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의 자취, 도산서원(陶山書院)

2022. 4. 29. 04:00한국의 서원과 향교

도산서당과 농운정사를 구경하고 이제 계단을 올라 위로 올라갑니다.

진도문 앞에 서서 잠시 뒤를 한번 돌아보고 갑시다.

앞을 낙동강이 흐르니 이만한 명당자리도 없지 싶습니다.

도산서원은 언덕에 지었기에 이렇게 멋진 경치를 볼 수 있습니다.

 

가운데 진도문이 보이고 동, 서 좌우로 광명실이라고 쓴 전각이 보입니다.

광명실은 두 개의 건물로 습기를 예방하기 위해 기둥을 세운 누각 형태의 건물로 용도는

책을 보관하거나 열람하기 위한 서고로 사용했답니다.

 

그 의미는 '수많은 책들이 밝고 환하게 비춘다.'는 의미로 퇴계가 직접 현판을 썼다고 합니다.

퇴계의 친필을 이렇게 직접 볼 수 있다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닐까요?

 

뒤로 돌아가 바라보면 이런 모습입니다.

습해로부터 책을 보호하기 위해 기둥 8개를 박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네요.

공중누각처럼 건물을 지었네요.

 

진도문을 들어서 이제 전교당(典敎堂, 보물 제210호)이라고 부르는 곳으로 들어갑니다.

전교당을 가운데 두고 동, 서쪽 양쪽으로 같은 크기의 건물이 모입니다.

이를 동재와 서재로 부른다는데...

 

이곳은 바로 도산서원의 유생들이 거처하며 공부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라고 합니다.

동쪽 건물은 박약재(博約齋)라고 부르며 주로 상급생들이 거처하던 곳이랍니다.

박약은 박문약례(博文約禮)의 준말로 '학문은 넓히고 예절은 지킨다'는 뜻이라지요?

 

서재는 홍의재(弘毅齋)라고 불렀으며 하급생이 머물던 기숙사인 셈이겠네요.

홍의의 의미는 '마음은 넓고 뜻은 굳세게'라는 말이라고 하니 공부의 길이 아직은 학문이 미천한

하급생에게 더욱 굳세게 정진하라는 의미지 싶습니다.

혹시 선배가 갈구더라도 굳세게 버텨내라는 의미였을까요?

 

전교당으로 들어가는 진도문 위로 위의 사진에 보이는 북이 하나 걸려있습니다.

무슨 용도일까요?

학교종이 땡땡땡하듯이 수업 시작과 끝을 알리는 북일까요?

 

이 북의 용도는 유생들 중 이곳의 교육방침을 따르지 않거나 정진하지 않거나 사고를 친

유생을 내보내기 위해 만든 북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 북이 울리면 오늘 한 명의 유생이 보따리를 싸 고향 앞으로 가야 하겠지요.

일반 카페에 강퇴당해도 속이 아픈데...

북소리가 울리면 당사자는 인생도 종치는 셈이 되겠네요.

 

도산서원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9개 서원 중 유일하게 제향자가 직접 짓고 생활한

곳으로 유생들이 머물며 생활했던 기숙사를 좌우로 두고 가운데 보이는 건물이

보물로 지정된 전교당이지요.

전교당은 도산서원의 중심이 되는 건물이라고 하네요.

 

조선 선조 7년(1574년)에 건립된 이 서원의 강론이 행해진 대강당인 셈입니다.

물론, 퇴계가 계실 때는 이 건물은 없었고 돌아가신 후 4년 후에 지어진 건물이지요.

이 대청마루에 앉아 선생님의 수업을 열심히 들었을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도산서원이라고 쓴 현판입니다.

이는 한석봉의 글씨로 선조가 내린 사액 현판인 셈입니다.

이번에는 조선 제 1의 명필이라는 한석봉의 글자도 봅니다.

 

전교당은 대청이 있고 서쪽에  두 칸짜리 방은 원장이 거처하는 한존재(閑存齋)라는 온돌방이 있으며

한존재는 여유가 있는 집이라는 뜻이겠지요.

