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저우(荊州:형주)의 밤은 깊어가고...

2014. 7. 7. 08:00삼국지 기행/삼국지 기행

 

징저우(荊州)는 유비에 있어 약속의 땅이었고 또한 저주의 땅인 셈입니다.

같은 장소라도 이렇게 천당과 지옥이 될 수 있나 봅니다.

유비가 제대로 된 성을 얻어 당시 군벌로 안팎으로 대우 받고 행세하게 된 근거지가

바로 징저우 성이었고 촉한을 세우는 근본이 된 곳이 바로 징저우 성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어요?

이때까지는 희망의 땅이었습니다.

마치 쌍무지개 뜨는 황홀한 미래를 그린 곳이지요.

 

그리고 유비가 천하 통일의 대업을 물거품으로 돌리게 된 이유도 징저우 성을 지키던 관우가

지키라는 성은 지키지 않고 군사를 끌고 밖으로 싸돌아다니다가 오나라 여몽의 협공을 받고

사망하며 장비도 유비도 모두 사망으로 이르게 한 곳도 여기이기 때문에 저주의 땅인 셈이죠.

지키라고 할 때 지키기만 하면 될 텐데... 골목대장 놀이라도 하고 싶었나 봅니다.

결국, 중국인이 신으로 모시는 관우의 방심과 오판으로 징저우만 잃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관우의 오만한 성격은 결국 손권의 아들을 관우 딸과 혼사를 치르자는 제안을 범의 자식을

어떻게 개의 자식과 혼사를 치를 수 있느냐고 막말을 하는 바람에 손권의 자존심을 건드렸고

이는 관우의 목숨까지 연관 지어 버립니다.

물론 그게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겠지만...

 

그럼 손권이 개를 낳았다는 말인가요?

유비 부인 중 손 부인이 손권의 여동생인데 그럼 완전 개판인가요?

관우가 하늘처럼 떠받드는 주군이 개와 살았다는 말입니까?

 

공명은 방통이 죽자 서천으로 떠나며 관우에게 뭐라고 신신당부했습니까?

북쪽의 조조를 막고 손권과는 동맹하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렇다면 혼사가 들아왔더라도 점잖게 사양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렇게 하는 게 보통 사람의 사양방법이 아니겠어요?

 

관우는 손권을 강동의 오소리라고도 함으로 손권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오만함도 보인

경솔한 사람임이 틀림없나 봅니다.

어디 오소리 얼굴 한번 보고 갈까요?

여러분은 이렇게 잘 생긴 오소리 본 적 있으세요?

그리고 사람 생김새를 가지고 흉보는 게 아닙니다.

 

그런 일은 천박한 일이지요.

더군다나 천하의 관우가 말입니다.

결국, 이 모든 문제는 관우가 스스로 초래한 일이며 대업을 망치게 한 가장 큰

원인 제공을 했다는 책임론에서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또 한 사람...

오만함으로 말미암아 인생은 망친 사내가 있었죠.

마속 말입니다.

가정을 지키라는 명령을 무시하고 적을 섬멸한다고 군사를 이끌고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망한 사내 말입니다.

 

관우는 징저우 성만 잃는 게 아니라 자기 목숨과 장비, 유비의 목숨까지 한꺼번에 가져갔으며

이로써 한실의 재건이니 천하 통일이니 하는 것은 그냥 구호에만 그치고 물 건너가게 되었잖아요.

무슨 신이 자기 하나로 이렇게 큰 사건을 초래했나 모르겠어요.

정말 어처구니없는 관우네요.

 

형주란 바로 천하 제패를 위한 첫걸음인 셈입니다.

유표는 원래 황족이기에 처음으로 형주에 부임하여 내려와 그런대로 아주 행복하고 조용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지만, 그러나 형주는 당시 중원에서는 아주 풍요로운 지역이었고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전략적 도시이기에 일찍이 오나라의 노숙 자경은 오나라 군주에게 삼분 천하를 건의

했으니 이는 공명이 주장한 삼분 천하보다도 더 빠른 시기였지요.

 

공명과 다른 점은 공명은 오나라와 위나라 그리고 촉으로 나누는 삼분 천하였지만, 노숙의 주장은

위나라 조조와 손권의 오나라 그리고 형주의 유표가 천하를 셋으로 나눈다는 게 다른 점입니다.

그러니 여기에는 유비는 안중에도 없었지요.

