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주성은 중원의 배꼽

2014. 7. 2. 08:00삼국지 기행/삼국지 기행

오늘도 고즈넉한 징저우 성벽 위를 걷습니다.

징저우를 중원의 배꼽이라 부른답니다.

여기가 그만큼 중요한 거점이 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징저우라는 곳은 삼국연의라는 이야기에 수없이 등장한 곳으로 삼국지에 심취한 사람은

누구나 와보고 싶은 곳일 겁니다.

그러나 삼국지에 별 관심이 없는 분이시라면 크게 볼 게 별로 없는 곳이기도 하겠지요.

 

삼국지의 시작 무렵 이 지역은 황족인 유표가 다스리던 지역이었습니다.

유비의 종친 말입니다.

그러다 유표의 건강도 좋지 않았고 후계구도와 맞물려 모친이 없는 장자 유표가 밀리며

징저우는 급류에 휘말리듯 그만 조조의 세력속으로 들어갔다가 적벽대전 이후 동오와 조조의

싸움에 유비가 슬쩍 집어삼키고 주인 행세하며 제법 오랜 기간 관우가 여기의 수장으로 있었지요.

 

그때는 한 치 앞을 예단할 수 없는 급박한 상황이었겠지만, 오늘은 아주 한적합니다.

佳人 혼자서도 징저우 성을 접수하고 돌아다닙니다.

동서 3.75km, 남북 1.2km, 면적 4.5㎢. 성벽 둘레 10.8km로 네모 반듯한 성곽은 아닌 곳입니다.

이곳 징저우 고성(荊州古城 : 형주고성)을 찾는 사람 대부분은 성벽을 따라

한 바퀴 도는 유람차를 타고 구경합니다.

 

그러나 우리 부부처럼 그냥 두 발로 걸어서 구경하는 게 더 좋습니다.

유람차는 성벽 아래로 난 길만 따라 돌지만 이렇게 우리 부부처럼 걸어서 구경하면 성벽

위아래를 모두 돌아볼 수 있고 안팍도 구경하고 걸어가며 느낄 수 있는 다른 많은 게 따로 있잖아요.

이런 성벽 투어의 경험이 오래도록 우리 기억에 남게 하는 역할을 하더군요.

 

이곳 징저우는 당시 유비를 흠모(?)해 따라온 유민이 이곳 징저우에 살았던 주민과 어울려

살았다 하고 유비는 천하를 버릴지언정 나를 따르는 민초는 버릴 수 없다고 했던가요?

조조는 내가 천하를 버릴지언정 천하가 나를 버리는 꼴은 용납 못한다고 했고요.

누가 솔직한 인간입니까?

 

그리고 유비가 익주로 떠난 후 관우가 이곳을 10여 년간 다스리며 관우를 따랐다 하지요.

그리고 이곳 주민의 병사를 이끌고 징저우 성을 벗어난 관우는 동오에 뒤통수를 맞고

이제 그 운명이 촌각에 달렸습니다.

 

그게 바로 여몽의 봉화대 무력화 계략에 말려 징저우를 빼앗기며 점점 관우의 숨통이 죄어 옵니다.

여몽 이전에 주유는 또 얼마나 이곳에 집념이 강했습니까?

조조와 혈투를 벌이며 동오의 젊은 피를 댓가로 간신히 제압하고 성에 들어오려는 순간

먼저 유비가 성에 들어와 기를 높이 꽂고 자기 땅이라 하니 말입니다.

 

이때 독화살을 맞고 시름 거리며 아프기 시작해 결국, 그의 목숨도 얼마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젊은 기재인 동오의 주유는 목숨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마지막으로 중얼거립니다.

"하늘은 이미 주랑(周郞)을 낳았거든 공명(孔明)은 왜 또 낳으셨단 말인가?"라며 자신의 운명을

원망하면서 숨을 거뒀다 합니다.

사실, 하늘이 주유를 낳은 것은 아니고 주유 어머니가 주유를 낳았지 싶습니다.

