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 돈암 서원(論山 遯巖 書院)

2022. 6. 20. 04:00한국의 서원과 향교

우리나라 서원 중 아홉 군데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보호받고 있다지요.

오늘은 그중 한 곳인 돈암 서원(사적 제383호)을 들렀습니다.

돈암 서원은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아홉 곳 중 건립 연도가 가장 늦은 1634년이라고 합니다.

 

이곳은 세계유산일뿐 아니라 임금이 현판을 내려준 사액 서원(賜額書院)으로도 가치가 있는 곳이지요.

사액 서원이며 세계 유산으로 등재된 곳 중 도산 서원과 소수 서원에 이어 세 번째 들리는 곳입니다.

서원은 조선시대의 공립학교인 향교와는 달리 설립자의 설립이념이 강한 사립학교지요.

 

입구에 홍살문이 보이고 그 오른쪽 옆에 하마비도 보입니다.

홍살문은 경건한 마음으로 드나들라는 의미로 붉은색으로 칠했으며 하마비는

이곳부터는 누구든지 말에서 내려 두 발로만 걸어서 들어가라는 의미니 이런 뜻은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 수 있는 지표나 마찬가지죠.

 

정면에서 바라보면 담장을 두른 내원이 있고 담장 밖으로 제법 큰 누각 하나가 서 있습니다.

이 누각은 산앙루라는 현판이 걸려있네요.

이 누각은 예전부터 있었던 오래된 누각이 아니고 2006년에 건립한 건축물이라고 합니다.

 

담장 안쪽인 내원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외삼문을 통과해 들어갑니다.

외삼문 위에는 입덕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이 문을 통과하면 이제 덕을 쌓을 수 있는 여건은 조성되었겠지요?

내원은 다시 바깥채와 안채로 구분되어 있네요.

 

입덕문을 들어서 왼편을 바라보면 위의 사진에 보이는 대단한 건물이 나타납니다.

이곳은 유생이 모여 공부를 했던 강학당인 응도당이네요.

지금으로 보면 강의실의 역할을 했던 곳이지요.

 

응도당은 유생들이 장수강학하던 곳이랍니다.

장수란 유생들이 몸과 마음을 수양하는 말이고 강학이란 스승과 문답을 통해 공부하는 방법으로

주입식 교육이 아니라 스스로 학문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교육방법이지 싶습니다.

 

돈암서원은 최초로 조선 인조 12년(1634) 이곳에서 1.5km 떨어진 숲말에 세워졌었다고 합니다.

현종 원년(1660)에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으나 지대가 낮아 홍수 때에는 물이 마당까지

넘쳐 들어 왔기에 고종 17년(1880) 현재의 자리인 임리 74번지(서원말)로 옮겨지었다고 합니다.

 

1880년 고종 17년에 숲말이라는 곳에서 이곳으로 이전할 때 응도당 건물은

이곳으로 옯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1971년에서야 지금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하니 다른 건물에 비해 늦게 이전했네요.

 

원래 응도당이 강학의 기능을 수행했던 건물인데 이곳으로 다른 건물이 먼저 옮겨올 때

응도당은 다른 건물보다 규모가 크기에 이전에 엄두가 나지 않았나 봅니다.

 

그래서 응도당이 없던 시기에 강학기능은 양성당에서 이루어졌기에 나중에

이곳으로 응도당을 옮기며 자리가 마땅치 않아 원래 있어야할 위치에서 벗어나

사당과 직각으로 앉혔다고 합니다.

 

응도당은 예를 실천하는 건축 제도의 모델로 제시된 건축양식에 따라 지어졌으며

돈암 서원의 건물 배치와 규모는 김장생의 의례와 주자대전을 고증해

강경 죽림서원의 법도에 따라지었다네요.

앞면 5칸, 옆면 3칸으로 건물이 이루어졌으면 ㅅ자 모양의 맞배지붕이네요.

내부는 모두 마루를 깔았으며 옆면으로는 비바람을 막아주는 풍판을 달았네요.

 

외삼문을 들어서 정면을 바라보면 돈암서원을 건립한 의도와 김장생 부자의 업적을 기리는

돈암 서원 원정비가 보입니다.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썼으면 앞면의 전사체로 된 글씨는

김장생의 증손인 김만기가 썼다고 합니다.

원래 이곳에 있지 않고 숲말에 있던 것을 옮겨왔기 때문에

서원의 건물 배치가 내용과는 다르다고 합니다.

 

그 뒤로 양성당이 보입니다.

양성당은 이곳으로 이전할 때 제일 먼저 옮겨온 건물로

김장생의 서재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원래 강학당의 역할을 했던 응도당을 옮겨오지 못한 시기에 100여 년 가까이

강학당의 역할을 수행했던 건물로 원래 이름은 아한정(雅閑亭)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곳에서 유생과 교수 간의 문답식 교욱이 이루어진 곳이군요.

 

양성당 앞쪽으로는 두 개의 건물이 서로 마주 보고 있습니다.

오른쪽에 동재라는 거경재와 왼쪽에는 서재라는 정의재라는 현판이 걸려있네요.

거경이라는 말은 성리학학의 수양 방법 중 하나로 우러르고 받드는 마음으로 삼가고

조심하는 태도를 가짐을 의미하고 정의란 자세한 의의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유생이 모인 곳이니 경전의 의미를 자세하게 강론해야겠지요.

흔히 동재와 서재로도 구분한다고 하는데 유생들의 기숙사로 사용된 건물이라고 하지요.

둘 중 하나는 상급생 용일 테고 다른 하나는 하급생을 위한 기숙사였을 겁니다.

 

이번에 보는 건물은 장판각입니다.