그만큼 유표가 차지했던 형주는 나라의 기틀이 될 정도로 대단히 좋은 지형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유비란 당시에는 존재감조차 없는 미미한 떠돌이였다는 말이기도 하고요.

 

공명이 처음 유비를 만났을 때 첫 마디가 바로 형주를 취하고 익주를 취한 후 천하를 셋으로

나누라고 했는데 형주란 세 나라가 첨예하게 머리를 맞댄 곳으로 그 전략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곳이라는 의미일 겁니다.

원래 조조가 차지하고 있었던 곳으로 조조가 손권과 싸우는 사이에 유비는 큰 힘도 들이지 않고

슬쩍 먹어 형주를 취하게 되므로 이곳은 늘 누구나 눈독을 들이고 째려보고 있는 곳이 되었다네요.

 

물론 형주의 군주였던 유표가 연의 상에서는 유비에 맡아달라고 했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작가의 소설이고...

그 이유로는 유표는 유비를 같은 종씨라고 예로 대했지만 늘 유비의 음흉한

속마음을 의심했다고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유표가 중병에 걸렸을 때 그의 큰아들조차 아비의 병문안을 할 수 없었는데

어찌 유비가 감히 이런 이야기를 유표와 독대하고 들을 수 있었겠어요.

만약, 독대했다 하더라도 이는 유비가 독대 후 나와서 혼자 지어낸 말이라는 게 맞을 겁니다.

 

유표의 부인이었던 채씨가 괴월과 함께 유표 주변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사실이 아니었을 겁니다.

만약, 그런 이야기가 사실이었을지라도 유비는 거절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지요.

만약, 그 자리에서 형주를 맡아 다스리겠다는 약속을 덥석 했더라면 바로 채모를 위시한

그 주변 사람이 심어놓은 자객에게 바로 칼을 맞고 저세상으로 갔을 겁니다.

그러니 정확하게 말하면 만약, 그런 말을 유표가 했더라도 안 받은 게 아니라

못 받았다는 게 정설일 겁니다.

 

조조는 관도대전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북방을 안정시켰고 그다음 항상 서북쪽 뒤가 불안했던

서량마저도 안정시키고 이제 눈을 남방으로 돌립니다.

그 첫 번째 목표가 바로 군사적 요충지인 형주를 공략하고 그 주변을 안정시키는 일이지요.

이곳 형주란 이렇게 운명적으로 조조가 손을 뻗고 싶은 최우선 순위의 장소입니다.

 

이를 위해 업성 주변에 큰 인공호수를 파고 그곳에서 수군을 훈련하죠.

오나라 손권도 이곳 형주의 중요성을 알기에 우선 강하라는 곳을 공략해 점령합니다.

이는 형주를 염두에 둔 근거 확보라고 봐야 할 겁니다.

 

조조가 군사를 이끌고 밀고 내려오자 형주를 물려받은 유표의 둘째 아들 유종은 얼른 조조에

투항했는데 유종은 큰아들 유기와는 배다른 형제로 채 부인이 낳은 아들이라죠.

유비요?

유비의 특기가 이때도 나오지요.

 

조조가 왔으니 목숨 부지하려고 무조건 남으로 도주를 시작합니다.

그곳은 강하라는 곳으로 이미 유표의 큰아들인 유기를 공명이 지혜를 빌려주어 내려보냈던 곳이죠.

이때 민초 10여만 명이 유비의 어진 성품을 사모(?)해 따라나섭니다.

정말 왜 따라나섰을까요?

 

공명은 유비에게 먼저 빨리 피신하라고 하지만, 유비는 여기서 또 멋진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관중의 소설을 보면 유비는 공명에 "민초가 나를 버릴지언정 내가 먼저 민초를 버리지 않겠다."

이 말은 조조가 했다는 말 "내가 천하를 배반할지언정 천하가 나를 배신하는 꼴을

보지 못하겠다."는 말과 비유해 조조는 간웅으로 만들고 유비는 덕과 인을 숭상하는

어진 사람으로 만든 말입니다.

유비는 솔직히 자기가 관리했던 지역도 없는데 무슨 민초가 있다는 말입니까?

 

조조가 들어오면 그 마을을 아주 깡그리 불살라버린다고요?

설마 그랬을라고요.

이 모든 게 작가가 쓴 소설에 불과한 이야기일 겁니다.