 

사실 주유와 제갈량은 한배를 타고 조조와 대적한 동지이자 숙명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고 서로가 흉금을 털어놓고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서로 간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두 알고 있을 그런 처지였으며 그중에 두 사람을 하나로 묶은 것이 바로 황개의 고육지계

(苦肉之策)와 방통의 연환지계(連環之計)를 이용한 화공으로 적벽에서 조조군을 무찌를 계책을

공명이 주유에 속뜻을 확인시킨 시 한수가 있었지요.

 

欲破曹公(욕파조공) 조조를 깨뜨리려면
宜用火攻(의용화공) 마땅히 화공을 써야 하리
萬事俱備(만사구비) 모든 걸 갖추었으되
只缺東風(지결동풍) 다만 동풍이 없구나.

 

여기서 화공까지는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했는데 주유는 여기서

그만 병이 나 드러 누워 버립니다.

왜?

화공에 어떻게 성공하느냐는 방법에서 막힌 것이지요.

그러나 공명은 동풍을 부르는 신기를 보였잖아요.

이러니 주유가 하늘을 보고 원망했을 겁니다.

 

제갈량은 남병산에 칠성단을 쌓아주면 동짓달 스무날 갑자일부터 세 밤 세 낮 동안 거센

동남풍을 불게 하겠다고 했고 공명은 그 약속대로 동풍을 불러 주유를 더욱 빛내주는 일을

했지만, 그러나 주유는 오히려 이런 공명이 더 무섭게 느껴져 죽이려 했지요.

 

이렇게 하늘이 잘못 시기를 택해 내린 젊은 천재 주유는 서른여섯의 한창나이에 요절해

버리며 아름다운 소교를 세상에 그냥 버려둔 체...

이제 젊은 손권은 동오의 앞날을 걱정하는 처지였지만,

주유는 후임으로 자경인 노숙을 천거합니다.

 

이제 주유를 이어 동오에 노숙이 그 바톤을 이어받아 등장하지요.

개인적인 생각으로 佳人은 노숙을 무척 좋아합니다.

그의 말이나 행동을 보면 무척 합리적이고 무리하지 않고 순리에 따르려고 합니다.

 

노숙이 그렇게 뻔질나게 여기를 찾아와 징저우를 돌려달라고 했지만, 유비는

요 핑계 저 핑계에 각서까지 써주며 버텼고 나중에 관우는 이곳은 내 책임하에 지킨다고

먼저 유비가 했던 돌려주겠다는 약속은 모르쇠로 일관했지요.

유비가 손권에게 써준 징저우 임시 사용 각서도 공증이 없다고

법률적으로 무효라 우기면서 말입니다.

신의를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했던 유비가 말입니다.

정말 후안무치한 행동이 아닐 수 없지만, 유비로는 그게 유일한 방법으로 사실 중간에

일했던 노숙의 도움을 많이 받은 셈이지요.

 

유표가 사라지며 사실 어느 사람의 땅도 아닌 곳이 되어 동오는 적벽대전의 승리로

안심하고 접수하려 했지만, 공명의 깜짝쇼에 위나라 군은 성을 비우게 되어 유비가 차지한

곳이되었디요.

그러나 사실 유표의 아들 유기가 살아있으니 유기의 땅이지만, 유비가 대리했다고 봐야

하겠지만, 유비는 이곳 징저우를 갖은 모욕과 수모를 당하면서 개 같은 놈이라는

비아냥도 들어가며 버티고 결국, 지켰습니다.

 

왜?

유비가 삼고초려를 할 때 공명이 유비에게 일러준 천하 통일의 첫걸음은 바로

징저우부터 차지하라 했으니까요.

그런 징저우를 관우는 쉽게 비우고 다른 짓을 하다가 노숙의 뒤를 이어 동오의 대도독이 된

여몽에게 빼앗기고 말았지요.

사실, 여몽이라기 보다 육손의 계책을 여몽이 그대로 받아들여 했지만 말입니다.

 

이제 조조도 군사를 이끌고 형주를 다시 찾기 위해 관우를 사냥하러 남으로 움직입니다.

정말 진퇴양난입니다.

북에서는 조조가 위나라 군사를 끌고 내려오고 남쪽에서는 이미 여몽이 관우의 본거지와 같은

가장 중요했던 징저우 성을 차지했으니..

