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소수서원(榮州 紹修書院)

2022. 7. 4. 04:00한국의 서원과 향교

소수서원은 사적 제55호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재(2019년)된 우리의 문화유산이지요.

소수서원(紹修書院)은 우리나라 최초의 임금이 현판을 써서 내려주는 사액(賜額) 서원으로

주세붕(周世鵬)이 1543년 처음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창건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주차장에서 입구로 들어서며 눈앞에 수령이 수백년에서 천 년이나 되는 멋진 붉은 소나무 숲이 나타납니다.

위의 사진처럼 키가 훤칠하기에 낙랑장송이라고 부른다는데 재미있는 것은 소나무가 서원에 가까운 것일수록

아래 사진처럼 서원 방향으로 숙이고 있어 마치 서원을 공경하는 인상을 줍니다.

 

소나무는 추운 겨울도 거뜬히 이겨내며 늘 푸르기에 그 모습이 선비의 기개와 닮았다고 하여

학자 나무라는 의미로 학자수(學者樹)라고 부른답니다.

따라서 이 소나무 숲은 소수서원과 아주 잘 어울리기에 소수서원의 경관 중 중요한 요소로 보입니다.

 

얼마 전에 퇴계가 설립한 도산서원을 다녀온 적이 있는데 이곳과 비교하면 서원 모습만 보면

도산서원이 훨씬 아름답지만, 주변 환경을 보면 이곳 소수서원이 더 아름답네요.

이곳은 자연과 어울린 그런 모습인데 도산서원은 서원의 규모나 짜임새가 뛰어난 곳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위의 사진에 보이는 것은 솔밭 사이에 있는 숙수사지 당간지주(宿水寺址幢竿支柱, 보물 제59호)입니다.

당간지주가 있었다는 말은 이곳이 신라시대의 숙수사라는 절터였던 모양입니다.

당간지주란 절에서 행사를 할 때 불화를 걸기 위해 세운 돌기둥이지요.

 

죽계천이 흐르는 개울 건너에 최초 서원 이름인 백운동과 경(敬)이라는 글자를 새긴 경자 바위가 보입니다.

두 글자는 주세붕이 직접 바위에 새겼다고 하는데 주세붕이 편찬한 백운동 서원에 관한 '죽계지'에 "경(敬)은

구차함의 반대됨이니 잠깐이라도 구차하면 이는 곧 불경(不敬)이다. 이 각석이 마멸되지 않아 천 년 후에

이것을 일컬어 경석(敬石)이라고 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라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죽계천이 동쪽으로 감싸고 흐르는 이곳 소수서원은 주변의 소나무 숲과 산과 천이

아주 잘 어우러진 모습으로 아름답습니다.

이런 곳에서 공부한다면 저절도 성취도가 높아지지 않을끼요?

 

죽계천 건너편에는 취한대(翠寒臺)라고 하는 멋들어진 정자가 있습니다.

취한대는 "연화산의 푸른 기운과 죽계의 맑고 시원한 물빛에 취해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뜻에서

 송취한계(松翠寒溪)에서 비취 취(翠)와 차가울 한(寒)에서 따서 지은 것으로 퇴계 선생이 지었다네요.

취한대는 서원과 죽계천을 사이에 두고 있어 서로 바라다보면 그 멋짐이 남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소수서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정자 하나가 보입니다.

경렴정(景濂亭)이는 정자로 주세붕이 직접 세운 정자라고 하네요.

아래로는 죽계가 흐르기에 정자가 한층 더 아름답습니다.

 

이곳에서는 시연(詩宴)을 베풀고 호연지기를 가꾸던 곳이라네요.

이곳은 선비가 되기위해 멋진 시도 짓고 풍류를 즐길 수 있는 그런 곳인 듯합니다.

그 옆에는 수령이 500년도 넘은 은행나무가 보입니다.

 

출입문 바로 왼쪽에 위의 사진에 보이는 성생단(省牲壇)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성생단은 제향을 올릴 때 제물을 검사하는 장소라고 합니다.

제향 전날 이곳에 제물을 올려두고 흠집 여부를 살펴보는 곳이라네요.

 

이제 서원으로 들어가는 정문인 지도문(志道門)을 통과해 공부를 했던 강학 공간으로 들어섭니다.

소수서원은 서원 외부에 있는 경렴정이나, 취한대 그리고 탁청지처럼 유생들의 교류와 유식을 위한 영역과

서원 안에 있는 공부를 했던 강학 영역, 제를 올렸던 제향 영역 셋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강학(講學) 영역은 강학당, 일신재(日新齋), 직방재(直方齋), 지락재(至樂齋), 학구재(學求齋)

그리고 장서각(藏書閣)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강학당이란 가르치고 배운다는 의미로 주로 이곳에서 유생들의 학문이 이루어졌던 곳이지요.

