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육지탄(髀肉之嘆)

2014. 7. 4. 08:00삼국지 기행/삼국지 기행

 

중국의 지도를 펴놓고 보면 징저우란 그 위치가 중원의 배꼽으로 마치 세 나라가 서로 머리를 들이밀고 있는

곳처럼 보이며 그때 중원경영을 천하 통일이라는 생각을 하고 살아갈 때는 정말 제일 가운데라고 봐도 되겠네요.

그러기에 서로 형주를 차지하기 위해 그렇게 싸웠나 봅니다.

 

천하의 공명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형주를 차지하는 일이라고 했으니까요.

수로가 발달해 물류가 모두 이곳을 통해 이동했고 농토가 비옥해 먹고 사는 일이 쉬운 곳이잖아요.

그리고 군사적으로 어느 곳이나 쉽게 이동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고요.

 

게다가 형주고성은 위의 사진처럼 가장 바깥의 해자, 중간의 벽돌 성, 그리고 안쪽의 토성, 총 삼중 구조로

지어진 난공불락의 철옹성이라 봐야 합니다.

해자는 성을 한 바퀴 삥 둘러 있기에 그야말로 징저우 성은 섬과도 같은 곳입니다.

 

역시, 공명이 왜 유비에게 징저우를 차지하라고 권했는지 분명해졌습니다.

더군다나 징저우는 평야 지대며 비옥하기에 농사도 잘되고 장강을 통한 수로 교통의 길목이기에 물산마저

풍부한 곳이기에 지정학적으로 이런 유리한 지역이 흔치 않은 곳입니다.

 

형주성 남으로는 장강이 자연적인 방어선이 되기에 일종의 배수진을 친 듯한 느낌입니다.

그러기에 북으로는 징저우에서 제일 큰 대북문이 있고 오른쪽 끝에 작은 소북문이 하나 더 있지요.

동쪽으로는 동문인 공안문(公安門)있어 이 문은 형주성에서 유일하게 수로로 바로 연결된 성문입니다.

 

그러니 배를 타고 형주성에 입성하려면 반드시 공안문을 통해야 했기에 형주를 얻은 유비도,

형주를 빼앗은 육손도 바로 이곳 공안문을 통해 형주성에 입성했을 겁니다.

정말 파란만장한 문이 아닌가 생각되네요.

모두 다섯 개의 문이 있지만, 동문과 공극문(拱極門)이라 부르는 대북문이 제일 볼만합니다.

 

이곳 대북문 누각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면 위의 사진처럼 해자를 건너는 득승교(得勝橋)가 보이고

그 다리 너머 북쪽으로 득승로가 뻗어있습니다.

득승교는 관우가 과거 번성 공략에 나섰을 당시 적장 방덕의 목을 베고 조조군을 전멸시킨 뒤 바로 이곳

득승교를 건너 징저우 성으로 귀환했다는 일화가 전해지는 다리입니다.

 

당시 백성은 이곳 거리로 몰려나와 관우의 승리에 기뻐하며 풍악을 울리고 폭죽을 터뜨리며 관우를

맞이했을 겁니다.

민초들의 환호 속에 관우는 적토마에 올라 그 멋진 수염을 휘날리며 보무당당하게 군사들을 이끌고

아주 기세등등하게 행진하며 이 다리를 건너 징저우 성으로 돌아왔을 겁니다.

 

그리고 대북문에서 동쪽으로 몇 미터 가면 관우가 당시 승리를 하고 돌아와 적토마를 씻겼다는

세마지(洗馬池)도 있었답니다.

지금은 그 자취는 사라졌고 흔적조차 볼 수는 없어 아쉬움이 남네요.

나머지 소북문, 서문, 그리고 남문은 평범한 문입니다.

아래 보이는 사진이 바로 서문으로 그냥 그런 문입니다.

 

원래 징저우는 황실의 종친인 유표(劉表)가 다스린 곳입니다.

유비는 유표 밑에서 생활하며 비육지탄(髀肉之嘆)의 생활을 한탄했던 모양입니다.

뜻은 있되 그 뜻을 펴지 못함을 탄식하며 막상 유표가 형주성을 부탁했을 때는 사양했지요.

이 또한 유비를 인간적으로 도덕적으로 다른 사람과 비교하려는 작가의 이야기가 아닐까요?

 

비육지탄이란 넓적다리에 살이 붙었음을 한탄한다는 말로 당시 유비는 이곳 징저우의 유표에 의지하여

비정규직으로 조그만 고을을 다스리고 있었을 때였지요.

 

그러던 어느 날 유표에 초대되어 징저우성(荊州城)에 왔을 때,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일어서던 유비는

문득 자신의 넓적다리에 살이 많이 붙은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오자 유표가 유비의 눈물 흔적을 보고는 그 까닭을 묻자...

 

유비가 대답하기를 “나는 지금까지 항상 말을 타고 전장을 돌아다녀서, 넓적다리에 살이 붙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말을 타지 않고 너무 빈둥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살이 들러붙었습니다.

세월이 가는 것은 빨라 늙음이 이르는데도, 아직 공업(功業)을 세우지 못하였으니 그러므로 슬플 뿐입니다."라고

답을 했다고 하여 이 고사를 비육지탄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울기는 왜 울어요?

그러니 찌질이라는 이야기를 듣지요.

살아~살아~~ 왜 하필 유비의 허벅지에 붙어 유비를 슬프게 하니?

세상에 허벅지에 살이 붙었다고 우는 사내는 유비외에는 아무도 없을 겁니다.

