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비야 알카사르(Real Alcázar de Sevilla)

2015. 9. 21. 08:00스페인 여행기 2014/세비야

세비야 알카사르(Real Alcázar de Sevilla)는 스페인에서만 볼 수 있는 유럽과 이슬람의 혼합 양식이라는

무데하르 양식의 아름다운 왕궁입니다.

그러나 밖에서 보는 왕궁의 모습은 그냥 평범한 모습이네요.

단순하게 쌓아 올린 성벽과 알카사르로 들어가는 문 하나가 보입니다.

출입문 위에 사자 한 마리가 보이네요.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면 여느 유럽의 건축물과는 다르게 무데하르 양식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왕궁으로 널리 알려졌다지요?

위치는 승리의 광장이라는 플라사 델 트리운포를 사이에 두고 카테드랄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 광장 한가운데는 성모상이 보이네요.

당시는 이곳이 세비야의 중심이라고 봐야 할 겁니다.

 

알카사르라는 말은 왕궁을 일컫는 말이지만, 스페인 여행 중 마주하는 알카사바라는 말과

자주 혼동이 되는 용어네요.

알카사바는 우리가 아는 영어로 시타델(Citadel)이라는 의미로 왕궁을 포함한 넓은 의미의 성채로

왕궁은 물론 마을까지 성벽으로 둘러싼 성벽 도시를 말하지 싶네요.

 

섭이 투어라고 아세요?

세비야를 찾는 한국인에게는 아주 유명한 투어입니다.

이 광장이 우리나라 사람에게도 유명한 섭이 투어의 시발점입니다.

섭이 투어란 바로 꽃할배들이 이곳으로 여행 왔을 때 다른 분들은 모두 론다로 여행을 떠났지만,

무릎이 좋지 않았던 백일섭 할배만이 세비야에 그대로 남아 혼자 마차를 타고 주변 관광지를 다녔지요.

 

마차 타고 주변 유명 관광지를 한 바퀴 돌아보는 투어를 우리나라 사람들은 섭이 투어라고 한다네요.

늦은 밤에도 마차는 투어 손님을 기다리고 있더군요.

혹시 걸어 다니기 힘이 들거나 아니면 특별하게 마차 타고 주요 볼거리를 찾아보시려면

마차 투어도 좋지 싶습니다.

 

마차 타는 곳은 여기뿐 아니라 주요 관광지 여러 곳에 있더군요.

40여 분 마차 타고 돌아보는데 50유로 내외 정도라고 하는데 가격은 흥정하기 나름인가 봅니다.

원래 이런 일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달라지는 게 아니겠어요?

 

우리 부부야 워낙 걸어 다니는 두발로 투어를 즐기기에 마차 투어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사실 말이 머무는 옆을 지나치려면 냄새도 나고 지저분하더군요.

 

우리가 얼마 전 거쳐온 바다호스라는 도시에서 알카사바의 모습을 구경한 적이 있지요.

알카사르나 알카사바라는 용어 자체가 이베리아를 한때 지배했던 무어인의 언어에서 왔다고 하니...

그들이 물러간 지 언젠데 아직 그들의 언어가 남아 지금은 스페인의 언어가 되었네요.

뼛속까지 그들의 영혼이 자리하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지 싶습니다.

이런 이슬람의 알카사르나 알카사바는 대부분 로마 제국이 쌓았던 성벽을 재활용했다지만,

여기 세비야는 다르지 싶네요.

 

로마는 지금 이 자리에 도시를 건설한 게 아니라 조금 떨어진 이탈리카라는 곳에 건설했다고 했잖아요.

그래도 지금 알카사르가 있는 이곳에는 아크로폴리스를 건설했다고 합니다.

로마기 지배할 때는 중심은 이탈리카였다는 말이고 여기는 변두리라고 봐야 하겠지요.

로마 제국이 사라진 후 이 지역의 맹주는 서고트족이었다네요.

 

서고트 족은 이곳에 도읍을 정할 정도로 세비야는 그때부터 중심지역으로 성장했다 합니다.

