을 떠나며 또 올린 후출사표를 돌에 새겨 각문한 것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 글을 읽고나면 중국의 한족이 아니더라도 가슴 안쪽에서 끓어오르는 격한 마음을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글이라 생각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악비가 썼다는 전출사표를 보시고 계십니다.

위의 사진과 아래의 사진을 번갈아 봐주세요.

같은 사람이 썼다는 글이 필체가 다른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습니까?

 

위의 사진은 시작 부분으로 글자가 무척 또박또박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아래의 글자는 점차 정자에서 갈겨 쓴 느낌이 듭니다.

이는 악비가 전출사표를 쓰며 자신도 모르게 글 속으로 빨려 들어가 공명이 되어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제하기 어려웠나 봅니다.

그리했기에 처음에는 글자가 아주 정갈하고 절제된 글자라 보이나 아래 보이는

끝부분은 자기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마음이 혼란해 감정을 절제하지 못해

글자 자체도 많이 흔들렸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또한 佳人만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이 출사표라는 글은 중국에서도 알아주는 문장 중 최고의 명문장으로 알려진

출사표가 아니겠어요?

그것도 남송의 명장이라는 악비가 쓴 글 말입니다.

중국 여행을 하다 보면 출사표를 자주 보게 되고 그 글 대부분이 악비의 글입니다.

왜?

무슨 커넥션이라도?

남송의 악비는 북쪽의 오랑캐인 금나라에 당당히 맞선 장수로 중국에서는

우리나라의 이순신 장군과도 같은 존경받는 사람이지요.

 

네...

그렇습니다.

바로 한족 출신이기에 더 존경받다가 지금은 역사공정이 진행되며 오랑캐의

역사도 모두 중국의 역사라는 인식 때문에 슬그머니 거두어들이는 중입니다.

 

 

후출사표는 격한 감정이 계속되며 글을 시작했나 봅니다.

처음부터 악비의 감정이 그대로 들어나 보이며 이렇게 오래전의 글이지만,

글자의 형태를 보아도 그 사람의 마음조차 읽을 수 있지 않을까요?

헉!!!

佳人이 중국 여행을 하다 보니 이리도 컸단 말입니까?

그 아유는 바로 공명을 무척 자주 만났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럼 잠시 만강홍(滿江紅)이라는 것을 보고 쉬었다 갑니다.

만강홍이란 짬뽕 국물맛이 죽여주는 중국집 이름이 아니고

 악비(岳飛)의 유명한 시라고 합니다.

 

怒髮衝冠, 憑欄處, 瀟瀟雨歇.
성난 머리칼 투구를 찌르고, 난간에 기대서니 오던 비도 그친다.

 

擡望眼 仰天長嘯, 壯懷激烈.
눈을 치켜뜨고  하늘을 우러러 울부짖으니 비장한 마음에 피가 솟구친다.

 

三十功名塵與土 八千里路雲和月.

서른 나이에 얻은 세상 공명은 티끌 같아서, 전선을 치달은 팔천 리에

뜬구름과 달빛만 스칠 뿐이라.

 

莫等閒, 白了少年頭, 空悲切.
어느 때 한가한 적이 있었던가. 소년이 어느덧 백발이 되었으니, 공허하고

슬픈 마음에 가슴이 에인다

 

靖康恥, 猶未雪.
하지만 아직 정강의 수치를 갚지 못했으니,

 

臣子恨, 何時滅?
이 한스러움을 신하된 자가 어찌 잊겠는가.

 

駕長車踏破 賀蘭山缺!
이제 전차를 몰아 하란산을 돌파하리라.

 

壯志飢餐胡虜肉, 笑談渴飮匈奴血.
장부가 뜻을 세웠으니 배고프면 오랑캐의 살을 뜯어 먹고, 

목마르면 흉노의 피를 마시리라.

 

待從頭, 收拾舊山河, 朝天闕.
이제 진두에 섰으니 빼앗긴 산하를 모두 수복한 후에야 

천자의 궁궐을 조회하리라.

 

어떻습니까?

주먹이 불끈 쥐어지지 않습니다.

피를 토하고 비분강개해 지금이라도 창칼을 곧추세우고 오랑캐를

무찌르러 나가고 싶지 않으세요?

 

아니라고요?

마치 격문처럼 과격한 단어가 많이 보인다고요?

그렇군요.

