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유산 소수서원(紹修書院)

2022. 7. 13. 04:00한국의 서원과 향교

우리나라의 서원 중 아홉 곳이 유네스코 지정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답니다.

소수서원은 2019년 7월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라는 명칭으로

다른 8곳의 서원과 더불어 한국의 14번째 세계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되었다고 합니다.

 

저번에 도산서원을 다녀왔고 이번에 소수서원을 돌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세계유산에 선정된 9군데 서원의 리스트입니다. 

우리나라에는 많은 서원이 있지만, 모두 세계유산에 등재되지는 못했나 봅니다.

 

저번에는 유생이 공부를 했던 강학 영역을 먼저 보았고 오늘은 제향 공간을 보려고 합니다.

제향 공간에는 문성공묘외에도 영정각(影幀閣)과 전사청(典祀廳)이 있습니다.

먼저 영정각부터 보겠습니다.

 

영정각에는 위의 사진 속의 인물인 주자학의 창시자인 중국의 주자의 영정이 있습니다.

중국인이지만, 당시로는 우리나라에 끼친 영향이 지대했을 듯합니다.

 

위의 사진 속의 인물은 회헌(晦軒) 안향(安珦 1243~1306년)입니다.

고려시대 충령왕 때 문신으로 원나라를 자주 오가며 주자서를 국내에 들이기 위해 힘썼으며

우리나라 주자학의 시조라고 하네요.

안향 영정은 국보 제111호라고 하네요.

 

위의 인물은 소수서원을 세웠던 주세붕(周世鵬, 1495 ~ 1554)의 영정입니다.

풍기 군수로 있을 때 안향을 존경해 그의 고향인 이곳에 그를 모시는 사당을 짓고 우리나라에서는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을 세웠다고 하지요.

주세붕 초상은 보물 제 717호로 지정된 것이라 합니다.

 

우리가 아는 오성과 한음의 이야기에 나왔던 한음 이덕형의 영정도 보입니다.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은 인품이 넉넉하고 남다른 우국충정과 도량을 지닌 명신으로

외교가였다는 평가를 받았던 분이시죠

많은 인사들이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풍파에 휩쓸리고 비난에 시달렸으나,

이덕형만은 드물게도 입방아에 별로 오르내리지 않았고 분쟁도 일으키지 않는 인물이었지요.

 

왼쪽의 영정속의 인물은 조선 후기 사상계를 이끌었던 미수 허목의 영정이 보입니다.

그는 아호를 스스로 미수(眉叟)라고 지었는데, 이는 '눈썹이 길어 눈을 덮으므로 별호를 미수라 정했다고 합니다.

그 오른쪽에는 청백리의 표상인 오리 이원익(梧里 李元翼)의 영정도 보입니다.

그는 왕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집은 초가집 두서너칸에 불과할 정도로 재산에 욕심이 없었다고 하네요.

 

이번에 보는 전각은 전사청(典祀廳)입니다.

향사기 있을 때 사용하는 제기를 보관하고 제물을 마련했던 곳이라고 하네요.

1칸은 방이고 두 칸은 마루를 두었네요.

 

그밖에 고직사(庫直舍)는 사당 담 밖에 세워져 있네요.

이렇게 담장 밖에 고직사를 둔 이유는 민가 형식의 살림집 형태였고 서원을 관리하던 사람의 살림집이기 때문이겠지요.

서원에서 향사를 올릴 때 필요한 제수품을 준비하고 서원에 기거하는 선생님과 교생들의 숙식 지원 및

서원의 제반 살림을 맡아보는 기능을 수행하던 공간이라고 하네요.

 

유교 관념상 서원 내에서는 사람이 임종할 수 없으므로 사람이 기거하는 고직사는

서원 담장 밖에 위치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고직사는 강학 공간 영역 밖 좌측 또는 우측에 위치하는데 소수서원의 경우는

별도의 담장을 두르고 고직사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 앞에 일영대(日影臺)라는 해시계도 보입니다.

맑은 날 위부분에 막대기를 꽂아 그림자가 아래 주춧돌 위에 걸치는 것을 보며 시각을 예측했다고 하지요.

아래 자연석 주춧돌 위에 문지도리석을 올려둔 것으로 보아 원래 이곳에 있었던

신라시대의 절인 숙수사의 유적이라고도 본다는군요.

 

일신재와 직방재 뒤에 지락재(至樂齋)와 학구재(學求齋)라는 전각이 보입니다.

일신재와 직방재는 원생도 있었지만, 주로 교수나 임원이 머물렀던 곳이고 여기는 유생들만 머물렀던 공간으로

전각이 ㄱ자 모양으로 떨어져 있습니다.

1칸은 온돌방이고 2칸은 마루로 되어있는데 온돌방 방향 외에는 모두 열린 모습이네요.

 

지락재(至樂齋)라는 말은 송나라 구양수의 글 중 지락막여독서(至樂莫如讀書)에서 따온 말로

"지극한 즐거움은 독서만 한 것이 없다."는 의미의 글이라고 하니 전각의 이름도 공부만 하라고 지은 이름이네요.

주로 상급생이 머물렀던 곳으로 높은 곳을 우러러보라는 의미로 앙고재(仰高齎)라고도 불렀답니다.

 

학구재(學求齋)라는 전각의 이름도 성현을 따라 학문을 구한다는 의미로 또 공부만 하라고 합니다.

학구재는 주로 저학년이 머물렀던 곳이라네요.

그래서 동몽재(童蒙齋)라고도 불렀답니다.

가운데 마루가 있고 양쪽으로 온돌방이 있는 모습이 지락재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네요.

 

이제 뒤로 난 문을 나서면 그곳에는 서료관이 보입니다.

사료관은 소수서원을 찾는 모든 분에게 이해를 도기 위해 관련 자료를 전시해둔 공간입니다.

소수서원의 역사와 전통과 주요 배출 인물 등을 전시해 두었기에 이곳은 들러보는 게 좋지 싶습니다.

 

소수서원을 뒤로 나서면 솔밭이 보이고 죽계천이 오른쪽으로 휘감아 흐르네요.

죽계천을 건너가면 선비촌이라고 옛날의 고택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시간이 허락하면 잠시 들러보는 것도 좋지 싶습니다.

 

죽계천과 소수서원 담장 사이에 커다란 연못이 보입니다.

탁청지(濯淸池)라는 못인데 탁청의 의미는 "물에 씻어 스스로 깨끗해진다."라는 의미라고 하네요.

이 연못은 광해군 6년(1614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준이 당시 소수서원의 원장이었던 곽진에게 

직접 연못을 조성하라고 하여 만든 못이라고 합니다.

 

소수서원이 있는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