그러니 여기 알카사르는 순전히 무어인의 힘으로 만든 곳이라고 봐야 하니 진정한 알카사르라고 해야 하겠네요.

물론, 그 후 레콩키스타로 말미암아 그들이 물러나고 기독교 세력이 이곳에 들어오며 왕궁으로 사용했지 싶네요.

 

그때가 1248년으로 카스티야 왕국의 페르난도 3세가 이 지역의 맹주로 수백 년을 지배했던 무어족을

완전히 몰아내고 명실상부한 맹주가 되어 후일 그라나다 알람브라 궁전에서 끝까지 버티던

무어족 보아브딜 왕을 몰아내는 힘을 비축했던 곳이죠.

역사적인 힘을 느껴보시려면 알카사르에 들어가 보셔야 합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이곳 알카사르에서 이사벨 여왕의 협찬을 얻어 대항해 시대를 연 산타 마리아호를

이 부근에서 출항시켰으니 세비야 알카사르는 무적함대였던 스페인의 최전성기의 시발점이라고 해도

틀린 말을 아니지 싶네요.

겹경사가 난 곳이기에 과달키비르 강의 풍수지리가 뛰어난 곳이 아닐까요?

 

그뿐인가요?

1519년 세계 일주를 떠난 마젤란도 바로 이곳에서 허락을 얻어 출발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여기 알카사르에서 바로 스페인 부흥과 더불어 이런 모든 일들이 결정된 곳이라고 봐도 되지 않겠어요?

그때는 문지방이 닳도록 지원을 얻기 위해 많은 탐험가가 드나들었을 바로 그런 곳이 여기지 싶습니다.

 

그런 이유로 1503년 바로 이곳에 남미 식민지의 모든 교역을 관장하는 인디오 통상원이 이곳 세비야에

만들어짐으로 명실상부 스페인 뿐 아니라 유럽의 중심도시로 발전하게 되었을 겁니다.

무역을 관장하면 돈이 따르고 돈이 따르면 사람이 모이기 마련이고 사람과

돈이 많은 곳에는 예술이 따라오지요.

이게 바로 광에서 인심 난다는 세상의 진리입니다.

 

오늘 구경할 알카사바, 인디아스 고문서관 그리고 산타크루스 거리는 세비야에서 가장 많은 구경거리가 있는

중심지에 있어 한가운데 승리의 광장(Plaza del Triunfo)을 중심으로 세비야 대성당까지

모두 구경할 수 있는 곳입니다.

위의 지도를 참고하시면 각각의 위치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입구는 사자가 그려진 문이기에 사자의 문이라 하겠지요?

로마 제국 시절에는 아크로폴리스로 그리고 이슬람 시절에는 요새 등으로 사용된 이곳은 역대 왕들이

증축을 거듭해 지금에 이르렀다네요.

그러니 과거 무어인이 세웠던 흔적을 많이 지웠다고 하는데 사실 이슬람 양식인 무데하르 양식으로

더 아름답게 꾸몄습니다.

 

지금 현재 건물은 14세기 말에 잔학한 왕으로 유명한 페드로 1세 때 세운 궁전이라 합니다.

그는 왕위에 오르면 많은 정적을 죽임으로 이런 명예롭지 못한 별명으로 불렸다지요?

그런 그도 이복동생인 엔리케 2세와의 전투에 패함으로 그의 칼에 찔려 죽었다니...

 

이 궁전을 지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고 하네요. 

그는 이슬람 양식의 건축양식을 좋아해 전국의 장인을 불러 모아 그라나다 알람브라 궁전을 흉내 내

이 건물을 짓게 했답니다.

아마도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이 무척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그래서 이 궁전은 "알람브라 궁전의 자매"라 부른다네요.

 

이 말은 특허 도용이라는 말이 아닌가요?

요즈음 같으면 특허소송에 휘말려 패가망신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생각되네요.

모서리가 둥글다고도 소송을 당하는 세상이 아닌가요?

무데하르 양식의 섬세한 조각이 일품이라 합니다.