 

여러분은 화장실에서 볼일 본 후 허벅지 살을 살펴보십니까?

佳人은 지금까지 한 번도 허벅지 살을 살펴본 적이 없습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나잇살이라고 해 자연히 살이 붙습니다.

유비여~ 언제나 청춘으로 살아갈 수 없는 게 인간이잖아요.

그까짓 허벅지 살이야 다이어트하면 금새 없어지지 않겠어요?

 

유표가 죽기 전 형주를 유비에게 부탁했지만, 유비는 거절했다지요?

명분이 있어야 백성이 따르고 백성이 따라야 나라를 세울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을 겁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이때 사양이란 내숭이라는 말이나 다름없습니다.

백성을 다스려야 따르든 말든 하지 감나무 밑에서 입 벌리고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유비가 아닙니까?

한 마디로 표리부동한 생각이 아닌가요?

 

유표가 죽고 형주성은 결국 조조의 손아귀에 넘어갔지요.

사실 유표는 황실의 종친이기에 죽을 때 징저우를 반납하던가 아니면 황제의 명령을 받아 아들에게 징저우를

넘기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왜 생면부지 유비에게 부탁한단 말입니까?

 

조조가 형주성을 공략하려고 내려왔을 때 유비는 조조군에게 쫓기며 처자식도 모두 팽개치고 혼자 도망부터

가는 떠도는 신세가 되었고 나중에 노숙과 공명의 도움으로 손권과 손잡고 적벽대전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조조와 손권이 다투는 사이에 슬쩍 징저우에 엉덩이부터 들이밀고 눌러 앉아버립니다.

 

네덜란드에 크라커(Kraaker)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말은 훔치는 사람, 또는 빼앗는 사람이라는 의미라 합니다.

그 나라는 24시간만 남의 집에 들어가 버티면 법적으로 주인이 마음대로 쫓아낼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 집만 골라 들어가 사는 사람을 크라커라 부른다는군요.

그런데 유비는 빈집이 아닌데도 들어가 주인행세 했군요?

 

이후 유비는 형주성을 기틀로 삼아 서천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촉을 세움으로써 황제의 지위에 오른 약속의 땅이

바로 여기 징저우라고 봐야 할 겁니다.

그러니 여기가 황제를 배출한 곳이라는 말이군요.

 

형주성은 유비에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지금까지 연고지조차 없어 상갓집 개처럼 동가숙 서가식 하며 떠돌이 노숙자 생활을 하던 유비가 처음으로

번듯한 거처가 생겼다는 것 아니겠어요?

 

오죽했으면 약속을 중히 여기는 유비가 손권으로부터 형주성을 빌려 와 놓고도 손권의 수차례 반환 요구를

이런저런 핑계로 뭉게버렸을까요.

나중에는 차용증까지 썼다고 하더군요.

이 때문에 중국에는 ‘남의 것을 빌리고 되돌려주지 않는다’는 뜻으로 ‘유비가 형주를 빌리다’는 속담도 있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후세에 수치스러운 말입니까?

 

유비는 징저우를 손에 넣음으로 이제 반듯한 지역을 가지게 되었고...

그러나 동시에 유비가 징저우 성을 잃은 것은 촉한이 패망하는 서곡이 됐다고 봐야 하겠네요.

이렇게 이곳 징저우는 유비에게 무지개 꿈이 피어났던 곳이며 동시에 그 꿈이 무참히 사라지게 만든

영욕의 장소가 이곳이기도 하겠네요.

 

오만했던 관우가 양양 번성을 점령하려고 형주성을 잠깐 비운 사이에 오나라는 여몽의 봉화대 무력화 작전을

펴며 치밀한 전략을 펼쳐 징저우 성을 점령하는 데 성공합니다.

소탐대실이란 말인가요?

공명이 그렇게 신신당부했던 말...

절대 이곳을 나와 허튼 짓거리 하지 말라라는 말...

 

징저우 성과 함께 관우를 잃고 장비까지 허망하게 죽어버리자 줄초상이 난 겁니다.

결국, 유비는 머리가 돌아삐서 판단력까지 흐려지며 대군을 이끌고 동오를 공략하려다 이릉에서 불고기가

되려다 겨우 목숨만 건졌지만, 화병이 나 돌아가지도 못하고 씩씩거리다 백제성에서 자신마저 죽었습니다.

이런 관우를 왜 중국에서는 신격화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수어지교...

참 잘도 지은 말입니다.

유비가 공명을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을 물고기라 했고 공명을 물이라 했더랬답니다.

이릉전투는 공명이 가지 말라고 말렸지만, 고집부리며 떠난 전쟁이 아니겠어요?

 

그러나 물고기는 물을 떠나면 갈 곳이 바로 프라이팬 위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몰랐단 말입니까?

육손이 펌푸질해 불을 땐 프라이팬 말입니다.

유비는 그 프라이팬 위에 냉큼 올라앉아 눈만 멀뚱거리며 뒤집기만 하다가 백제성에서 한많은 인생을 마감합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우리는 유비가 처한 상황을 보고 흔히 화병이라고 합니다.

왜 화가 나지 않겠어요.

백전노장이라 생각하고 전력도 강했는데 백면서생이라는 햇병아리 육손에 당했는걸요.

 

백제성으로 도망와 밤에 자다가도 벌떡 깨어나 헛것도 보이고 헛소리도 했을 겁니다.

가슴이 죄어오고 숨마저 금방 끊어질 것 같은 공황장애도 왔을 겁니다.

결국, 자기 생명을 단축하게 한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