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이 사랑한 세계유산 봉정사(鳳停寺)

2022. 8. 17. 03:56금수강산 대한민국/경상북도

경북 안동시 서후면(西後面) 천등산(天燈山) 자락에 있는 천 년 사찰 봉정사(鳳停寺)를 찾았습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 유산으로 등재된 봉정사로 올라갑니다.

가람이 자리 잡은 천등산 기슭은 급경사지여서 처음부터 힘을 써야 하네요.

봉황이 멈춘 곳이라는 봉정사는 대한 불교 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라고 하네요.

 

이곳은 1999년 4월 21일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국빈 방문 중 안동지방을 방문했다가

봉정사를 들렀고 그때 "조용한 산사 봉정사에서 한국의 봄을 맞았다."는 방명록을 남겼다니

영국 여왕이 사랑한 봉정사일까요?

 

봉정사는 신라의 삼국통일 직후인 682년에 의상이 창건했다고 전하는데 창건설화가 재미있습니다.

영주 부석사에 자리 잡은 의상이 종이로 봉황을 만들어 도력으로 날려 보내니,

이 종이 봉황이 앉은 곳이 바로 이곳이었기 때문에 여기에 절을 지어 봉정사라고 했다네요.

종이로 접은 봉황이 그 먼 거리를 날아왔다는 것이...

 

또 한편으로는 의상이 기도를 드리려고 이 산에 오르자 선녀가 나타나 횃불을 밝히고

청마(靑馬)가 길을 인도하여 이 자리에 다다르게 했으므로 산을 횃불을 들고 산을 오른다는 의미로

천등산(天燈山)이라 하였고 청마가 앉은 곳에 절을 지어 봉정사라고 했다는 얘기도 전한답니다.

 

그러나 극락전의 상량문 기록에 따르면 봉정사는 의상의 제자인 능인이 창건했다고 하니,

신기한 이야기에 의상의 명성을 덧붙인 것인지도 모른다고 하네요.

주변으로 산들이 빙 둘러쌓고 있어 더없이 아늑한 느낌은 들지만, 절의 규모는 그리 크지 못한 이유가

바로 가파른 산비탈에 절을 지었기 때문에 넓은 터를 닦기 힘든 곳이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깊은 산속의 절이었던 봉정사(鳳停寺)가 우리의 주목을 끈 이유는 1972년 위의 사진에 보이는

극락전을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놀랍게도 1363년에 지붕을 중수했던 사실을 담은

묵서(墨書)가 발견되면서부터라고 합니다.

목조건물을 대략 150년마다 중수한다고 가정하면, 역으로 환산하면 극락전은 적어도

1200년대 초반에 건립된 건물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그렇다면 지금까지 부석사(浮石寺) 무량수전(無量壽殿)이 가지고 있던 가 오래된 목조건축이라는

명성은 봉정사 극락전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부석사에서 의상이 종이 봉황을 날려 이곳에 봉정사를 세웠다면 부석사가 먼저라는 말인데?

 

한국전쟁으로 봉정사 대부분의 자료들이 소실되어 창건 이후의 사찰역사는 전하지 않지만,

1972년 봉정사 극락전을 해체하고 복원하는 공사를 진행할 때 상량문에서 고려시대 공민왕 12년인

1363년에 극락전을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고 했지요?

이런 글이 발견되어 봉정사 극락전이 현존하는 최고의 목조건물로 인정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봉정사의 건축적 가치는 국보 제15호인 극락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네요.

극락전 외에도 위의 사진에 보이는 보물 재 449호인 고금당(古今堂), 국보 제311호인 대웅전,

보물 제448호인 화엄강당(華嚴講堂)은 각각 한 시대를 대표하는 구조 형식을 가진 건물이 있기에

봉정사를 목구조 박물관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우리의 중요한 자산들이라고 합니다.

 

고금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극락전 앞뜰에 동쪽을 향하여 세운 건물입니다.

고금당은 '원래의 금당'이라는 의미로 고려시대 봉정사의 원래 모습을 유추하게 한다네요. 

고려 중엽의 건물인 극락전, 조선 초기 건물인 대웅전, 또 조선 후기 건물인 고금당과 화엄강당이

있음으로 해서 이 절은 우리나라 목조건축의 계보를 고스란히 간직해 내려온 건축박물관 같은

특성마저 지니고 있어 시대적 건축 연구에 소중한 곳이라네요.

 

위의 사진에 보이는 화엄강당(華嚴講堂)은 큰방 2칸과 부엌 1칸으로 구성되어 있답니다.

벽체에 비해 지붕이 크고, 익공 형식에 가깝게 변한 주심포작도 기둥 높이에 비해 크다고 하네요.

