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비야 대학(Universidad de Sevilla)과 비제의 카르멘과 돈 호세

2015. 9. 24. 08:00스페인 여행기 2014/세비야

세비야에는 구경거리가 무척 많습니다.

아마도 오랜 세월 이베리아 반도의 중심도시로 있었기에 역사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인데 그중 하나가 세비야 대학(Universidad de Sevilla)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세비야 대학을 찾아가다 그 옆에 아름다운 호텔이 하나 있네요.

 

위에 보이는 알폰소 13세 호텔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명문 호텔이랍니다.

호텔이 세계문화유산이라니?

이 동네는 뭐든지 세계문화유산인가요?
1929년 이곳에서 열린 아메리카 박람회 때 VIP들의 숙소를 위해 이슬람 풍으로 지었나 봅니다.

 

당시 스페인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나라라는 것을 만방에 알리기 위해 지은 건물이라 하나

이미 서산을 넘어가고 있는 지는 석양을 이런 건물 하나 짓는다고 막을 수 있단 말인가요?

지금도 스페인에서는 가장 비싼 호텔 중 한 곳이라지요?

 

오늘은 세비야 대학을 찾아봅니다.

사실 대학 건물은 그리 멋진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헉!!! 佳人이 대학을 찾아가는 일이 건물이나 보러 가는 그런 사람이었나 봅니다.

 

대학 건물이 있는 곳은 세비야 대성당에서 에스파냐 광장으로 가는 길가에 있기에

그 앞길을 수시로 지나다니며 밤에도 들렸고 낮에도 들려가며 보았습니다.

세비야는 이렇게 길을 걷다가 바라보면 그 자체가 유적으로 느껴지고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 무척 많습니다.

이런 세비야는 그 역사가 오래되었고 시대마다 아주 중요한 거점도시로 개발되고

보호받았기 때문이 아니겠어요?

 

로마는 북부로부터 채굴한 철광석과 이 부근의 농토에서 생산한 농작물을 로마로 실어가는

수탈을 위한 목적으로 세비야를 중심도시로 키웠고 그 후 서고트는 로마가 만든 기반시설에

숟가락만 얼른 올려놓고 날로 먹자고 세비야를 도읍으로 삼았다지요?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세비야를 세비야답게 만든 것은 무어족이지 싶네요.

이런 기반 속에 1248년 이곳을 되찾은 카스티야 왕 페르난도 3세는 이 도시가 대항해시대에

가장 중심적인 항구 도시가 되는 시기까지 그 기반을 단단히 다졌다고 해야 하지 싶네요.

 

그는 카스티야 왕으로 레온 왕국을 통합하여 이베리아 반도의 3분의 2를 차지할 만큼 큰 나라로

확장했고 지지부진했던 국토회복운동의 불을 다시 지핀 왕으로 유명하다 합니다.

후에 이사벨 여왕은 아라곤 왕인 페르디난도 왕과 결혼함으로 두 사람이 부부로 힘을 합쳐

지금의 스페인 영토로 확장했다고 하지요.

 

그녀는 1492년 그라나다에서 마지막까지 버티는 무어족의 마지막 왕 보아브딜의 항복을 받아내고

그들이 이곳으로 들어오기 전에 살았던 고향인 아프리카로 돌려보내는 레콩키스타의 대미를

장식했고 그해 콜럼버스를 후원하는 결단을 함으로 스페인의 세계 속의 최강대국으로

우뚝 설 수 있는 기반을 닦은 여인이었지요.

그래서 스페인은 그녀를 스페인의 어머니로 칭송하나 봅니다.

바로 위의 사진에 보이는 백마 탄 여인이 이사벨이고 그 앞에 검은 말 탄 사내가 보아브딜로

그라나다를 떠날 때의 모습입니다.

 

그런 일이 생긴 여건은 오직 과달키비르 강 덕분이 아닌가 생각되네요.

어디 그뿐인가요?

스페인 부흥의 중심에 섰던 곳이기에 많은 재화가 모여들어 그만큼 부유한 곳이라는

의미이기도 하고 세비야는 또 스페인의 혼이라는 플라멩코라는 춤이 유명한 도시라 합니다.

 

그러나 세비야 대학은 그 안에 이야기가 있는 곳이기에 찾아왔습니다.

옛날에는 왕립 담배공장이었던 곳을 세비야 대학의 법학부로 개조함으로 지금의 대학이

되었는데 1771년에 바로크 양식으로 지은 건물이 무척 아름답습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그곳으로부터 많은 재화를 들여왔다고 하지요.

