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을 떠나 후허하오터로 갑니다.

2012. 1. 31. 08:00중국 여행기/베이징(北京)

원래 오늘의 계획은 이화원을 보고 바로 옆에 있는 위안밍위안(圓明園 : 원명원)을

볼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이화원에서 너무 오래 돌아다녔나 봅니다.

시간 가는지 모르고 한 구경이 4시를 넘겨 버스 정류장에 나오니 4시 30분경입니다.

그래서 원명원은 후일을 기약하며 숙소로 향합니다.

 

오늘은 밤에 숙소에서 배낭을 찾아 내몽골 후허하오터를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버스를 타고 출발하며 조금 지나면 바로 원명원 입구가 보입니다.

헐~ 그냥 시내버스를 타고 대문만 차창관광을 하고 맙니다.

 

원명원을 그들은 세상 모든 정원 중 으뜸이라는 의미인 園中之園이라고 한다는군요.

그 넓이가 천안문 광장의 8배나 되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황실 전용 정원이랍니다.

황실 전용 정원이라 하면 극소수의 사람을 위한 곳이라는 말이 아닌가요?

그렇다면 이 넓고 아름다운 곳을 몇 사람이 즐기며 돌아다닐 때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아무리 좋은 경치도 매일 보면 시큰둥하지 않을까요? 

 

원래 원명원은 1709년 강희제가 차기 황제 감으로 점찍었던 넷째 아들

옹정제 윤진에게 하사한 여름 별장이었다네요.

옹정제는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가 선물한 이곳을 대대적으로 보수하여 황실 정원으로

꾸몄다고 하는데 아들을 위해 이런 정원을 선물할 정도의 부모라면 정말 대단한 부모입니다.

지금 생각하니 별 게 아니군요?

뭐 나라까지 상속했으니...

정원 정도는 껌값이 아니겠어요?

 

아들아~

佳人의 아들아~

정말 미안하구나.

아비는 너를 위해 아무것도 선물할 게 없구나.

이런 무능한 아비를 탓하지 말고 이런 집안에 태어난 것을 원망하려무나.

오늘 이곳을 들어가지도 못하고 시내버스 안에서 대문 사진이나 찍어

네게 보여줄 터이니 그것으로 만족하려무나.

 

그러나 그 후 청나라 황제 중 가장 예능감이 풍부하고 풍류를 즐겼다고 소문이 난

건륭제 때 지금의 규모로 확대하여 만들었다 하네요.

건륭제는 원명원만 아니라 그 주변의 장춘원과 만춘원까지 추가하여 규모를 세 배나 넓이고

서양의 정원 전문가까지 데려와 유럽풍의 정원을 만들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합니다. 

바로 지금의 서양루가 그때 만든 정원이라네요.

 

이런 멋진 정원이 서양에까지 소문이 나는 바람에 오히려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이곳을 와보고

자기네 나라에 중국풍의 정원을 꾸몄다 하니 세상은 요지경입니다.

원래,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게 아닌가요?

프랑스의 대문호라고 소문이 난 빅토르 위고라는 사람은 프랑스 성당의 보물을 모두 모아도

원명원의 한구석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는 정신 나간 소리를 하기도 했다고 하네요.

세상의 어떤 것도 그 나름의 가치를 지니고 있지 그게 비교대상입니까?

빅토르 위고의 판단력이 겨우 그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단 말입니까?

 

세상에 가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비교한다는 것은 순위를 매기겠다는 말이지만, 서로 다른 가치를 지닌 곳에 있는 것을

어찌 하나의 기준으로 결정한단 말입니까? 

좌우지간 이런 이유로 서양에서는 동양의 정자가 널리 유행하는

계기가 되었다니 세상은 요지경 속입니다.

 

세상에 언제나 늘 잘 나가는 것만 아니지요.

아편전쟁은 중국이라는 나라가 당시에 얼마나 병든 용이었나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워낙 거대한 용이었기에 한번 병이 나면 치료하기 더 어렵습니다.

그놈의 병든 용은 창칼을 들 필요도 없고 이쑤시개 하나만 들고 찔러도

제풀에 쓰러질 정도였잖아요.

수술로 환부를 도려내야 하지만, 그 수술 부위가 머리라고 하면 어쩌지요?

이곳 원명원도 1860년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에 의해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하고 맙니다.

그 잿더미가 되는 과정 또한 재미더군요.

 

그때가 바로 홍콩 해안에서 벌어진 애로우호 사건은 제2 아편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했던가요?

청나라는 자기 처지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체면과 격식에 얽매어 상황을 오판하게 되고

그해 4월 광동에서 드디어 전쟁을 선포하게 되었다네요.

 

겨우 16.000여 명의 영국 프랑스 연합군은 6개월 만에 베이징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 정도에 이르면 항복을 해야 하지만, 청나라 정부는 또 오판하고 연합군에 만약

철수하지 않으면 40여 명의 연합군 포로를 죽이겠다고 겁박을 하게 됩니다.

지피지기 하면 지지 않는다 하지 않았나요?

