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 유산, 도산서원(陶山書院)

2022. 4. 25. 04:23한국의 서원과 향교

매화꽃이 흐드러지게 활짝 핀 도산서원 매화원의 모습입니다.

퇴계께서는 평소에 매화를 무척 좋아하셔서 이렇게 매화원을 두었나 봅니다.
자기를 버리고 남을 따르지 못하는 것은 배우는 사람의 큰 병이다.

천하의 의리에 끝이 없는데, 어찌 자기만 옳고 남은 그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不能舍己從人, 學者之大病. 天下之義理無窮, 豈可是己而非人)

 

이 말씀은 퇴계 이황 선생이 하신 말씀이라고 합니다.

요즈음 다시 새겨들어도 충분히 가치 있는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조선시대에 가장 학문적으로 뛰어나신 분 중 한 분이 퇴계 이황 선생이 아닌가요?

 

이제부터 주차장에서 천천히 걸어들어가며 도산서원의 모습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입장료는 위의 사진을 참고해주시요.

주차료는 2천 원을 받습니다.

 

도산서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하마비가 보입니다.

여기부터는 아무리 지체가 높아도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가야 하지요.

우리나라나 중국 그리고 베트남처럼 동양에서는 공자를 모신 공묘 등 위대한 분의 흔적이 있는 곳에

들어갈 때는 말에서 내려 겸손한 마음으로 들어가야 하지요.

그래서 주차장도 밖에 따로 만들었나 봅니다.

 

잠시 걸어들어가다 보니 돌에다가 추로지향이라고 전서체로 쓴 글이 보입니다.

경북 안동은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 불려도 된다고 했나요?

추로지향이란 맹자의 출생지인 추(鄒) 나라와 공자의 고향인 노(魯) 나라에서 따온 말로,

바로 안동이 유학의 고향이란 뜻이겠지요.
이 글은 공자의 77대 종손 공덕성이 1981년 도산서원을 방문한 것을 기념해 세운 것이라고 합니다.

 

이번 여행 중 안동을 지나는 길에 도산서원(陶山書院)을 들렀습니다.

도산서원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이 후학을 기르기 위해 손수 만든 서원이라고 하지요.

서원은 개인이 후학 양성을 위해 세운 곳이고 향교가 공립학교인 셈이라고 생각되네요.

 

서원은 지방의 공립학교인 향교처럼 과거 급제나 관료 양성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고 하지요.

주로 설립자의 생각과 학문과 인격의 완성에 목적을 뒀다고 봐야겠네요.

처음에는 그랬지만, 그게 어디 처음 생각과 같을까요?

나중에는 서원철폐령이 생길 정도로 많은 문제점도 안고 있었다고 보입니다.

우리나라에는 많은 서원이 있지만, 위의 9곳만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고 하지요.

 

그래서 서원이 심신을 수양하기 좋은 곳에 자리 잡은 이유라고 합니다.

그러니 지금으로 판단하면 향교는 공립학교이고 서원은 사립학교인 셈이겠네요.

위의 사진에 보이는 것이 오늘 구경할 도산서원의 배치도입니다.

 

우리나라 지폐 천 원권의 앞면이 현초 이유태 화백이 그리신 퇴계 선생의 표준 영정

(제일 위의 두 번째 사진)이고 뒷면은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라는 1747년의 그림으로

현재 도산서원의 옛 모습을 그린 것이지요.

한국은행의 화폐 도안으로 영정과 후학을 가르치던 서원의 모습이 올라가 있으니...

 

퇴계(退溪)라는 말의 의미는 물러가 있는 골짜기라는 말이니 아마도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이곳 도산서원이 있는 골짜기로 물러나 후학이나 기르고 학문에 정진하고 싶어

했던 생각에서는 아닐까요?

임금이 벼슬길에 올라 정사를 맡기려고 했지만, 70여 차례나 벼슬을 사양했다고 하니...

