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 에보라 대학(UNIVERSIDADE DE ÉVORA) 캠퍼스

2015. 6. 11. 08:00포르투갈 여행기 2014/에보라

오늘은 에보라라는 작은 마을에 있는 에보라 대학(UNIVERSIDADE DE ÉVORA)

캠퍼스를 둘러본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대학 캠퍼스로 가기 전에 먼저 작은 궁전 하나를 지나갑니다.

로만 템플이라고 하는 디아나 신전 앞에 작은 궁전 하나가 있습니다.

 

카다발 궁전(Cadaval Palace)입니다.

이 궁전은 로마가 멸망한 후 이곳을 점령했던 무어인이 지배하다 14세기 이르자 그 운명을 다 하게 되며

서서히 힘을 잃어갈 때 건축되었다 합니다.

지금 일부는 성당으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그대로 궁전으로 보존되고 있다네요.

 

재미있는 것은 카다발 가문이 아직도 이 건물을 소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런 가문 흔치 않을 것 같습니다.

세월이 5백여 년이나 흘렀는데...

 

궁전터가 좋아 그랬을까요?

아니면 바로 앞에 있는 다아나 신전의 디아나가 보호해서 그랬을까요.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면 조상의 묘를 기가 막힌 곳에 썼기에 그렇다고 하겠지요.

좌우지간 믿기 어려울 정도의 지속력을 가진 가문이네요.

 

건물의 특징은 우리가 벨렝 탑이나 제로니무스 수도원에서 보았던 포르투갈 전통의 마누엘 양식과

서유럽 전통의 고딕 양식 그리고 기독교 세력이 다시 이베리아 반도를 재탈환했을 때 이곳에 살았던 무어인에

의해 새롭게 탄생한 이슬람식 양식이라는 무데하르 양식이 혼재된 모습이라 합니다.

짬뽕?

 

그러니 세 지역의 독특한 양식이 섞어찌개로 만든 건축물이라는 말이네요.

특히 궁전 내부에 있는 성당의 모습은 포르투갈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소문이 난 곳이라 합니다.

18세기 전성기 때의 아줄레주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궁전이 있는 건물 언덕 아래로 내려가면 역사가 아주 오래된 대학 캠퍼스가 있습니다.

내려가기 전에 구시가지 끝에 서서 신시가지의 모습을 잠시 보고 갑니다.

 

저 멀리 로마 시대 때 만들었다는 수도교처럼 보입니다.

너무 멀고 작아 잘 안 보이시죠?

사실, 저기까지 다녀오기 싫어서 사진으로만 봅니다.

 

이번에는 조금 더 끌어 당겨보겠습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그런 유적이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얼마 전 보았던 세고비아 수도 교만하겠습니까?

그러나 깨끗한 물에 대한 집념이 대단했나 봅니다.

저 너른 평야를 거쳐 이곳 언덕까지 물을 끌어온다는 것이 당시로는 쉬운 일은 아니지 싶습니다.

 

그러나 이 수로는 로마 시대에 만든 게 아니라 합니다.

1530년에 만든 수로로 중세 때 만들었다고 하니 조금은 실망스럽지만, 사실 이것도 만만한 게 아니잖아요?

 

이제 에보라 대학(UNIVERSIDADE DE ÉVORA) 캠퍼스를 찾아갑니다.

대학 후문으로 보입니다.

佳人이 대학 캠퍼스를 찾는다고 하니 느낌이 조금 이상합니다.

 

1559년에 처음 이곳에 세웠다고 하니 무척 오래된 대학이 맞지요?

그런데 이 작은 동네에 대학이라니...

여기는 농사도 활발하지 못한 내륙의 오지가 아니겠어요?

 

그래서 중간에 학생이 없어 한때는 폐교까지 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공부하는 학생이 많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1973년 다시 국립대학으로 문을 열었다고 하니 대학 건물 자체가 역사가 아니겠어요?

살라망카 대학 파사드에서는 해골 위에 냉큼 올라간 개구리를 보았는데 여기에서는 두꺼비를 봅니다.

개구리나 두꺼비나 후퇴를 모르고 앞으로만 튀니까 학생들은 뒤도 옆도 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고

열심히 학문에 정진하라는 의미일까요?

 

대학 건물은 이슬람 양식이 많아 보이고 복도를 따라 아줄레주로 장식했습니다.

 

에보라에서 생긴 역사적인 사건들을 많이 기록했네요.

1165년 레콩키스타로 이곳 에보라를 다시 찾았나 봅니다.

그리고 바로 무어족의 흔적을 지운다고 1186년 대성당을 건립했네요.

1340년 살라도 강에서 스페인과 연합해 모로코의 메린 왕조를 격파한 자랑스러운 역사를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1385년 8월 14일 바탈랴 근교에서 주앙 1세가 이끄는 포르투갈 군이 스페인의 카스티야 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함으로 독립을 쟁취한 사건. 1559년 에보라 대학 설립.

 

1637년 당시 포르투갈을 지배했던 스페인의 부동산 정책인 양도세 부과에 반발해 일어난 시민혁명.

1497년 바스쿠 다 가마는 세 번의 인도 항로 개척을 위해 출항 중 그 첫 번째로 출발했던 해였지요.

그는 출발 전 이곳 대성당에서 무사 항해를 기원하는 미사에 참석했다 합니다.

7월 8일 네 척의 범선을 이끌고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 동진함으로 지금까지 동양과의 모든 무역을

좌지우지했던 오스만 제국을 닭 쫓던 개로 만든 장본인이었지요.

이런 역사적인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동판 하나에 새겨 놓았습니다.

이 동판 하나만 보면 에보라의 모든 것을 본 셈이네요.

 

그래서인가요?

포르투갈은 행운의 상징으로 수탉을 챙기더군요.

그럼 오스만 제국은 개가 되고 만 겁니까?

 

바스쿠 다 가마는 콜럼버스와 비교하면 과소평가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콜럼버스는 단순 무식하게 서쪽으로만 배를 몰아 직진만 했고 바스쿠 다 가마는 제대로 된 항로를 따라

인도로 갔습니다.

그래서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 거기가 인도인지 알았지만, 남의 다리만 긁었지요.

바스쿠 다 가마는 바로 여기 에보라 대학에서 공부했다 합니다.

똑똑한 사람이었나 보네요.

 

여기서 항해술과 수학을 배우고 1497년 4척의 배로 리스보아에서 출발해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 

1498년 5월 드디어 꿈에 그리던 인도에 도착하게 되었답니다.

이를 후세 사람은 인도항로라 부른다지요?

후에 인도 총독까지 지냈다네요.

당시 국왕 마누엘은 그의 형제에게 Dom이라는 귀족 칭호를 내렸답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관광안내소에서 지도 한 장 얻어 들고 성벽 안의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몇 시간 안에 모두 구경할 수 있을 겁니다.

워낙 손바닥만큼 작은 마을이라 사실 지도가 없어도 될 만큼 작은 마을입니다.

시간이 허락하면 이곳에 들려 뼈 성당을 바라보고 삶에 대한 생각도 다시 다듬고 바스쿠 다 가마도 만나보세요.

위대한 탐험가로 존경받는 사람이 다녔던 학교를 찾아보는 일도 여행 중 나쁘지 않은 일이 아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