 

10월 6일 베이징에서 다시 전투가 시작되고 청나라 군대는 개전이 되자마자

북으로 도망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게 하필이면 청군의 도주로가 원명원 앞을 지나게 되고 이를 추격한 연합군은

원명원의 보물을 보게 되었답니다.

이게 바로 원명원의 비극이 시작하게 된 이유입니다.

원명원의 눈물은 알고 보면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지요.

 

다른 곳으로 도망을 갔다면 아마도 원명원은 무사히 그대로 남아 있었을지 모릅니다.

연합군은 원명원을 그대로 두지 않고 서양 개떼처럼 달려들어 보물을 약탈하고

그다음 청군을 따라 추격하면 좋았을 텐데...

이곳에 불마저 질러버립니다.

 

그때가 1860년 10월 18일로 이곳의 불길이 자금성에서도 환히 보였다 하니 도주를 하더라도

길을 제대로 골라 도망해야지 이런 국보급 건물을 지나면 안 됩니다.

그 후 서태후가 많은 돈을 들여 복원사업을 벌였지만...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당시 유럽 연합군의 군사가 겨우 16.000명으로 중국이 자랑하는

인해전술로 비유하면 깜도 되지 않는데 어찌 그리도 허망하게 후퇴만 했을까요? 

당시 청나라군 사령관에 물어보면 틀림없이 작전상 후퇴라고 할 겁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그런 일이 가끔 일어나더군요.

남미의 잉카제국이 스페인군에게 허무하게 패망하며 잉카의 추장인 투팍 아마루가

포로로 잡힌 일도 그런 일 중의 하나일 겁니다.

당시 잉카의 군사는 80.000여 명이었고 스페인군은 200명도 채 되지 않은 군사였습니다.

투팍 아마루는 결국, 꾸스꼬 광장에서 이슬로 사라지며 콘도르가 되어

안데스 산맥을 날아다니고 있답니다. 

 

세상은 이렇게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가 봅니다.

그래서 이해할 수 없으면 그건 불가사의라고 하던가요?

그런 것은 묻고 따지지 말라고요?

佳人은 알 필요도 없으니 가던 길이나 그냥 가라고요?

그러죠.

 

일단 대책란에 있는 숙소로 돌아옵니다.

아침에 나가며 미리 체크 아웃을 하고 배낭을 카운터에 맡겨놓았기 때문입니다.

잠시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다가 배낭을 찾아 매고 전문에 있는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베이징 서역으로 향합니다.

 

우리가 타고 갈 열차의 출발시각이 22시 15분이기에 조금 여유 있게 출발해 서역에 도착하니

21시가 거의 다 되었습니다

기절할 만큼 밤새 딱딱한 의자인 잉쭤에 앉아가야 하기에

미리 세면을 하고 대합실에서 기다립니다.

기차 대합실은 무척 많은 사람으로 혼잡합니다.

 

그런데 수십 명의 한국 단체 관광객이 들어옵니다.

오늘 베이징에 도착한 내몽골로 가는 단체여행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여행사에서 미리 침대칸을 모두 샀기에 침대에 누워간다 합니다.

이런 단체여행객들을 위해 여행사에서 미리 싹쓸이 예매를 했기 때문에 우리 같은

자유여행자는 북경에 도착해 침대칸을 사기가 어려운가 봅니다.

 

드디어 개찰하고 우리는 열차를 타기 위해 플랫폼으로 나아갑니다.

그때 열차 앞에 서 있는 나이가 제법 많은 열차승무원에게 우리 표를 보여주며

워푸로 바꿀 수 없느냐고 물어봅니다.

역시 고개를 가로 졌습니다.

열차에 오르려니까 이미 열차 내부는 좌석과 입석 승객으로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혼잡하여 통로를 빽빼히 매웠기에 움직이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간신히 서 있는 사람을 헤치고 우리 자리에 갔더니만, 이미 다른 사람이 앉아 있었고

더군다나 우리 부부의 좌석은 같은 옆자리가 아니고 앞뒤 자리로 떨어져 있네요.

중국에서 열차를 몇 번 탔지만, 이런 경험이 무척 많습니다.

 

우리 좌석표를 보여주고 자리를 찾아 앉은 후 옆자리 손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우리 부부는 함께 앉아가게 되었네요.

입석 승객 중 일부 사람은 낚시할 때 볼 수 있는 접는 의자를 갖고 탔네요.

그러니 그 사람들은 입석을 준비한 베테랑이라는 말이네요.

그 후에도 이런 사람을 종종 보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교통비를 절약하려고 일부러 의자를 준비하고 입석표를 사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윽고 열차는 출발하고 한 시간 정도가 가까워 오자 벌써 몸이 뒤틀리기 시작합니다.

우리 부부는 앉아가는데 말입니다.

열차 내에는 움직일 수조차 없을 정도로 서서 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는 힘이 든다 생각했지만, 서서 가는 사람이 볼 때 우리 부부는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열차승무원이 혼잡한 열차 안을 헤치고 우리 부부에게 다가와 뭐라고 말을 합니다.

우리 부부는 영문을 몰라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데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우리 부부에게

승무원을 따라가라는 알려주네요.

