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빈낙도의 삶, 무섬마을

2022. 5. 18. 04:00금수강산 대한민국/경상북도

무섬은 마을 전체가 국가지정문화재라고 합니다.

40여 채의 고택 중 30여 채가 조선 후기의 사대부 가옥으로 조선시대의 가옥 연구에도 도움이 된다지요.

이 중 100년 넘은 집이 16채, 문화재로 지정된 집이 9 채라고 합니다.

 

무섬에서 가장 오래된 집이 만죽재라면 가장 큰 집은 해우당(海愚堂) 고택이라고 합니다.

1830년 선성 김 씨 입향조 김대의 손자, 김영각(1809-1876)이 짓고 해우당 김락풍(1825-1900)이

1879년에 중수하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무섬마을의 역사는 길지 않다고 봐야겠네요.

1666년, 현종 7년에 반남 박 씨가 강 건너 마을에서 이곳으로 분가하러 들어왔었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이니 이제 356년이 되었나요?

 

그의 증손녀 사위 선성 김 씨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두 성(姓)씨 가 모여 사는 집성촌이 되었답니다.

해방 전만 해도 100여 가구가 넘는 큰 마을이었는데 80여 년 전쯤 갑술년 수해라고 큰 홍수가 나면서

마을의 절반은 손실됐고 지금 남은 고택은 43채 정도라고 합니다.

그중 현재 주민이 사는 집은 26채뿐이라네요.

 

이 말은 우리나라 다른 시골마을처럼 독거노인이 많다는 뜻이겠지요?

평균 연령은 78세라니 무섬마을에서 60대는 겨우 2명뿐으로 여기서는 청년들이죠.

이 마을에서는 나이가 90은 넘어야 노인 대접을 받는 고령마을이 되었네요.

 

옛날부터 마을 안에는 농지가 없었다네요.

그래서 사람들은 강을 건너가서 농사를 지었으며 한때는 마을 소유의 토지가 30리 밖에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마을 안에는 농지가 거의 없지만, 무섬마을은 무척 부유한 마을이었다고 하네요.

마을 곳곳에는 논은 없고 밭만 있습니다.

마당에, 골목에, 아무리 작은 땅이라 해도 무엇이든 뿌리내릴 수 있는 곳은 모두 밭뿐입니다.

 

대부분은 벼슬도 하지 않던 무섬마을 선비들이 산과 강에 안겨 즐기는 유유자적한 삶이 그려지기도 합니다.

욕심도 싸움도 없는 고즈넉하고 한가로운 생활이지만, 그러나 조금 무료한 느낌도 드는 곳입니다.

1970년대 지어진 콘크리트 다리 덕택에 외나무다리는 사라졌다가

지난 2005년 마을의 옛 모습을 복원하면서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런 다리 모습으로 다시 돌아왔다고 하네요.

 

우리가 흔히 보는 전통 민속마을이지만, 무섬마을은 아마도 마을을 드나드는 독특한 모습 때문에 많은 사람이

찾아오나 봅니다.

밖에서 마을을 볼 때 물 위에 뜬 섬처럼 보이기에 "물섬마을"이라 불렸다고 전해진다네요.

발음상의 이유 때문인지 'ㄹ'이 빠지고 무섬마을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에 휘감아 돌아나가는 곳에 하회마을처럼 물길이 마을을 폭 안은 모습입니다.

그러니 외부에서 볼 때는 그 모습이 영락없는 물속의 섬으로 볼 수 있겠네요.

그러나 사실은 뒤로 육지와 연결되었기에 분명히 섬은 아닙니다.

 

마을의 지세가 그런지 조선의 유학자인 선비의 정신이 느껴지는 무섬마을은 세상 일과는 거리가 먼

안빈낙도의 삶을 꾸려가던 그런 분들이 산 듯합니다.

또 무섬마을을 두고 물 위에 활짝 핀 연꽃 모양의 땅이라는 의미로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라고도 한답니다.