 

향교에서는 명륜당이라고 부르는 강학당은 이곳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건물로 주세붕이 직접 만든 건물이라고 합니다.

앞면 3칸 옆면 4칸 규모로 앞부분 3칸은 대청마루고 뒤로 1칸은 온돌방으로 꾸몄는데 이런 모양을

전청후실이라고 한다는데 대청은 유생이 온돌방은 교수가 거처했던 공간이라고 합니다.

 

동쪽을 향해 세워진 강학당(보물 제1403호)은 내부 북쪽에 보이는 소수서원이라는 편액은 명종의 친필이라고 하는데

원본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앞쪽에 백운동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는데 이는 소수서원이라는 사액을 받기 이전의 이름이지요.

 

조선 명종이 내릴 소수서원의 현판입니다.

이곳에서는 4천여 명이 넘는 인재가 나온 곳이라고 합니다.

 

이제 강학당 뒤로 갑니다.

앞면 6간 옆면 1칸 반 정도의 건물이 있는데 일신재(日新齋)와 직방재(直方齋)라는 현판이 걸린 곳이 있네요.

가운데는 2칸 정도의 대청이 보입니다.

 

이 건물의 용도는 교수나 임원 그리고 원생이 생활하던 숙소였다고 합니다.

일신재는 원래 직방재 옆에 딸린 작은 서재였으나 개축하며 규모가 커졌다고 하네요.

일신재의 의미는 대학에 나오는 나날이 새로워지라는 일일신 우일신(日日新又日新)에서 따온 말이고

직방재는 주역에서 나온 말로 깨어있음으로 마음을 곧게 하고 바른 도리로써 행동을 가지런하게 한다는

경이직내 의이방외(敬以直内 義以方外)에서 나온 말이라고 하네요.

 

소수서원은 최초로 국학의 제도를 본떠 선현을 제사 지내고 유생들을 교육한 주세붕은 서원에 자주 와

유생과 더불어 토론을 벌이는 등 정성을 기울였고, 그 결과 서원의 유생들이 4~5년 만에 과거에 급제하여

사람들이 '입원자편급제'(入院者便及第)라고 부를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 말은 사학 중에서도 명문사학이라는 말이 아닌가요?

 

일신재(日新齋)와 직방재(直方齋)의 뒷모습입니다.

굴뚝이 이채롭지 않나요?

이렇게 우리나라에서는 향교나 서원의 경우 굴뚝을 높이지 않고 사진처럼 낮게 만들었다고 하네요.

 

이번에 보는 건물은 장서각(藏書閣)입니다.

이곳에는 책이나 목판을 보관했던 장소로 지금의 도서관 같은 역할을 했던 곳이지요.

임금이 직접 하사하신 어제 내사본(御製內腸本)을 비롯해 3천 권이 넘는 장서를 보관했던 곳이라고 합니다.

 

장서각 앞으로 정료대라는 돌로 만든 기둥이 있는데 이 돌기둥의 용도는 밤에 서원 안에서 행사가 있을 때

제일 위의 둥근 부분에 관솔 등을 올려 불을 밝히는 용도라고 합니다.

 

이번에 보는 건물은 독서를 통해 학문의 즐거움을 안다는 지락재(至樂齋)와 성현의 길을 따라

학문을 추구한다는 의미의 학구재(學求齋)라는 현판이 걸린 건물입니다.

용도는 유생들이 기거했던 곳으로 먼저 보았던 일신재(日新齋)와 직방재(直方齋)와 같은 용도이나

건물이 두 개로 서로 떨어져 있습니다.

 

이번에는 입구에서 볼 때 강학당 왼쪽에 보이는 제향 공간을 구경합니다.

건물 앞으로 보이는 돌은 아마도 이전에 이곳에 있었다는 신라시대의 절인 숙수사 탑의 기초가 아니었을까요?

원래 정당후묘라고 하여 강학 공간 뒤로 사당을 두는데 여기에는 바로 옆인 서쪽에 두었습니다.

제일 먼저 문성공묘(文成公廟)로 이는 주세붕이 고려시대의 학자 안향을 기리기 위한 공간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당은 사(祠)로 사용하는데 여기는 묘(廟)를 사용했는데 이는 주세붕이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도입한

안향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격을 높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중에는 주세붕도 이곳에 위폐를 모셨다고 하네요.

 

나머지 이야기는 다음 편에 이어가겠습니다.

이곳 소수서원이 있는 곳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