위의 사진은 도산서원의 예전의 모습으로 지금의 모습과 차이가 없습니다.

 

도산서원의 양쪽 산기슭에는 절벽이 있는데 퇴계가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몸과 마음을

수양하기 위해 산책했던 길이라는데 서쪽 절벽을 천관운영대라고 불렀고 오른쪽은 천연대라고

불렀다하니 이곳 도산서원이 있는 자리는 앞쪽으로는 낙동강이 흘러

그만큼 포근하고 아늑한 지형이라고 생각합니다.

 

1501년에 태어나 34세에 과거에 급제했고 군수나 판서 등 많은 벼슬을 거치며 영의정까지

올랐다 하며 벼슬에는 뜻이 별로 없어 1564년에 지금 이 자리에 도산서당을

직접 세웠고 1570년에 돌아가셨다네요.

 

퇴계 사후 4년이 지난 후인 1574년에 선조 임금께서 한석봉에게 부탁해

위의 사진에 보이는 도산서원(陶山書院)이라는 현판을 쓰게 해 사액(賜額) 했다고 합니다.

선조는 비록 퇴계 선생을 곁에 두지는 못했지만, 그를 무척 아꼈다는 생각이 드네요.

지금 우리는 우리나라 역사상 명필로 이름 난 한석봉의 글씨를 보고 있습니다.

 

퇴계선생은 생전에 매화를 무척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지금도 도산서원 안에는 매화나무가 많고 매화원을 두었네요.

마침 매화가 피는 계절이라 이곳을 찾은 우리에게는 더 의미가 있는 시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도산서원 입구 바로 옆에는 세월의 이끼가 낀 冽井(열정)이라 새겨진 우물이 있습니다.

열정이란 역경에서 "물이 맑고 차가우니 마실 수 있다(井冽寒泉食)"에서 따온 말로

처음부터 도산서당 식수로 사용한 것으로, 아직도 맑은 물이 담겨 있습니다.

 

우물은 마을이 떠나가도 옮길 수 없고 아무리 물을 퍼내도 줄지 않으며 오가는

모든 사람이 마실 수 있다지요.

이와 같이 세상에 널린 지식을 부단한 노력으로 쌓아 올려 화수분같이 언제나 지식이 샘 솟는

우물과 같이 사회에 꼭 필요한 인재가 되라는 뜻이라네요.

 

서원은 일반적으로 경사면에 들어선다고 하지요.

그러니 당연히 전체적으로 앞쪽이 낮고 뒤쪽이 높은 전저후고(前低後高)의 형태를 띠겠네요.

 또 제향 공간은 뒤쪽에, 강학 공간은 앞쪽에 배치되는 전학후조(前學後廟)의 모습을 볼 수 있고요.

 

도산서원도 마찬가지겠지요.

하지만 도산서원은 퇴계가 지은 서당 영역이 맨 앞쪽에 있고,

사후에 세워진 강학과 제향을 위한 건물이 뒤쪽에 배치돼 있습니다.

 

우선 정문을 통해 서원 안으로 들어갑니다.

서원은 계단 형식으로 점점 높아지는 형태로 조성되었네요.

그러나 지금의 모습은 퇴계 선생이 처음 이곳에 서원을 만들 때의 모습은 아니겠지요?

 

오른쪽에는 산에서 솟아나는 몽천이라는 작은 샘이 보입니다.

이 샘의 이름은 퇴계 선생이 직접 지었다는데 역경의 몽괘에서 가져온 말로 몽매한 제자를

바른길로 인도하는 스승의 도리를 뜻하며 한 방울의 샘물도 수많은 어려움 끝에 바다에 이르듯

제자들이 끊임없이 노력해 뜻을 이루라는 의미랍니다.

이 샘물이 도산서원이 이곳에 터를 잡는 이유 중 하나였다네요.

 

이제 제일 오른쪽에 보이는 문이 열려있는 건물로 들어갑니다.

정말 소박하게 만든 사립문이지요?