그러며 웃으면서 박수까지 쳐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부부가 일어나자마자 옆에 있던 사람이 우리 부부가 앉았던 자리를 얼른 차지하

고 우리에게 미소로 인사까지 합니다.

사람을 헤치고 뒷칸으로 승무원을 따라갔더니 뭐라고 하는데 너무 혼잡스러워 못 알아듣겠어요.

죄송합니다.

사실 조용한 곳에서 말을 했다고 한들 중국말도 모르는 우리 부부가 알아듣었겠어요?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오며 몸으로 감지하는 능력이 있지요.

그게 직감이라고 머리 굴리는 일이잖아요. 그쵸? 

가만히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우리에게 침대칸 표를 끊어주겠다는 말이고

우리 표를 보여달라는 말입니다.

그럼 아까 열차를 타기 위해 우리 부부가 나이 많은 열차 승무원에게 침대칸이라고 워푸라고

한 말을 알아듣고 우리 좌석까지 이미 알고 있었단 말입니까?

 

아까 우리가 한 말은 "워푸?"라고 단 한마디만 했으며 우리 표를 보여준 것 외에는 없는데

우리 의사를 정확히 이해했다는 말이 아니겠어요?

우리 표를 슬쩍 보았는데 몇 호차 어디에 앉아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더란 말입니까?

그런데 추가 요금이 엄청 비쌉니다. 

 

원래 끊었던 좌석표는 76원인데 추가되는 침대차는 136원으로

두 사람이 272원이나 추가 요금을 냈습니다.

그러니 푹신한 침대칸이 212원/1인이라는 말입니다.

루안워보다 잉워가 저렴하겠지만, 지금은 다른 선택이 없습니다.

이것만이라도 감사해야지요.

더군다나 아까 우리 부부가 일어날 때 우리 부부가 앉았던 자리를 얼른 앉은

그 사람의 미소 띤 행복한 얼굴이 순간 떠오르며 그냥 루안워로 결정합니다.

 

바로 돈을 치르고 침대칸이 있는 앞으로 가라는데 다시 왔던 사람 속을 헤치고

앞칸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배낭을 메고 들고 밀치고 헤치면서 다시 우리가 앉았던 자리를 지나는데 아까 우리 자리에

앉은 사람이 우리에게 행복한 미소를 보이며 박수까지 보내줍니다.

우리가 앉았던 자리는 17호 차였고 침대칸은 15호 차였네요.

 

두 칸을 그렇게 사람의 숲을 헤치고 나아가니 마침내 침대칸 앞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좌석 칸에서 침대칸으로 건너가는 열차는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게

문이 잠겨 있어 나아갈 수 없습니다.

문을 두드려도 달리는 열차의 소음으로 건너편 승무원에게 소리 전달이 불가능합니다.

젠장, 돈만 더 내고 이렇게 혼잡한 좌석 칸에 서서 가야 합니까?

 

그때 옆에 서 있던 젊은이가 문을 냅다 걷어찹니다.

그렇게 여러 번 걷어차니 건너편 침대칸의 문이 열리고 승무원이 얼굴을 내밉니다.

그런데 달리는 열차에서 소리를 지른다고 닫힌 문에서 건너편으로 이야기가 전달되겠어요?

 

더군다나 우리 부부는 중국말을 몰라 우리의 의사표시도 할 수 없는 처지잖아요.

그때 젊은이가 우리 표를 달라고 하더니 우리 표를 유리창에 붙여서 보여줍니다.

그제야 침대칸 승무원이 다가와 유리창에다 붙여놓은 표를 확인하고 문을 열어줍니다.

 

이렇게 우리 부부는 무사히 침대칸으로 건너와 우리 침대를 안내받아

편안한 잠자리에 들게 되었습니다.

입석으로 가득 찬 잉쭤칸에서 푹신한 침대가 있는 4인승 침대칸으로 넘어오니

마치 지옥에서 극락으로 넘어온 느낌입니다.

사람이란 같은 열차를 타고 가도 이렇게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게 신기하네요.

처음부터 루안워를 탔다면 느낄 수 없는 행복감입니다.

 

혹시 우리 부부처럼 침대차를 타지 못하고 끔찍하고 졸도할 정도로 야간열차의 90도 직각

잉쭤를 타시게 되면 열차 승무원에게 "워푸?"라고 바꾸는 시늉을 하며 표를 보여주시면

침대표를 구해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절대로 책임질 수 없습니다.

드디어 아침에 후허하오터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황당한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사람이란 정말 간사한 존재입니다.

같은 열차를 타고 가면서도 불행하고 힘든다는 생각을 하는 반면,

또 행복과 럭셔리함까지 느낄 수 있다니...

나이 든 승무원의 도움으로 딱딱한 90도 의자에 앉아서 밤을 새워 갈 수밖에 없었는데

그냥 지나가는 말로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아 그냥 워프라는 말 한마디와

바꾸고 싶다는 손짓만 했는데...

그랬기에 더 행복함을 느꼈나 봅니다.

여러분은 이런 행복을 느껴 보셨수?

못 느껴 보셨으면 말을 하지 마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