 

제일선에 있던 관평이 서황이 이끄는 조조군에 무너지고 이어 요화까지 요새를 빼앗기고

말았고 둘은 겨우 몸을 피해 관우가 있는 번성으로 피했으나 이어 밀어닥친 위나라 대군 앞에

관우도 역부족입니다.

결국, 번성을 버리고 양양 방면으로 피신하는 꼴이 되었네요.

 

그것도 성 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길거리에서 노숙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공명의 지시대로 여기 징저우만 지켰더라면 큰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 텐데 공연히

힘자랑한다고 집 떠나 생고생하고 징저우까지 여몽에게 빼앗기고 말았네요.

오늘 佳人 혼자 이곳 형주성을 지키고 있습니다.

 

진퇴양난이 되었습니다.

앞에는 오나라, 뒤에는 위나라...

여기 징저우라도 지켰더라면 요새와 같아 적도 함부로 넘보지 못할 텐데...

징저우 성은 지금 여러분이 보시는 것처럼 난공불락입니다.

적은 병사로 대군을 맞서 싸울 수 있는 그런 요새이거든요.

 

여기서 조조는 큰 결심을 합니다.

관우를 쫓는 일을 멈추는 겁니다.

그 이유는 징저우를 빼앗긴 관우가 오나라와의 결전에 최선을 다할 것이기에 가만히 두면

오나라에도 타격을 줄 수 있고 관우도 타격을 입을 수 있기에...

이이제이라고 봐도 되겠습니까?

역시 조조다운 발상이 아닐 수 없네요.

 

그러면 가만히 앉아 두 세력이 치명타를 입고 비틀거릴 때 그냥 크게 힘들이지 않고

모두 제압할 수 있는 게 아니겠어요?

조조는 이렇게 병법과 전투에 임하며 나아갈 때와 기다릴 때와 물러설 때를 분명히 아

는 병법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관우를 아끼는 마음에 차마 관우의 숨통을 조이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조조의 계책은 정확했고 그대로 진행됩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이 전개되니 관우의 군사는 밤만 지나고 나면 줄어듭니다.

왜?

현재의 전황을 병사들이 먼저 알기 때문이지요.

익주의 유비에게 군사지원을 요청했지만, 그곳이 가까운 곳입니까?

 

드디어 관우는 징저우 탈환을 위해 출진하게 되고...

이는 지키라는 지시를 어긴 일이기에 마음만 더 급해져 사리분별이 어려운 상황으로 빠져들어

가는데 도둑이 들려면 개도 짓지 않는다 했습니까?

 

평소와는 다르게 관우는 서두르고 자괴감으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벌이고 있는

겁이고 게다가 관우가 이끄는 병사 모두는 징저우 출신입니다.

그러니 징저우 성 안에 남은 가족 때문에 제대로 전투가 가능하겠어요?

가족이 있는 징저우 성을 어떻게 불화살을 쏘며 공격할 수 있겠어요.

다른 지역의 병사로 공격하기 전에는 관우가 아니라 관우 할애비가 와도

징저우는 공략할 수 없는 곳입니다.

 

무모한 짓입니다.

그나마 도망하지 않았던 병사도 모두 전투를 거부하니 관우도 더는 싸울 의욕조차 없습니다.

할 수 없이 근처에 버려두었던 맥성으로 일단 후퇴를 하니 관우를 따르는 병사가

겨우 500여 명뿐입니다.

천하의 관우가 이렇게 그 해가 질 무렵은 초라한 모습으로 변해갑니다.

 

주변의 지원군을 요청하려니 이미 맥성은 오군에 두 겹 세 겹 둘러싸여 이제는 방법조차

없으며 오직 하나 방법이 있다면 헬리콥터를 불러 타야만 빠져나갈 수 있겠네요.

여기에 요화가 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야음을 틈타 간신히 빠져나가 근처의 상용을 지키고 있는

유봉과 맹달에 원군을 청하러 갔으나 그곳에서 하는 말이 한 잔의 물로

마차의 불을 끌 수 없지 않으냐고 합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이미 대세는 기울어 지금 지원 나간다 해도 찻잔 속의 미풍일 뿐입니다.