 

이런 지형에서는 학자들이 많이 배출된다고 하니 지세가 우리 인간에 미치는 영향은 무시할 수만 없지 싶습니다.

또 풍수로 보면 매화꽃이 땅에 떨어진 모습을 닮았다고 매화낙지(梅花落地)라고도 부른다는데

덕망이 높은 자손이 많이 나온다는 명당으로 알려진 모습이라고 합니다.

 

뒤로는 산이 있고 앞으로는 강이 흐르니 풍수지리적으로도 배산임수형의 마을이기도 하고요.

무섬마을은 산자락 끝에 자리했고 앞에는 물이 흐르기 때문에 논이나 밭을 만들 공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강 건너 30리까지 농사를 지으러 다녔다고 하네요.

무섬마을에는 농토, 우물, 담장과 대문 그리고 사당이 없는 5무 마을이라고 한답니다.

 

무섬마을에 드나드는 유일한 통로가 바로 외나무다리였으니까 이 다리가 마을과 외부를 잇는 삶의 끈이었던 것이네요.

지금은 콘크리트로 튼튼한 다리를 연결했기에 예전에 사용했던 나무로 만든 다리는

관광자원으로만 이용되지 싶습니다.

그러나 지금 보시는 저 외나무다리가 300여 년을 무섬마을과 바깥세상을 이어주는 유일한 길이었던 겁니다.

 

처음에는 그냥 일자로 뻗은 나무다리였지만,  지금은 "S"자형 태극문양의 나무다리로 만든 것은

시에서 다시 복원하며 보기도 좋으라고 그렇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나무도 귀한데 많은 나무가 필요한 지금 모습의 태극문양은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겠지요.

 

1920년대 김락풍의 증손자 김화진(1904-1946)은 일본에서 공부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1928년 10월,

마을에 아도서숙을 설립했다고 합니다.

그는 양반, 평민, 남녀노소 차별 없이 문맹퇴치와 농촌계몽활동, 민족교육을 실시했다고 하네요.

남녀와 반상의 구분 없는 열린 교육이 바로 이 마을의 힘이 되었네요.

김화진을 중심으로 마을 청년들이 똘똘 뭉쳐 문맹퇴치와 신문물의 도입과 항일의 정신을 고취시키다가

수시로 체포되고 투옥과 고문을 당했다고 합니다.

 

1931년 9월에는 일경 1개 소대가 이 몰려와 무섬마을 청년 18명을 오랏줄로 굴비 엮듯 엮어

우리가 지금 건너 다니는 무섬마을 외나무다리를 건너 압송하기도 했답니다.

그러니 이 다리는 우리 조상들이 일제 강점에 대항해 투쟁했던 분들이 압송된 그런 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전국에서 면적 대비 가장 많은 항일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마을로도 유명한 곳이랍니다.

 

현재 무섬마을의 얼굴이라고 하는 나무다리는 두 곳에 설치했네요.

마을의 남동쪽을 연결하는 나무다리는 위의 사진처럼 일자 형태로 쭉 뻗은 나무다리로 길이도 짧습니다.

다른 한 곳이 모든 사람이 사진으로 남기는 나무다리로 마을과 남서쪽 방향으로 연결하는 나무다리입니다.

 

이 다리는 S자 형태의 굽은 다리로 사진으로 남겨도 예쁜 다리가 분명합니다.

그때는 새색시가 시집을 올 때도 이 나무다리를 통해 가마를 타고 들어왔을 것이고...

이곳 무섬마을에서 사람이 죽으면 상여가 이 나무다리를 통해 나갔을 겁니다.

 

좋은 소식 나쁜 소식 모두 이 나무다리를 통해 전해졌을 겁니다.

그러니 이 나무다리야 말로 무섬마을의 영혼과도 같은 존재가 아닐까요?