조조도 행군할 때 보리밭도 밟지 못하게 한 어진 사내였지요.

 

한번은 자기가 탄 말이 새가 푸드덕 날며 말이 놀라 갑자기 보리밭으로 들어갔을 때 법은

존귀한 사람에게는 적용하지 않는다고 주변에서 이야기했지만,

스스로 상투를 자르며 속죄한 적도 있는 멋진 사내였답니다.

물론 보여주기 위한 이벤트였겠지만...

 

물론, 서주에서 조조 아비가 죽자 조조는 서주를 모두 불살라버리는 그런 짓을 했지만,

그때는 아직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던 젊은 시절이었지요

그 후 그를 따르던 많은 책사가 뭐라고 하는 바람에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심지어 원소와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원소와 내통했던 수하의 이적질까지 눈감아 준

사람으로 천하가 따르지 않는 영웅은 영웅이 아니잖아요.

 

중국 모든 왕조의 수명이 짧은 이유는 워낙 지역이 넓기 때문에 지도자의 생각이

곳곳에 미치기 어렵고 그로 말미암아 지방마다 다스렸던 지도자들의 탐욕이

민심이반의 원인이었을 겁니다.

민심을 얻어야 천하를 얻는다는 말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영웅도, 천하도 필요없는 佳人은 민심을 얻기 위해 그런 일을 할 이유가 없어 좋습니다.

 

이는 작가가 유비를 미화시키기 위해 민초가 10만 명이나 유비와 함께 피난 길에 나섰다고

한 것인데 유비는 이런 난민을 이끌고 하루에 10여 리도 가기 어려운데 조조의 기마병은

하루에 100리를 거뜬히 주파합니다.

그래서 유비 일행의 후미가 당양이라는 곳에서 조조에게 잡히게 되지요,

 

여기서 유비의 훌륭한 전법이 나옵니다.

이는 유비 외에는 잘하는 사람이 별로 눈에 띄지 않습니다.

가족이고 뭐고 다 버리고 혼자 도망하기요.

 

물론 성공적으로 도망합니다.

가족까지 버리며 도망갈 사람이 민초를 버릴 수 없어 함께 가겠다고요?

이 얼마나 작가의 상상력이 빛나는 말입니까?

 

부인도 그리고 오직 하나뿐인 아들 아두도 모두 버리고 말입니다.

그때 조자룡이 조조의 군사 속을 헤치고 아두라는 유비의 아들을 구해오고 장판파에서 장비가

조자룡을 마주하고 따라오는 조조군을 향해 "내가 장익덕이다, 나와 겨루고 싶은 장수가 있다면

이름부터 대고 나와라!" 라고 소리친 사건이 있었던 곳이 바로 이 부근이라고 합니다.

 

그 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장판파 다리가 무너지고 물이 역류했다 합니다.

동시에 쫓아오던 조조군의 하후걸은 그 목소리에 쫄아서 말에서 떨어져 즉사했다 합니다.

지금 비웃고 계시죠?

다 압니다.

 

그 후 오나라 노숙은 유표를 문병한다고 찾아왔지만,

이미 유표가 죽었고 조조의 군사가 밀고 내려온다는 소식을 중도에서 듣습니다.

사실 문병이라고 했지만, 문병을 빙자한 정세탐색이지요.

조조군은 남쪽인 강릉으로 내려가고 노숙은 유비에게 오나라의 도움을 받으라고 하며

동쪽으로 함께 가게 됩니다.

정말 착한 노숙입니다.

 

그 후 주유와 조조가 싸울 때 형주성을 지키던 조인이 성을 비우고 싸우러 나간 사이

유비가 냉큼 들어와 주인행세를 합니다.

이는 남의 물건을 그냥 슬쩍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일이 아니겠어요?

유실물은 아니고... 뭐라 해야 하나요?

네덜란드의 크라커지요.

 

유비가 형주를 취한 모습을 보고 두 거대한 세력이 용쟁호투를 벌이고 있을 때 힘도 없는

유기견 한 마리가 어디서 몰래 숨어 제대로 숨도 쉬지 않고 지켜보다가 용과 호랑이가 잠시

한눈파는 사이 잽싸게 나타나 둘 사이에 놓여있던 개뼈다귀를 물고 꽁지가 빠지라

도망간 형국이라 하지요.

물론 유비야 물어보면 아니라고 하겠지만...