 

그 말도 틀린 말이 아니죠.

오군과 위군은 대군이 집결해 있으니까요.

요화는 할 수 없이 익주로 말을 몰아 구원을 요청하기 위해 먼 길을 떠나고...

이런 일은 할 수 있는 일이 없기에 하는 방법이지요.

 

관우는 연락조차 없는 지원군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식량도 바닥을 보이고 하룻밤만 지나면 오백 명의 군사가 반으로 줄어듭니다.

이제 방법은 이곳 맥성을 탈출하는 방법 외에는 길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여기에 여몽이 친 덫에 관우가 걸려들지요.

제일 허술하게 북문을 비워주고 주연으로 하여금 5천의 병사를 북쪽 20리 떨어진 곳에 매복을

시키니 주창과 왕보만 소수 군사를 데리고 성에 남아있고 관우가

야밤을 이용해 성을 빠져나갑니다.

 

이게 관우가 살아서 스스로 했던 마지막 일이었습니다.

천하의 관우가 정말 비참한 모습으로 도망합니다.

결국, 여몽이 친 덫에 걸려들어 아들 관평과 함께 포로가 되고 만 것이죠.

건안 24년 10월 낙엽마저 핏빛으로 물든 아름다운 가을날.

 

떨어지는 낙엽처럼 관우 부자의 목이 떨어지고 만 겁니다.

스스로 죽기를 원한 관우는 이렇게 허망하게 생을 마감했네요.

이때 관우 나이 58세...

마지막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는 공명이 징저우는 지키라고 신신당부하던 말...

그 말이 자꾸 귀에 맴돌며 울고 싶은 심정이었을 겁니다.

 

이 소식을 들은 맥성의 두 장수 왕보는 성벽 위에서 아래로 몸을 던져 자결했고 주창은

칼로 목을 찔러 자결함으로 마지막 남았던 맥성마저 오군의 손에 떨어지니 형주와 양양 일대는

모두 오나라의 영토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관제묘를 찾아가 보면 왕보와 주창은 언제나 관우 좌우에 자주 보이나 봅니다.

이로써 오랜 시간 안면 몰수하고 버텼던 촉의 형주지방은 이제 새주인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나요?

 

그러나 신기한 일이 연이어 일어납니다.

관우의 적토마는 식음을 전폐하고 굶어 죽었고 관우의 목을 치라고 명령을 내린 여몽은

관우가 죽은 지 두 달 만에 이유도 모르게 피를 토하고 죽는 미스터리가 연이어 일어납니다.

 

그것뿐인가요?

유비의 복수를 두려워 한 나머지 손권은 관우의 목을 소금 상자에 넣어 조조에 보냈고

이를 받아본 조조가 상자 뚜껑을 열어본 순간 죽었던 관우가 눈을 번쩍 뜨며 "써프라이즈"라고

하는 바람에 조조도 그만 병석에 누워 시름거리다가 죽었다는 비공인 소문도 있습니다.

 

조조도 오의 간교한 계략을 눈치챘기에 죽은 관우를 형주왕에 봉하고 성대하게 향나무로

몸을 만들어 목에 합체한 후 100일 동안 음주 가무도 금하고 장제는 왕후의 예로 갖추고 문무백관이

모두 참석한 국장으로 성대한 장사를 치러 그 묘가 지금 뤄양에 있는 관제묘가 되었지요.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일은 인간이 도모하지만, 그 결정은 하늘이 정한다 했나요?

조조가 이렇게 관우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보낸 것은 손권의 계략을 눈치챈 것도 있겠지만,

사실 관우를 무척 좋아했기 때문일 겁니다.

조조가 관우를 향한 사랑은 대서양을 넘어 인도양을 건너 무조건 무조건이잖아요.

 

관우가 육손의 계략에 당했고 유비도 육손의 전략에 당하고 장비야 제풀에 자빠졌으니...

결국, 유관장 삼 형제는 백면서생이라는 육손에 어이없이 농락당한 셈이네요.

결국, 세 사람의 머리는 육손의 지혜에는 먼발치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현실에 무척 슬펐을 겁니다.

오늘 관우는 이곳 형주성을 바라보면 울고 싶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