이를 통해 보면 전체적으로 과장된 비례와 후기적 구조 형식을 가진

변화기의 건물이라 할 수 있답니다.

극락전 앞에는 우화루(雨花樓)라는 7칸의 긴 행랑이 마당을 감싸고 있었고,

고금당과 화엄강당이 우화루로 연결되었었고 극락전 앞면에도

대웅전과 같이 쪽마루가 부설되었다네요,

 

대웅전 앞에도 3칸 진여문(眞如門)이 놓여 마당을 폐쇄하였네요.

대웅전으로 올라가려면 오른쪽으로 경사로를 따라 올라가는 방법이 있고

가파른 계단을 따라 오르는 방법이 있습니다.

위의 사진에 보이는 진여문을 보려면 오른쪽 경사로를 따라 올라야 합니다.

 

좀 힘들게 계단을 올라가면 위의 사진처럼 봉정사의 누각 형태의 강당인 덕휘루(德輝樓) 밑으로 난

문을 마주하는데 이처럼 누각 아래로 들어가도록 입구가 만들어져 있는 방식은

경사진 지형에 지어진 집이나 절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건물의 아래로 들어가려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면서 자세도 숙연해지게 마련이니,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건물은 우리를 겸손한 자세로 만들어 깨우치고 있는 것이다.

 

이 덕휘루는 1층은 문이지만 2층은 누마루의 형태입니다.

대웅전 안 마당으로 올라와 누각을 바라보면 2층의 누각은 만세루라는 글이 보입니다.

현재는 법고와 목어가 걸려 있고 봉정사의 역사가 적힌 편액들도 보이지만,

내부로 들어갈 수 없네요.

 

안 마당에 올라서면 정면에 대웅전이 있고 왼쪽에는 극락전이 있는데 이처럼 대웅전과 극락전이

거의 동등한 위치에 옆으로 나란히 있어 한 절에 중심이 둘 있는 배치는 흔치 않은 모습이네요.

극락전은 고금당과 화엄강당을 양옆에 거느리며 아담한 마당을 누리고 있고, 대웅전은 화엄강당과

승방인 무량해회(無量海會)를 양쪽에 거느리고 앞으로는 덕휘루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극락전 앞에 있는 삼층 석탑입니다.

극락전 앞마당은 대웅전처럼 크지 않고 자그마한 곳으로 그 규모에 삼층 석탑이 아주 잘 어울립니다.

상륜부까지 비교적 충실하게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며 고려시대의

대표적 석탑인 3층 석탑이라고 합니다.

 

대웅전은 현재 봉정사의 주불전인데 단청을 한 지 오래되어 너무 낡아 보입니다.

봉정사는 70세 이하는 입장료까지 받으면서 너무 소홀한 것은 아닌지...

정면 3칸 옆면 3칸으로 팔작지붕으로 기둥과 지붕 사이에 나무들이 얽힌 모습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조화를 볼 수 있어 좋습니다.

 

대웅전을 바라볼 때 특이한 점은 앞이 툭 트인 일반적인 법당 건물들과는 달리, 건물 앞쪽에 마치

조선시대 사대부집의 사랑채에나 있을 법한 툇마루 같은 난간이 둘러 있다는 것입니다.

마당에서 바로 대웅전 건물로 드는 것이 아니라 일단 툇마루로 올랐다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대웅전 건물은 전체적으로 단청이 벗겨져 단청 아래 나뭇결이 그대로 드러나는 맛도

극락전보다 더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겨서 좋습니다.

 

안에는 극락전과 마찬가지로 후불벽을 치고 가운데에 석가모니불, 양쪽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모시고 있고 건물의 벽체가 아니라 건물 가운데에 이처럼 따로 벽을 마련하는 것은

조선 전기 건물에서나 더러 볼 수 있다고 하네요.

얼마 전 이 후불벽에 걸려 있던 탱화를 보수하려고 걷어냈을 때 그 밑에서 벽화가 발견되어 떠들썩한 적이

있었다고 하며 가로 4m가 넘는 이 거대한 벽화는 석가불이 영취산에서 관무량수경을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테두리의 연화·당초문이나 꽃비가 내리는 표현, 고려시대의 변상도와 유사한 구도 등으로 보아

이 벽화는 고려시대의 변상도와 상당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네요.

이 벽화가 훼손되어 1712년에 탱화를 새로 마련하였다는 기록 등으로 미루어,

이 벽화는 대웅전이 건축되었던 때에 그려진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한답니다.

 

1999년 4월 21일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안동 방문을 했을 때 이곳에 들렀다고 하네요.

그래서 여왕이 사랑한 봉정사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지요.

방문했을 당시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네요.

 

세계유산 천등산 봉정사 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