다리의 폭은 좁아 두 사람이 서로 비껴지나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리 중간중간에 나무 섬을 만들어 한 사람이 그곳에 비껴 서서 양보할 수 있는 비껴다리라는

나무 섬이 있고 지금은 예전에 비해 훨씬 넓은 다리로 만들었지만, 예전에는 나무도 귀하기에

지금보다 더 좁은 그런 다리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시는 워낙 폭이 좁았기에 안전을 위해 긴 장대를 의지해 건너 다녔다고 하네요.

 

이 마을 사람들에겐 사연이 많은 다리가 분명합니다.

외나무다리는 여름에 장마가 지면 강한 물살 때문에 사라집니다.

비가 와서 물이 많아지면 다리가 쓸려 내려가기 때문이지요.

 

재미있는 이야기는 이 나무다리는 매년 홍수가 지면 떠내려가 다시 만들고는 했답니다.

1970년대 지어진 콘크리트 다리 덕택에 외나무다리는 사라졌다가

지난 2005년 마을의 옛 모습을 복원하면서 다시 돌아왔다고 합니다.

정말 나무다리가 없다면 무섬마을의 가치는 지금의 반도 되지 않지 싶기도 합니다.

 

시인 조지훈의 아내 김남희 여사는 무섬마을 사람이었다고 하지요.

조지훈은 가끔 무섬으로 들어와 모래밭을 거닐었다고 하네요.

그가 이곳을 배경으로 노래했던 ‘별리(別離)’라는 시가 있다지요.

푸른기와 이끼 낀 지붕 너머로
나즉히 흰 구름은 피었다 지고
두리기둥 난간에 반만 숨은 색시의
초록 저고리 당홍치마 자락에
말없는 슬픔이 쌓여 오느니

십리라 푸른 강물은 휘돌아 가는데
밟고 간 자취는 바람이 밀어가고
방울소리만 아련히
끊질듯 끊질듯 고운 뫼아리

 

발 돋우고 눈 들어 아득한 연봉 바라보나
이미 어진 선비의 그림자는 없어
자주고름에 소리 없이 맺히는 이슬방울

이제 임이 가시고 가을이 오면
원앙침 비인 자리를 무엇으로 가리울꼬


꾀꼬리 노래하던 실버들 가지
꺾어서 채찍 삼고 가옵신 님아

 

다리 구조도 간단합니다.

통나무를 절반으로 쪼개서 의자처럼 다리를 붙여놓았습니다.

그리고 물에 박아 넣는 방법으로 고정시킨 외나무다리입니다.

그렇기에 비가 조금 내려 물살이 강해지면 뿌리가 약하기에 쉽게 떠내려갔답니다.

 

그래서 매년 새로운 다리를 설치하고 또 장마 때가 되면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다리지요.

  여름이면 사라지는 다리이기 때문에 이 다리를 건너 30리나 떨어진 논으로 농사지으러 나가려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겠네요.

 

그런데 비가 많이 오면 논, 밭을 둘러보러 강 건너로 가야 하는데 다리가 없으니 난감했을 겁니다.

마을 사람들은 물살이 약하면 헤엄쳐 건너가기도 했고

한국전쟁 때는 군용 보트에 의존해서 강을 건너기도 했다고 합니다.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외부로 나가지 않고 그냥 마을 안에서 버텨내야 했다고 합니다.

1983년 콘크리트 다리인 수도교를 놓을 때까지 300년 넘게 무섬마을과 바깥세상을 잇는

유일한 길이었던 곳을 오늘 걸어보았습니다.

 

옛날에는 영주 시장에 갈 때 이용했던 뒷다리, 수도교 자리에 있었던 학교 갈 때 건너는 다리,

그리고 놀기미논으로 들일 하러 나갈 때 건넜던 놀기미다리, 그렇게 세 개의 다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외나무다리는 두 개가 있고 콘크리트로 지은 다리가 하나 있더군요.

 

무섬마을 외나무다리의 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