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 세례당 천국의 문

2016. 5. 13. 08:30이탈리아 여행기 2015/피렌체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는 세례당으로 들어가는 문만 보고 이야기했습니다.

내부의 모습은 화려한 모자이크가 압권입니다.

모자이크는 동로마 제국이라는 비잔틴 문화라 하지요.

 

라벤나에서 이미 보았기에 우리 눈에는 그저 그런 모습이지만

이곳도 그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화려합니다.

천장만 멋있으니까 올려다보아야만 하는 곳입니다.

고개가 아플 지경입니다.

천장은 최후의 심판과 창세기에 나오는 이야기를 모자이크로 화려하게 만들었습니다.

바닥은 12 궁도를 바탕으로 기하학적 패턴으로 만들었고요.

두 개의 커다란 기둥 사이로 도나텔로와 그의 제자 미켈로초가 만든

교황 요한 23세의 무덤이 있습니다.

 

이곳 천장에 새긴 예수의 모습은 물론 모자이크로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양팔을 벌리고 있는 손바닥에 선명한 못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발등에도 마찬가지로 그대로 남아있고요.

 

여기 세례당의 청동문에도 브루넬레스키와 기베르티 두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브루넬레스키는 이곳 피렌체에서 아주 촉망받던 젊은이였답니다.

그러나 브루넬레스키는 세례당 청동문 제작 공모에 응모했다 마지막 남은 두 명 중

기베르티에게 지며 인생의 쓴맛을 보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지난번 이야기에 언급했지요?

 

그러나 당선자는 예상을 뒤엎고 더 젊은 기베르티였다고 합니다.

그는 가문의 영광이라 여기고 위의 사진에 보듯이 청동문에 자신의 얼굴을 만들어 놓았다지요?

아니면 천년만년 후대에 자신의 얼굴로 자랑하려고 함이었을까요?

혹시 마지막 관문에 낙방한 브루넬레스키의 염장을 질르려고 그랬을까요.

 

워낙 뛰어난 예술품 같은 청동패널이기에 자랑해도 누가 뭐라지 않을 겁니다.

지금은 그것마저도 관광상품이 되어 청동문을 찾는 사람 누구나

그의 얼굴을 찾느라 야단법석입니다.

 

경합에 패한 브루넬레스키는 홀연히 피렌체를 떠나 로마에 들어가 건축 공부에 매진했다고 하네요.

그가 떠난 이유가 청동상 공모작 때문이었습니다.

피렌체 바르젤로 미술관에는 당시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였던

두 사람의 작품이 나란히 걸려 있습니다.

 

1401년 당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그때 피렌체의 갑은 양모직물조합이었다 합니다.

그들은 산 조반니 세례당의 북문을 제작하기 위해 공모전을 열었다네요.

 

경연의 주제는 이삭의 희생이라는 성서 속의 이야기를 조각으로 나타내는 것이었답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그런 이야기죠.

모두 7명이 참가했는데 마지막까지 치열한 경합에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답니다.

바로 위의 작품 두 개가 마지막 경합 중이었죠.

 

두 사람은 기베르티와 브루넬레스키였죠.

칼을 든 아비와 아들을 그리라는 경연의 주제도 좀 잔인하네요.

바로 위에 보이는 사진의 작품이 당시 기베르티의 작품입니다.

 

이런 표현에서는 신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강한가와 아들에 대한 사랑을

함께 담아야 좋은 작품이 나오겠죠?

여기에 기베르티는 그의 직업인 금세공사로써 아주 섬세하고 표현했다고 하지만,

우리 같은 사람이 볼 때 난형난제 아닌가요?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평을 할 수 있겠어요.

 

반면 브루넬레스키는 위의 사진처럼 그 장면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긴장감에 초점을 맞추려 했다고 하네요.

그 순간 천사가 나타나 농담이라고 그의 행동을 제지하고 나섭니다.

이게 장난으로 할 짓인지에 대한 평가는 없지 싶습니다.

아래 하인의 모습은 천사가 나타났는지도 모르고 왼쪽의 사내는 졸고 있고

오른쪽의 사내는 발에 박힌 가시를 빼내려고하는 모습은 사실 사족이나 마찬가지죠.

칼을 목에 디민 아브라함의 모습과 100살에 얻은 아들 이삭, 천사의 만류, 대신

죽을 양 한 마리가 가장 기본이 되는 주제죠.

 

이는 아주 무지하고 평범한 세상의 모습을 나타내려고 했나 봅니다.

그런데 결과에 관한 이야기는 두 사람이 다릅니다.

 

선정 결과에 관한 이야기도 다릅니다.

기베르티는 압도적으로 자기가 선정되었다고 하고 브루넬레스키는 공동으로 결정되어

두 사람에게 세례당 문을 각각 하나씩 맡기려고 했다는 말입니다.

 

브루넬레스키는 공동작업에 관한 관심이 없어 스스로 물러나 로마로 향했다는 이야기입니다.

10여 년의 세월 동안 로마에서 와신상담하며 건축 연구에 매진하게 되었다네요.

피렌체에 남은 기베르티는 북문에 20년 동안 예수의 일생이 담긴 28개의 패널을 완성하고

지금 많은 사람이 찾는 동문까지도 완성하게 되었다네요.

 

미켈란젤로가 이 문을 보고 천국의 문이라 불렀답니다.

그런 이유로 이 문의 이름이 천국의 문이 되었다는 이야기네요.

지금은 북문보다 동문이 더 유명하죠.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좌우지간 만약 브루넬레스키가 청동문 제작경연에서 이겼더라면, 

그는 이 작업에 몰두하였을 것이고 그렇다면 피렌체 두오모의 큐폴라 같은 위대한 건축물은

이 세상에 태어나도 못했을 겁니다.

역설적으로 브루넬레스키의 실패가 오히려 청동문보다 더 위대한 큐폴라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되나요?

이를 두고 우리는 전화위복이라고 말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