장판각은 책이나 목판을 보관했던 도서관의 역할을 했던 곳이겠네요.

김장생 부친인 김계휘의 사실을 기록한 황강실기, 김장생의 문집인 사계유고, 김집의 문집인

신독재유고등의 목판이 보관되었던 장소라고 합니다.

그 외에도 경서변의, 가례집람, 상례비요 등이 보관되어 오고 있답니다.

 

다른 서원은 장판각을 제외한 모든 건물은 대부분 땅바닥에 붙여 건물을 짓고

장판각은 습기를 피하기 위해 환기가 잘 되도록 땅바닥에서 공간을 두고 높여 지었는데

돈암서원은 특이하게도 대부분의 건물이 장판각처럼 모두 땅과의 공간을 두고 높여서 지었네요.

목조 건물이기에 이런 방식이 건축물이 오래도록 유지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싶습니다. 

 

바깥채의 안쪽 대문인 내삼문과 그 안쪽으로 숭례사라는 사당이 보입니다.

이곳은 위폐를 모신 곳으로 평소에는 닫아둔다고 하지요.

1년에 두 번 제를 올릴 때만 문을 열어두는데 양쪽 문으로 사람이 드나들고

가운데 문은 위폐를 모신 분의 혼백이 드나들기에 아무나 드나들 수 없는 문이겠네요.

 

사당은 언제나 가징 뒤인 깊숙한 곳에 만들었지요.

유림들이 매년 음력 2월과 8월 중정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지요.

 

사당을 둘러싼 담장이 특히 눈에 띕니다.

담장을 꽃처럼 아름답게 꾸몄기에 꽃 담장인 화장(花墻)이네요.

위의 담장에 보이는 글은 지부해함(地負海涵)이라고 적혀있네요.

"땅이 온갖 것을 등에 짊어지고 바다가 모든 물을 받아주듯 포용하라"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주로 궁궐이나 지체 높은 집에서나 꾸미는 방법인데 이곳에 이렇게 꽃 담장을 둘렀다는 것은

이곳이 얼마나 소중한 공간인지 알려주는 지표가 되겠네요.

다른 곳에는 지식을 넓히고 행동은 예의에 맞게 하라라는 의미인

박문약례(博文約禮)라는 글씨가 보이고

 

좋은 날씨와 상서로운 햇살 그리고 부드러운 바람이라는 의미인 서일화풍이라는 글씨도 보입니다.

서일화풍(瑞日和風)이란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고 웃는 얼굴로 대하라는 의미가 있다지요.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담장에 까지 이런 좋은 글을 새겨두어 유생들의 교육에 힘썼나 봅니다.

 

응도당 뒤로 정회당이라는 건물이 보입니다.

이 건물은 김장생의 부친이셨던 김계휘가 후학을 가르치던 건물이라고 합니다.

정회라는 말의 의미는 유생들이 수행하는 방법 중 하나로 고요하게 몸소 실천하며 수행한다는 뜻으로

사계 김장생의 부친이신 황강공께서 강학했던 건물이랍니다.

 

이 건물은 대둔산 자락의 고운사 터에서 1954년에 여기로 옮겨왔다고 합니다.

정면 4칸, 측면 3칸으로 뒤의 가운데 2칸은 마루방으로 꾸몄네요.

마루방을 중심으로 우물 井자 모양의 마루를 깔았습니다.

 

그리고 양성당 오른쪽으로는 건물 하나가 떨어져 있는데 제사를 지낼 때 필요한 도구를 보관하고

제물 장만을 하기 위한 목적의 전사청이 있습니다.

ㄱ 자 모양이 건물이네요.

 

규모는 도산 서원이나 소수 서원보다는 작아 보였습니다.

아마도 원래 있던 곳에서 이전했기에 그럴 수도 있겠다 싶네요.

이곳은 성리학의 실천 이론인 예학 논의의 산실이며 예학을 건축으로 표현한

강학당인 응도당이 뛰어난 곳이죠.

 

한국의 서원은 조선시대에 교육을 통하여 우리나라의 학문의 큰 줄기를 이루어 내고

성리학을 통해 사상의 주류를 주도한 곳이라고 봐야겠지요.

나중에는 당파의 원인이 되는 나쁜 점이 생겨 나와 서원철폐라는 사건이 생기기도 했고요.

 

그러나 성리학의 증거라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2019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지 싶습니다.

이곳은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임리에 있는 조선 시대의 서원이며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서원 중

충청남북도에서는 유일하게 등재된 서원이네요.

 

인조 12년(1634)에 기호학파를 대표하는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의 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고

현종 원년(1660)에 임금이 돈암(遯巖)이라는 현판을 내려 주어 사액 서원이 되었으며,

김집, 송준길, 송시열을 추가로 모셨다고 합니다.

 

고종 8년(1871)에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남아 보존된 47개의 서원 중 하나라고 하네요.

사적 정식 명칭은 ‘논산 돈암 서원’이라고 합니다.

 

서원 철폐령을 보면 대원군은 1864년 전국 서원의 실태를 조사하게 하며 시작되었고 그는 서원의 폐단과

존폐 문제를 제기한 후 제일 먼저 노론의 정신적 지주였던 만동묘를 철폐하며 시작되었지요.

이어서 1868년에는 사액 서원(賜額書院)을 제외한 전국 1,000여 곳의 서원을 정리하였다지요.

양반의 근거지로 남설(濫設)된 서원의 오랜 적폐(積弊)를 제거하기 위해

철폐령을 내렸다고 하니 적폐 청산인 셈인가요?

사액 서원(賜額書院)은 역시 임금이라는 뒷 배경이 든든하기에 살아남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