 

여기서 카스티야 왕국의 왕인 페드로 1세와 그라나다의 무어인 왕 무하마드 5세와의 교류가 있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은 서로 죽여야 내가 사는 게 아닌가요?

여기에도 재미있는 뒷얘기가 있습니다.

유수프의 뒤를 이어 권좌에 오른 무하마드 5세는 즉위 5년 만에 암살의 위기를 넘깁니다.

 

재미있게도 그는 그라나다를 떠나 얼마 전까지 죽자 사자 싸웠던 적국인 카스티야 왕국이 있는 세비야로

잠시 몸을 의탁하게 되는 일이 생겼습니다.

우리 가치관으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 아닐까요?

 

그 두 사람은 건축에 무척 많은 관심이 있어 두 사람은 많은 시간을 건축에 관한 토론으로 날을 보냈나 봅니다.

페드로는 세비야에 왕을 위한 새로운 궁전을 세울 때 이슬람식으로 많은 부분을 도입했나 봅니다.

세상에 무기로 싸우지 않고 이런 예술적인 건축물을 짓는 것으로 다투었으면 좋겠습니다.

 

훗날 다시 복위한 무하마드 5세는 알람브라에 돌아가 세비야에 머물며 페드로와 나누었던 건축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실제로 알람브라 궁전을 리모델링하는 과장에

이곳 세비야 알카사르의 건축 방법을 도입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슬람 건축의 최고봉이라는 알람브라의 일부는 아이러니하게도

세비야 가톨릭 궁전을 모태로 탄생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세비야 궁전을 능가하겠다는 생각에 만들었다고 하니 경쟁은 또 다른 세계적인 유산을 만든 셈인가요?

차라리 전쟁이나 하는 군사적 경쟁보다는 이런 예술적 경쟁이 훨씬 아름다운 일입니다.

 

이때 만든 게 바로 세비야 궁전의 중전보다 더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게 사자의 정원이라 합니다.

위의 사진이 바로 그 유명한 알람브라 궁전의 귀염둥이 사자의 정원 중정에 만든 사자랍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게 이슬람에서는 인간은 물론 동물의 형태로 장식하지 않잖아요.

 

그런데 왜 알람브라 궁전에 동물의 형상인 이런 사자의 조각을 만들었을까요?

가장 아름다운 정원의 하나는 이렇게 가톨릭의 색채가 가미된 경쟁의 결과였습니다.

 

입구인 사자의 문입니다.

그럼 이 사자가 알람브라 궁전 사자의 정원에 있는 그 사자의 조상일까요? 

 지금은 이렇게 많은 관광객이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 듯 옛날에도 스페인 왕의 후원을 기대하며

많은 모험가가 드나들었을 겁니다.

협찬을 얻어야만 야망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죠.

 

왜?

콜럼버스가 유럽의 왕들을 찾아다니다 모두 퇴짜를 맞았지만,

여기에서 이사벨 여왕을 만남으로 대박을 터뜨렸으니까요.

로또보다도 비교되지 않는 대박이잖아요.

 

안에는 4개의 파티오(정원)와 파티오를 중심으로 대사의 방, 술탄의 침실, 제독의 방, 카를로스 1세가

튀니스를 정복하는 장면을 묘사한 카를로스 1세의 궁전 등이 있다고 합니다.

제독의 방에는 콜럼버스가 탔던 산타 마리아호의 모형도 있습니다.

 

정교한 아라베스크 문양과 섬세한 옻칠 세공은 아주 훌륭하지 않나요?

천장에 만든 모카라베 장식은 보석보다 더 환상적이고 아름답습니다.

특히 카를로스 5세의 궁전은 대항해 시대에 식민지 무역을 관장하던 곳으로

화수분 같은 곳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주변에는 귀족들의 저택이 즐비합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부족한 부분은 서로 채워주고,

넘치는 것은 서로 나누어 갖고,

힘들면 서로 기대고 기쁘면 함께 웃어준다.

 

그래서...

 

불편한 점 몇 가지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부부란 그렇게 서로 반쪽이 돼주면서 하나가 되어 갑니다.

하나가 되면 평생을 함께 걸어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