위의 사진에 보이는 도산서당의 사립문은 유정문(幽貞門)이라고 하며 은둔하면서도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속뜻이 담겨 있답니다.

 

이 사립문과 연결된 위의 사진에 보이는 담장은 이곳 도산서원 안에서는

유일하게 흙담으로 두른 곳이네요.

그러니 도산 서원 안에 또 다른 세상인 도산서당이 있는 셈이네요.

 

오른쪽 마당 한편에 소박하게 생긴 작은 연못 하나가 보입니다.

이 연못의 이름은 정우당(淨友塘)으로 연꽃을 심었다고 하네요.

글자 그대로 보면 "깨끗한 벗이 있는 연못"이라는 의미입니다.

 

연꽃은 더러운 물이나 진흙 속에서도 피어나지만, 더럽혀지지 않고 언제나 깨끗하고

고고한 자태를 보이는 꽃이지요.

퇴계는 절의를 지키는 정결한 군자의 모습으로 성정하는 마음으로 이곳에 연꽃을 심었나 봅니다.

오늘은 연꽃은 피지 않았으니 퇴계가 가장 좋아했다는 매화로 대신합니다.

 

위의 사진 속에 보이는 건물이 1560년에 건축된 보물 제2105호로 지정된 도산서당입니다.

이 건물이 바로 퇴계 선생이 4년에 걸쳐 손수 지은 건물로 여기서 기거하시며 후학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곳 도산서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고 봐야겠네요.

 

다른 건물은 나중에 짓거나 일부는 조선 성리학의 대가로 알려진 퇴계를 후세에 기리는 의미로

많은 유학자가 더 확장한 것이라고 합니다.

도산서원 안에 도산서당이라...

 

처음에는 부엌, 마루 그리고 온돌방으로만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자가 늘어나며 가르칠 공간이 협소해져 부엌과 마루를 확장했고

확장한 마루에 덧 지붕을 달았답니다.

 

퇴계가 머물던 온돌방은 완락재(玩樂齋)라고 이름 지었는데 완락(玩樂)이란 말은

성리학의 창시자 주자의 '명당실기'에 나오는 구절을 축약한 단어로 '완상하여 즐기니

족히 여기서 평생토록 지내도 싫지 않겠다.'라는 뜻으로 이곳 도산서당이

퇴계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엿볼 수 있네요.

 

마루는 암서헌(巖栖軒)이라고 불렀고 이곳에서 자연을 감상하거나 제자들을 가르치는

장소로 사용했다고 하네요.

암서현의 의미는 '바위에 깃들어 작은 효험을 바란다.'라는 말로 이 두 이름 모두가 주자의 글에서

따온 말로 학문의 즐거움과 겸손한 마음을 담았다고 생각한다네요.

 

도산서당을 나서면 매화원이 보입니다.

화려하거나 크지는 않지만 작은 계단식 정원을 꾸며 주로 매화나무를 심었네요.

퇴계는 특히 매화를 좋아했기에 이곳에 매화나무를 심어두었나 봅니다.

 

도산서당 서쪽에 따로 있는 보물 제2106호로 지정된 농운정사(隴雲精舍)입니다.

이 건물은 제자들이 기숙사로 사용하였으며 공부에 열심히 매진하라는 의미로

퇴계가 설계한 건물로 工자 모양으로 지었답니다.

 

건물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으며 공부하던 동편 마루를 시습재(時習齋)라고 불렀는데

논어의 도입부에 나오는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에서 따온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때때로 익히다’라는 의미를 지닌 말과 그 옆의 장소는 그 공부를 익히고 휴식하던

서편 마루를 관란헌(觀瀾軒)이라고 했답니다.

마루 뒤쪽에는 지숙료가 있는데 서당에 공부하러 온 학동이 머물렀던 곳이라고 하네요.

 

오늘 일부만 구경했습니다.

오늘 올리지 못했던 도산서원의 다른 곳은 다음에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