특히 "장부가 뜻을 세웠으니 주리면 오랑캐의 살을 뜯어 먹고, 목마르면 흉노의

피를 마시리라."라는 글은 너무 자극적입니다.

차라리 만강홍의 "짬뽕 면을 씹어 먹고 국물을 마시리~"라고 하면 좋았을 것을...

 

그러나 중국에서는 인육을 먹는 나라이기에 우리에게는 자극적인 말이지만,

저들은 일상의 식생활로 자주 겪는 일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한평생을 살았던 악비이기에 그의 글이 한족의 마음에는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양식이라서 악비의 출사표가 천하를 지배하나 봅니다.

누구는 악비의 글이 아니라 명나라 때 악비를 사칭해 쓴 글이라고도 하더군요.

워낙 쩍퉁이 많은 나라이기에...

 

 

출사표를 올릴 때 왜 북벌에 대한 반대의견이 없었겠습니까?

전쟁이란 말로만 하는 게 아니잖아요.

병사도 차출해야 하고 군비에 많은 돈이 들기에 나라 재정마저 거덜 나는 게 전쟁입니다.

 

그러나 공명은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유선에 이런 출사표를 올리며 반대세력을 말도 꺼내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도 숨어 있었을 겁니다.

"신(臣) 량(亮) 아뢰옵니다."로 시작되는 출사표

 

 

그 첫머리에 등장하는 선제(先帝)라는 유비를 물고 들어온 말이 모든 반대를

잠재울 수 있는 묘약으로 전출사표에서만 선제라는 단어가

열두 번인가 나온 것은 우연은 아닐 겁니다.

그런데 같은 선제라는 글자를 악비는 필체를 모두 조금씩 다르게 썼다는 것도

특이하다고 보겠네요. 

 

先帝創業未半, 而中道崩 , 今天下三分, 益州罷弊 ,
선제창업미반, 이중도붕조, 금천하삼분, 익주파폐,

선제(유비)께서 왕업을 시작하신 지 아직 반에도 미치지 못하였는데 중도에서

돌아가시고, 이제 천하가 셋으로 나뉘었는데 익주가 오랜 싸움으로 지쳐 있으니...

 

출사표를 가만히 읽어보면 그냥 북벌을 나가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반대세력의 입막음도 있고 후주 유선의 일깨우는 내용도 있습니다.

인사문제까지 모두 들어있는 그런 촉한의 청사진입니다.

그냥 '나 가요~"로 간단하게 출사표를 올렸다면 당시 조정은

개떼처럼 들고 일어나 반대했을 겁니다.


 

어차피 얼어 죽으나 굶어 죽으나 촉한은 국력이 세 나라 중 제일 떨어지기에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생각에 북벌을 감행하기로 했을까요?

그 결과 북벌을 하는 동안은 위나라에서 감히 촉한을 넘보지 못했으니까요.

 

촉한의 근거지인 이곳은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나 마찬가지입니다.

일부당관 만부막개라는 말이나 이백의 촉도난처럼 이곳은 들어오려면 험한 곳이기에

그야말로 중원과는 천연의 담을 쌓고 살 수 있는 곳이지요.

국력이 몇 배나 되는 동오나 위는 촉을 감히 넘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촉한이 왜?

사라지게 되었을까요?

바로 이런 곳에서 자꾸 바깥으로 나갔기 때문은 아닐까요?

유비가 군사를 이끌고 관우의 원수를 갚겠다고 동오를 치기 위해 삼협으로 나갔다

이릉전투에서 무참히 패하며 유비는 화병까지 얻어 익주로 돌아오지 못하고

백제성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죽은 후 그의 시신은 익주로 돌아와 지금 우리가 구경하는 무후사의

혜릉이라는 곳에 묻혔습니다.

이때 촉한의 국력소모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인적 물적 손실 때문에 나라가 휘청거렸을 겁니다.

얼마나 많은 병력이 출전했으며 얼마나 많은 군비가 사용됐을까요?

이게 나라 거덜 내는 데는 최고로 효과 있는 방법입니다.

불바다 만들려다가 오히려 불바다에 빠진다는 사실...

알랑가 몰라~

 

 

또 한 사람...

천하 삼분지계의 기획을 하고 실천에 옮긴 그 시대 마지막 남은 로맨티시스트 공명...