온돌방인 한존재의 문을 들어 올리면 대청까지 트인 공간이 생겨 더 많은 유생에게 강론을 펼쳤겠네요.

 

건물의 가운데와 우측으로 이어진 6칸 마루방은 이곳에서 유생들에게

강론이 이루어졌던 교육공간이네요.

이곳의 벽면 상단에는 원규(院規), 잠언(箴言), 사제문(賜祭文) 등이 걸려 있더군요.

 

전교당을 바라다보면 왼쪽 계단 옆으로 위의 사진에 보듯이 돌기둥 하나가 서 있습니다.

돌기둥 위로는 반원 모양의 돌그릇이 보이는데 이것은 밤에 이곳에서 행사가 있을 때

불을 밝히는 정료대(庭燎臺)라고 합니다.

 

전교당의 옆, 동재의 뒤로는 장판각(藏板閣)이라는 건물이 있습니다.

이 건물의 용도는 서원에서 찍어낸 책의 목판본을 보관하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렇기에 여기도 습기를 예방하기 위해 바닥으로부터 살짝 공간을 두어 건물을 올렸습니다.

 

이곳에는 퇴계문집, 언행록, 글씨 등을 새긴 목판 37종 2790장의 판각이 소장돼 있었지만,

지금 이들 자료는 2003년 모두 보존하고 연구하기 위해 한국국학진흥원으로 옮겨 보관되고 있다네요.

그러므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 안은 현재 텅 비어 있답니다.

 

그 뒤로 도산서원에서 제일 높은 곳에 상덕사(尙德祠)라는 사당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곧게 닫혀있는데 상덕사는 퇴계와 그의 제자인 조목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문이 세 개인 삼문을 통하여만 드나들 수 있답니다.

 

그러나 가운데 문은 혼백이 드나드는 문으로 사람은 그곳으로는 드나들 수 없고

오른쪽 문으로 드나들어야 한답니다.

퇴계 사후 4년이 지난 후 전교당을 세울 때 상덕사도 함께 건축했다고 하네요.

보통 사당은 간결하게 맞배지붕으로 짓는데 이곳은 팔작지붕으로 올린 것이 이채롭습니다.

매년 2월과 8월 중정일에 향사를 받드는데 3일 전부터 준비하여 당일 11시에 지낸다고 합니다.

 

전교당 뒤로는 전사청(典祀廳)이라는 건물이 있습니다.

전사청은 바로 옆에 있는 상덕사에서 향사를 올릴 때 제사음식인 제수를 준비하는 곳입니다.

 

위의 사진인 동쪽 건물은 제수를 보관하던 제수청이고 아래 사진인 서쪽 건물은 술인 제주를

보관하던 주고(酒庫)로 각각 둘로 나누어져 있네요.

출입문 앞으로는 까만 대나무인 오죽이 보이네요.

 

전교당 서쪽 아래로는 고직사(庫直舍)라고 있습니다.

글자 그대로 서원을 지키는 직원들의 살림집이라는 말이네요.

아래 위로 두 곳의 고직사를 두어 상고직사, 하고직사로 나누어 두었네요.

서원을 지키는 일 외에도 식사를 준비했던 사람들이 머물던 곳이라네요.

 

상고직사는 도산서원 영역을 관리했던 사람들이 머물던 곳이고

하고직사는 퇴계가 직접 지었다는 도산서당 영역을 관리했던 사람들이 머물던 장소라고 합니다.

상고직사 위로 전사청이 있고 아래로는 하고직사가 있어 바로 연결되기에

관리하기 용이하게 동선을 꾸몄네요.

 

밖으로 나온 후 오른쪽을 보면 역락서재(亦樂書齋)라는 건물이 따로 외부에 있네요.

역락서재 또한 농운정사와 같은 용도로 도산 서원의 기숙사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1561년 정사성이 퇴계의 제자가 될 때 정사성의 아버지인 정두가 제자들과 함께

협력하여지었다고 합니다.

이 건물 현판의 글씨는 퇴계가 직접 쓴 글이라고 하네요.