그리고 콜럼버스가 들여온 것 중 많은 것이 세비야를 통하여 들어왔다고 하고요.

이 말의 의미는 세비야가 당시에 스페인의 중심도시였다는 말이잖아요.

 

많은 재화가 쏟아져 들어왔을 것이고 그중 하나가 담배였을 겁니다.

세비야 대학 정문 기둥에 아직도 담배공장이라는 간판이 붙어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담배 공장 건물도 요렇게 예쁘게 지었나요?

 

어디 정문 기둥에만 붙어있나요?
대학 건물 정문 위에도 왕립 담배공장(FABRICA REAL DE TABACOS)이라는

간판이 여태까지 붙어있는걸요.

그 결과 세비야에는 많은 담배공장이 생겼을 것이고 나중에 카를로스 3세는

이곳에 왕립 담배공장을 설립하고 담배를 생산했다고 합니다.

 

당시 시내 곳곳에 담배공장이 흩어져 있었다는데 여기에 큰 공장을 짓고

이곳으로 생산시설을 모두 모았다 합니다.

그러다 보니 유럽에서는 규모가 가장 큰 공장으로 알려진 곳이랍니다.

한때는 유럽 전역으로 수출한 담배 대부분이 이곳에서 생산한 제품이라고 하니...

유럽 많은 나라의 돈을 세는 짭짤한 시대였을 겁니다.

 

그러다 보니 이곳에는 담배 생산을 위해 일한 여성이 1만 명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담배공장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오페라 카르멘의 무대가 된 곳으로 유명하다지요?

비제는 카르멘을 이 담배공장 여직원으로 그렸다고 하지요.

 

그래서 프랑스 작곡가 비제는 1875년 오페라 카르멘의 배경으로 여기를 선택했나 봅니다.

워낙 많은 생산직 여성이 있었던 곳이니 사람만큼 많은 사연이 있을 곳 같지 않나요?

사람이 많으면 사연이 많고, 사연이 많으면 작품의 소재 또한 풍부한 법이니까요.

 

이곳은 입장료도 받지 않아 자유롭게 드나들며 예술작품 같은 대학 건물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 온 이유는 혹시 카르멘과 같은 정열적인 안달루시아 여인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호기심 때문에...

이곳에서는 중정이라고 부르는 파티오가 볼만합니다.

 

당시 공장의 정문 파티오에서 돈 호세는 요염한 정열의 여인인 카르멘을 만났으며

처음 본 순간 뻑 소리 나게 가며 불행한 사랑이 시작되었다 했나요?

정문 파티오라면 바로 위의 사진에 보이는 정원인데?

 

그러나 처음과는 다르게 카르멘은 투우사인 다른 사내를 사랑하고...

결국, 돈 호세는 투우장에서 카르멘을 찔러 죽이고 자신도 죽는

막장 커플에 관한 이야기였던가요?

팜므파탈이라는 말이 떠오르는 그런 여인이 카르멘이 아니었을까요?

사랑에 정해진 법칙이나 공식이 어디 있겠어요.

 

치명적인 사랑이었나 봅니다.

사랑도 너무 운명적으로 하게 되면 자신의 목숨도 부지하지 못하나요?

여자의 한은 오뉴월에도 서리를 내린다지만, 스페인 남자도 그에 못지않나 봅니다.

 

혹시 위의 사진에 보이는 초소가 카르멘을 죽도록 사랑했던 돈 호세가 근무했던 초소는 아닌지...

여기서 초소나 지키라고 했는데 돈 호세는 눈알 이리저리 굴리며 여자만 바라보았나 봅니다.

사랑은 이렇게 눈알 굴리기에서 시작하나 봅니다.

 

밤에는 아무도 없지만, 낮만 되면 카르멘이 이곳에 찾아와 돈 호세를 그리며 앉아있습니다.

이 모습은 佳人의 눈알 굴리기에 잡힌 모습입니다.

 

아니면 이 초소인가요?

아니면 말고...

좌우지간 담배공장은 당시에 무척 많은 초소를 지었나 봅니다.

아마도 담배가 당시에 귀중품이라도 되었기에 그리하지 않았을까요?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탐욕스러운 자는 재산이 쌓이지 않으면 근심하며,

교만한 사람은 권세가 늘어나지 않으면 슬퍼한다.

- 장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