뭐라고?

자기가 했으니 불륜이 아니고 로맨스라고...

 

유비는 여기서 형주를 취한 모습을 조조는 비겁한 개로 취급하기도 한 곳입니다.

그러나 욕이 어디 배째고 들어옵니까?

개 취급당하고 돼지 취급당하면 어떻습니까?

돗자리 팔던 사람이 황제의 길로 나아가는데 그 정도 욕은 천 번도 더 먹어도 좋습니다.

 

유비는 때로는 이렇게 욕을 먹으면서까지 비겁하지만, 프랜차이즈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바로 형주가 유비가 처음으로 지역할당을 받고 연고지 팀으로 당당하게 게임에 나서게 되고

삼분 천하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는 희망과 꿈과 꿀이 샘솟는 약속의 땅인 셈입니다.

 

나중에 돌려달라는 오나라의 청을 수차례나 모르쇠로 일관하지요.

때로는 눈물로 버티고, 각서도 쓰며 마지막 관우에게 맡기면서도 돌려주라고 해도 관우가

안 된다고 하고... 그러나 이곳을 지키던 관우가 죽는 바람에 장비도 유비도 모두 한꺼번에

죽어버리는 불행의 씨앗도 바로 형주가 되는 셈입니다.

 

 징저우(荊州)는 이렇게 관우와 인연이 깊은 곳입니다.

관우는 10년 동안 이곳의 태수로 지내면서 형주성의 기틀을 닦고 백성을 다스렸던 곳입니다.

1.800여 년이 지난 지금 징저우에는 아직도 관우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습니다.

징저우 고성 남문에 입구에 가면 관우를 모셔놓은 사당 관제묘(關帝廟)가 있습니다.

 

여기 관제묘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져 더는 걸어서 시내 구경한다는 일이 쉽지만

않고 관제묘도 사진처럼 닫혀있네요.

워낙 관우가 있을 때 10년간은 전쟁이 없다 보니 주민 모두가 관우를 좋아해 이곳에는

본래 관제묘가 6개나 있었다는데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이 또한 화재나 훼손으로 모두 사라지고

지금은 여기 한 곳만 남아있다고 합니다.

 

이곳 관제묘는 과거 관우가 10년간 형주성을 지켰을 당시에 관우의 관저가 있던 터라고

알려졌고 관우가 죽은 후 징저우 사람들은 관우의 충의를 기념하기 위해 이곳에 사당을 짓고

관제묘라고 불렀다 하네요.

그러나 이 또한 관우를 좋아하는 사람의 말이지 사실 관우가 여기를 떠날 때 징저우 젊은이를

군사로 선발해 나갔다 여몽에 함락했던 징저우를 다시 찾기 위해 이리로 돌아와 전투하려 했을 때

성안에 주민과 관우의 군사는 모두 형제, 남매일 뿐 아니라 부모와 자식 사이로

골육상잔의 전투가 아니었나요?

골육상잔의 전투를 하라고 한 관우가 이곳 주민의 존경을 받아요?

 

남문까지 성벽을 따라 걷다 보니 이제 징저우의 밤이 깊었습니다.

숙소로 돌아가려면 북문으로 나가 버스 터미널 부근으로 가야 합니다.

대강의 방향을 설정하고 마냥 북으로 걸어 올라 갑니다.

 

원래 이렇게 많이 걷지 않고 일부만 보고 내일 보려고 했지만, 걷다 보니 밤이 늦도록 걷게되고

형주 성을 대부분 돌아보았기에 내일은 그냥 다른 곳으로 이동할까 봐요.

오늘은 여기서 코~ 자고 내일은 우한으로 이동하렵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전략적 요충지인 장저우 성을 빼앗기고 관우 장비와 같은 아우를 모두 잃은 유비는

무리수를 두게 되어 동오를 공격하다 이릉전투에서 육손의 화공을 받고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고 이때부터 이미 촉한은 패망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던 것입니다.
그만큼 이곳 징저우는 촉한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요충지였던 겁니다.

이 중요한 곳을 그래도 가장 믿을 수 있는 관우에게 맡겼으나 관우는 그만 오만한 생각에

경솔하게 행동함으로 자신은 물론 도원삼결의를 했던 사람을 하나씩 모두 물귀신처럼

데려갔으며 끝내 촉한이 위나라에 패망하는 아픔을 겪게 되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