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우나스의 슬픈 이야기 로마스 칼란타(Romas Kalanta)

2018. 5. 30. 09:00동유럽, 발트3국, 러시아 2017/리투아니아

자유로는 카우나스의 랜드마크이자 자부심이라 생각합니다.

구소련의 강점으로 서슬 퍼렇던 시절에도 이곳 카우나스에는 자유로가 있었다네요.

물론, 처음 만들었을 때와 나치 독일의 점령 때에는 다른 이름이었겠지만...

 

위의 사진은 카우나스 시청사 앞에서 본 모습입니다.

카우나스와 자매결연을 한 도시 이름이겠지요?

우리나라 도시와는 아직 인연을 맺지 못했나 봅니다.

 

오늘은 자유로를 걷다가 보았던 우울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1972년 5월 14일 바로 이 자유로 한가운데에서 일어났던 이야기입니다.

당시 19살이던 카우나스의 한 청년이 휘발유를 몸에 들이붓고 분신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의 이름은 로마스 칼란타(Romas Kalanta)라는 청년이었습니다.

그 청년은 공장에 다니며 히피에 심취했고 시를 쓰고 기타로 노래 부르던 평범했던 19살의 청년이었던 겁니다.

그가 분신한 곳 근처에는 “나의 죽음에 대한 죄를 물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정치체제뿐이다”라는

유서가 한 장만 남았다 합니다.

 

주변에 돌을 놓았는데 모두 19개라고 하는데 숫자의 의미는 그가 분신했을 때 나이가 만 19세였기 때문이겠죠.

아직도 그 젊은이를 추모하는 꽃다발이 그 돌무덤 위에 놓여있네요.

 

그런 일이 있고 난 후 이틀 동안 카우나스는 소련의 붉은 군대도 경찰들도 통제할 수 없는

혁명의 도시로 변했다지요?

물론, 이 사건이 리투아니아의 독립은 물론, 구소련의 붕괴를 초래하지는 못했지만,

역사적으로 대단한 일이 벌어지는 초석이 되었다는 점이죠.

 

그러니 이 일이 있었던 때로부터 약 20년 후 구소련 전체가 붕괴하는 역사적인 일이 일어난 겁니다.

그래서 이 청년의 분신이 대단한 반향을 일으킨 것으로 생각됩니다.

비록 작은 불씨에 불과했지만...

 

그렇다고 구소련의 강제점령에 반대하는 분신이 로마스 칼란타가 처음은 아니었겠지요.

이전에도 소련의 지배를 반대하는 분신자살은 리투아니아의 다른 지역과 체코슬로바키아 등지에서 종종 있었답니다.

그러나 그 어떠한 것도 카우나스처럼 엄청난 파급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당시 세계를 휩쓸던 히피 문화나 비틀스의 영향은 어느 나라나 금기시했고 특히 구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이곳 카우나스에서는 아무 어려움 없이 유행할 수 있었던 문화라 합니다.

그 결과 전 소련 내 히피 문화의 메카로 부상하기도 했을 만큼 카우나스의 자유로는 구소련 내에 불고 있는

자유화에 대한 갈망 그 자체를 보여주었다고도 할 수 있다네요.

위의 사진은 길을 걷다가 어느 가게 앞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북한 소녀로 보이는데 아마도 리투아니아가 소련의 영향 아래 있을 때 어떤 교류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자유로는 역시 그런 의미가 있었던 곳이었나 봅니다.

이런 배경 덕에 리투아니아는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같은 인근 국가나 중앙아시아 등과 비교했을 때

소련화가 가장 적게 진행될 수 있었다는 말이네요.

 

자유로에는 리투아니아 대통령 궁이 있습니다.

현재 이곳에 대통령이 늘 머무는 일은 없지만, 과거 카우나스가 잠시 리투아니아의 수도가 되었던 적이

있었을 때 대통령 관저로 사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지금은 빌뉴스가 리투아니아의 수도며 그곳에 대통령 궁이 있지요.

카우나스에는 그때 임시 수도였기 때문에 대통령 궁이 있습니다.

이곳에서만 리투아니아 대통령이 3명이나 나왔다지요?

 

리투아니아 1대 대통령 안타나스 스메토나스, 스웨트나 그리고 대통령 궁 앞에 동상을 세운

카지스 그리니우스(kazys grinius) 라네요.

그는 리투아니아 제3대 대통령이라 하네요.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그러나 그의 임기는 1926년 6월 7일부터 12월 17일까지 6개월 열흘 동안이었다 합니다.

짧은 기간 동안 대통령직에 있었으나 갑자기 사임함으로 공석이 된 자리에 2대 대통령으로 일했던

알렉산드라스 스툴긴스키스가 임시로 권한대행을 맡았지만,

초대 대통령이었던 안타나스 스메토나스가 일으킨 쿠데타로 이틀 만에 실각했다고 하니

당시의 리투아니아가 얼마나 혼란스러웠나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