아들의 미래를 위한 거대한 투자였나 봅니다.

 

마당에 보이는 왕버들 나무입니다.

세월의 주름이 그대로 보이는 오래된 나무인 듯합니다.

흔히 왕버들은 냇가 물속에서 자라지요?

 

유명한 곳이 주산지의 왕버들 아닙니까?

이 왕버들은 퇴계가 도산서당을 처음 지을 때부터 이곳에 있었던 나무로 안동댐이 건설되며

수몰되는 것을 막기 위해 도산서원 마당을 5m 정도 성토하는 과정에

많은 부분이 땅속에 묻혔다고 하네요.

 

澗柳(간류:산골에 드리운 수양버들)라는 시 한 수 보고 갑니다.

이 한시는 퇴계 선생이 지금 보는 이 왕버들을 보며 지은 시라고 합니다.

 

산골에 드리운 수양버들(澗邊垂柳:간변수류)

깨끗하다 그 풍채와 태도(濯濯風度:탁탁풍도)

도연명, 소강절이 알아주고 좋아했으니(陶邵賞好:도소상호)

나도 아득히 사모하는 마음 일으키네(起我遐慕:기아하모)

 

끝이 없는 봄날의 조화로움(無窮造化春:무궁조화춘)

바로 풍류가 있는 나무로세(自是風流樹:자시풍류수)

도연명과 소강절 천고의 두 늙은이(千載兩節翁:천재양절옹)

길게 읊으며 몇 번이나 흥겨워했던고(長吟幾興寓:장음기흥우)

 

왕버들이 있는 마당에서 저 멀리 강 건너에 보이는 정자는 시사단(試士壇)이라는 비석과 비각

건물로 시사단은 조선시대에 특별히 과거시험을 보았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과 비각이라고 합니다.

시사(試士)란 선비에게 시험을 보인다는 말이지요.

 

1792년 정조 임금은 평소 존경하던 퇴계를 추모하고 지방 선비들의 시사를 높여주기 위해

어명으로 이곳에서 특별 과거시험인 도산별과를 열고 영남지역의 인재를 선발하도록 하였답니다.

예전에 과거시험을 보기 우해 불원 멀리 한양으로 먼 길을 떠났던 일에 비하면 특혜라고 보이며

당시 응시자만 7,228명에 이르렀다는데 11명을 선발했고

그중 문과 급제 두 명을 선발했다고 합니다.

 

그때의 시험을 기념하기 위해 1796년 이곳에 단을 마련하고 비석을 세웠다는데

비문은 당시 영의정이었던 채제공이 지었다네요.

안동댐으로 수몰되기 전에는 도산서원과 마주 보이는 강변의 소나무가 우거진 곳에 비각이

세워졌으나 1975년 안동댐 건설로 원래 있던 자리에서 10m 높이의 돌로 축대를 쌓아 올린 후

옛 비각과 비석을 원형대로 옮겨지었고 합니다.

 

퇴계선생의 사상은 이기이원론적 주리론(理氣二元論的 主理論)이라고 합니다

이(理)로써 기(氣)를 다스려 인간의 선한 마음을 간직하여 바르게 살아가고

모든 사물을 순리로 운영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라네요.

 

이(理)를 인간의 타고난 본성인 사단(四端)으로 보고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의 네 가지 마음(감정)으로서 각각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의 착한 본성인 덕(德)에서 발로 되어 나오는 감정이라고 판단했나 봅니다.

 

기(氣)는 인간 기질의 성질로 칠정(七情)이라고 보고 칠정은 희(喜), 노(怒), 애(哀), 구(懼), 애(愛),

오(惡), 욕(欲)의 일곱 가지 감정인데 사단으로 칠정을 다스리는 것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그러나 칠정인 즐거움, 노여움, 슬픔, 두려움, 사랑, 미워함 그리고 욕심을 버리고 산다면

우리 같은 어리석은 민초는 세상에 무슨 재미로 살아간다는 말입니까?

저는 그냥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그냥 살아갈까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