띨띨한 유선을 보면 "승상 아찌~ 우리 그냥 살면 안 돼?"라는 말만 하기에 이제

유비와의 약속은 물 건너 가게 생겼기에 출사표라는 것은 도박 같은 일이라

생각하지만, 북벌을 감행한다는 일은 그런 유선에 대한 최후통첩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선제라는 단어를 수십 번이나 써가며 반대세력을 입 막고 유선에는

쥐잡듯 몰아붙였을 겁니다.

그런 공명도 이 천혜의 요새를 떠나 명월협을 지나고 검문관을 넘어 올라갔지만,

오장원에서 가을바람 맞으며 죽어갔습니다.

그가 세상에 나올 때 천하를 도모할 사람을 돕기위해 나오지 않겠다고 했답니다.

자기가 그런 사람을 선택해 직접 천하를 도모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지니고 나왔을 겁니다.

그의 그런 정신은 바로 출사표에 고스란히 살아있다고 봐도 되겠지요?

 

 

왜?

왜?

여기를 벗어나 떠나기만 하면 죽은 겁니까?

서천은 지키기에는 아주 좋은 곳이지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되는 일이 없습니다.

 

업소고광(業紹高光)이란 편액이 보입니다.

한나라의 고조 유방과 광무제 유수가 제업(帝業)을 크게 일으켰다는 뜻으로

그 뒤에 유비가 이어받았다는 의미일 것 같습니다.

그러면 지켜야지 왜 밖으로 나가 명을 재촉합니까?

 

 

잠시 여기까지의 모습을 지도로 살펴보고 갑니다.

위의 지도 오른쪽 아래 대문으로 들어가 좌우로 살피며 북으로 올라갑니다.

명비와 당비가 좌우에 있습니다.

그냥 흘낏 눈으로 보고 안으로 계속 들어가면 이문이 보이고 이문 안쪽 양쪽으로

전, 후출사표가 벽에 있고 그 앞쪽으로 유비의 조상을 모신 유비전이 보이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양쪽으로 촉한의 문신과 무신의 조상을 빼곡히 모셔두었습니다.

 

이렇게 죽어서도 유비는 좌청룡 우백호를 거느리고 싶었나 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유비전 뒤에 있습니다.

살아서도 그랬고 죽어서도 공명은 언제나 유비 뒤를 지키며 리모트 콘트롤로

유비를 조정하나 봅니다.

아~ 유비는 결국, 공명의 품에서는 한 시도 떠나 살 수 없는 처지였나 봅니다.

죽어서까지 이렇게 지근거리에서 지켜보고 있으니 말입니다.

수어지교...

어찌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있단 말입니까?

 

맞습니다.

물고기는 물을 떠나 살 수 없는데 유비는 자기 입으로 공명과 자신을 수어지교라고 

말했음에도 공명의 충고도 무시한 체 관우의 원수를 갚겠다고 무리하게 군사를 이끌고

동오로 들어가 새파란 육손에게 화공을 당해 이릉전투에서 전멸하다시피 했으니

물을 떠난 물고기는 잘 달궈진 푸라이팬 위에 냉큼 올라가 불고기가 되었지요.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동행이 있어 여행에 가장 힘든 점은 서로의 생각과 취향이 달라 하나로 결정하는

문제일 것이고 다른 사람뿐 아니라 부부가 함께하는 여행에서도 서로가 좋아하고

보고 싶은 게 다를 수 있습니다.

이게 여행 중에 가장 큰 고민이며 갈등의 원인이 되지요.

우리 부부인들 왜 그런 갈등이 왜 없겠어요.

더군다나 우리 부부의 여행은 며칠로 짧게 끝나는 것도 아닌걸요.

 

그러나 고맙게도 울 마눌님은 모든 일정을 佳人이 정한 대로 움직입니다.

물론 중간에 상의하며 일정변경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먹고 자는 문제는 둘이서 상의하지만, 거의 울 마눌님이 결정합니다.

 

서로가 주체적으로 자기가 맡은 일에 함께하는 사람이 무조건 따른다면 여행 중에

생길 수 있는 분쟁을 어느 정도는 줄일 수 있습니다.

이런 갈등이 왜 여행 중에만 생긴다 하시겠어요?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길에서도 생기는 문제가 아니겠어요?

'삼국지 기행 > 삼국지 기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의묘에서 만나 삼 형제.  (0) 2013.11.01
촉한의 모든 것.. 무후사.  (0) 2013.10.31
만두같은 남만정벌 이야기  (0) 2013.10.28
장송의 선택  (0) 2013.10.26
꿈과 희망의 땅, 익주...  (0) 2013.1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