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우나스에서 보았던 일본의 쉰들러 이야기

2018. 5. 31. 09:00동유럽, 발트3국, 러시아 2017/리투아니아

자유로를 걷는 중 옆길로 잠시 들어갔다가 어느 건물 벽에 일본인의 얼굴이 보입니다.

이 사람은 일본의 쉰들러라고 불리는 사람이라 하네요.

이름은 스기하라 지우네(杉原千畝:1900~1986)라는 인물입니다.

 

위의 사진에 보이는 인물이 바로 스기하라 지우네입니다.

유럽에서는 센포 스기하라라고도 하고요.

왜 일본인의 모습이 그려졌고 그의 자취가 이곳에 남아있을까요?

 

그는 원래 주 핀란드 대사관에 근무하다가 이곳 리투아니아로 파견 나와 혼자 근무했던

1인 영사 대리였다고 합니다.

소련이 점령하고 있는 리투아니아가 독일의 손아귀로 넘어가는 것이 분명해지던 시기였다고 하네요.

그때 유대인에 대한 나치의 탄압이 시작되고 폴란드에 거주했던 유대인까지 이곳으로 피난을 시작했답니다.

유대인들은 남미에 있는 섬들(네덜란드, 덴마크령 등)로 이주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네요.

 

하지만 그곳으로 이주하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소련에서는 어이없게도 일본의 통과 허가를 받을 것을 요구했고

수천 명의 유대인들은 일본 통과 비자를 받기 위해 당시 스기하라가 일하던 일본 영사관 앞에 장사진을

이루었는데 독일과 돈독한 관계에 있던 일본 정부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서 유대인들의

통과비자 발급을 불허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스기하라는 정부의 불허방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판단하고 정부의 지시를 무시하고 통과 비자를 발행해서

6천여 명의 유대인들에게 새 생명의 길을 열어주게 되었답니다.

당시 그는 이곳 리투아니아 카우나스 영사로 근무하며 총 2.139장의 비자를 발급해

약 6천여 명의 유대인을 살렸다고 하지요.

 

위의 사진에 보이는 비자가 스기하라 지우네가 자필로 발급한 비자입니다.

매겨진 번호로만 확인된 발행 수가 2.139장이며 당시 비자 하나로 일가족의 통행이 가능했음에

약 6,000여 명의 유대인 난민이 그가 발행한 비자로 생명을 지킬 수 있었다는 계산입니다.

그러나 번호가 도중에 그만두었으니 사실은 이보다 더 많을 것이라 합니다.

 

본국에서는 비자 발급을 하지 말 것을 종용했지만, 그는 세 번의 건의가 무시되자 정부의 훈령을 어기고

부인과 둘이서 일일이 손으로 기재하며 전쟁 중 이민을 원하는 유대인에게 일본을 거쳐 제3 국으로 갈 수 있는

비자발급을 계속함으로 많은 유대인이 이곳 리투아니아를 떠나 나치로부터 해방되었다고 하네요.

 

결국, 일본 정부에서 영사관을 폐쇄하자 그는 위의 사진에 보이는 이곳 호텔로 자리를 옮겨 부부가 계속

비자발급을 했다고 합니다.

스기하라 지우네는 마지막 기차를 타고 이곳을 떠나는 순간에도 기차 안에서까지 비자를 손으로 써서

 플랫폼까지 따라와 이곳을 탈출하기를 원하는 유대인에게 비자를 던져주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위의 사진은 동방 정교회의 이콘(ICON:흔히 아이콘이라 하며 성인을 그린 그림이나 조각)으로 그려진

스기하라 지우네의 초상입니다.

동방 정교회에서 그를 성인 반열에 올린 것은 스기하라가 바로 정교회 신자였기 때문이죠.

 

그는 죽은 후 일본 땅에 묻힌 게 아니라 이스라엘 텔아비브에 묻혔답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했던 일본의 행태를 볼 때 이런 사람도 있었네요.

용기 있는 행동이었음은 분명합니다.

 

카우나스 구시가지는 다른 곳과는 달리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예전 모습을 많이 잃어버려 그렇지 싶네요.

 

구도시는 자유로를 따라 끝까지 걸어가면 만날 수 있습니다.

규모도 크지 않고...

 

카우나스의 상징 자유로를 따라 양쪽으로 구경하고 끝까지 걸어갔다 돌아오면 끝나는 곳이네요.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겸손이란 내 마음을 단단히 잠그고 있는 지물쇠를 푸는 열쇠입니다.

나 스스로가 풀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여행하며 겸손하지 않으면 그들에게 다가갈 수 없습니다.

다가가지 않으면 느낄 수 없고 재미 또한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