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은 오늘도 흐릅니다.

2014. 6. 9. 08:00삼국지 기행/삼국지 기행

 

2012년 11월 23일 여행 36일째

 

아침에 눈을 뜨니 배는 여태 장강을 따라 흘러내려 갑니다.

이제 오늘 우리는 이창에 도착할 겁니다.

투어를 하지 않으면 장강 유람은 그리 유쾌하지 못하고 지루합니다.

더군다나 날씨 또한 운무로 맑지 못해 풍경도 꽝입니다.

 

오늘 도착할 이창이라는 도시는 삼국지가 막바지로 치닫던 시기에는 이릉이라고 불렀고 유비가

관우의 복수를 하겠다고 촉한의 대군을 이끌고 이곳까지 내려왔다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패배를 하며

유비마저도 이릉전투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장강이 굽어 보이는 백제성에 머물다 죽었던

전투가 벌어진 곳입니다.

 

유비에게는 천추의 한을 남기 곳이 이릉일 겁니다.

최고의 복수는 용서라 했습니다.

용서만큼 강력한 응징은 없습니다.

그러나 유비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응징을 선택하려다 오히려 제 눈만 찌르고 말았습니다.

 

장강 유람이 낭만으로 생각되어도 날씨가 좋지 않고 중간마다 투어를 하지 않으면 지루합니다.

투어를 한다고 해도 우리 눈에는 그게 그 모습으로 비춰질 수 있기도 하고요.

배 안에서는 갈 곳이 뻔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바쁜 여행 중에 이런 시간을 갖고 생각을 정리하고 이야기 소재를 찾아보는 일도 좋습니다.

강을 따라 이동하는 배를 살펴보면 참 다양한 배가 오르내립니다.

 

그리고 장강을 끼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이 빨래하는 날인가요?

중국 빨래터에는 여자만이 아니라 남자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통큰 빨래터가 아니겠어요?

작은 개울물이 아니라 장강에 빨래를 하니 말입니다.

 

그들의 삶이 우리보다는 남녀의 구별이 적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타고 온 배는 이렇게 장강을 따라가며 중간마다 장강 변의 도시에 정박하고 승객을 내리고 태웁니다.

우리가 타고 가는 배는 유람선이 아니라 저렴한 여객선이기 때문이죠.

아침에 배에서 내려 짐 보따리를 바리바리 싸들고 고향집을 찾아가는 저들의 뒷모습으로 바라보니

갑자기 佳人도 집에 가고 싶습니다.

 

짐의 종류도 참 다양합니다.

배를 가까이 댈 수 없는 마을은 이렇게 부교를 설치하고 내리고 태웁니다.

날씨가 더운 곳인가 봅니다.

선풍기를 든 사람이 여럿 보입니다.

이 동네 최고의 고향선물은 선풍기인가 봅니다.

 

장강을 따라 이렇게 죽은 자의 무덤도 보입니다.

그런데 죽어서도 큰 집에 살고 싶었나 봅니다.

무덤의 크기가 20평형 아파트 크기만 합니다.

저 무덤 속에 조조의 군사도, 유비의 군사도 있을까요?

여기는 아주 죽은자의 동네인가 봅니다.

 

이렇게 산 자는 또 하루를 열심히 살아가고 죽은 자는 살던 곳에서 흘러가는 장강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누워있나 봅니다.

살아서도 장강과 함께 살았고 죽어서고 장강을 떠나지 못하나 봅니다.

결국, 산 것과 죽은 것은 시간의 차이뿐 결론은 같다는 말입니까?

 

산비탈을 따라 제법 규모가 큰 마을이 생겼습니다. 

옛날에는 수위가 낮아 강변에 살았겠지만, 싼샤댐이 만들어지며 수위가 올라가며

이렇게 산꼭대기로 올라가 사나 봅니다.

가파른 비탈에 집을 짓고 사는 중국은 땅이 넓은 나라지만, 인구 또한 많기에

살아가는 터전이 만만하지는 않나 봅니다.

 

오늘은 적벽대전에 조조가 100만 대군을 이끌고 왔다고 해 한번 묻고 따져보려고 합니다.

전투에 참전하는 군사가 많으면 우선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인구로 볼 때...

 

그리고 군량미나 전투에 필요한 물자수송의 여건으로 볼 때 과연 100만 명이나 되는 많은 군사가

참전할 수 있었을까에 의문을 두게 됩니다.

당시의 교통여건이나 운송수단은 지금과는 많아 달라 무척 열악했을 것 아니겠어요?

왜 세상을 살아가며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쓸데없는 것을 따지냐고 물으시겠지만,

원래 佳人은 이렇게 쓸데없는 짓을 평생 하고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물론, 100만 명이 모두 배를 타고 오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많은 군사가 배를 타고 왔다고 보면 장강은 군사를

실은 전선으로 교통체증이 일어 교통정리를 위한 공안을 배치하고 신호등을 설치해도 해결할 수 없었을 겁니다.

중국은 아직 교통신호를 준수한다는 마음이 없는 민족이잖아요.

오죽하면 고속도로에서만이라도 역주행을 하지 말자는 캠페인을 벌일까요.

 

지금 위의 사진을 보시면 장강을 관리하는 공안 사무실도 있고 주유소도 있습니다.

우리 한강에도 수상경찰이 있고 여름철에 해수욕장마다 해변경찰서가 설치되더군요.

 

우리나라 사람이 많이 구경하는 시엠립의 톤레삽 호수에도 수상경찰이 있고 주유소에 슈퍼마켓,

그리고 학교도 있습니다.
아무리 물 위라 해도 그곳에 사람이 많이 모여 살면 우리가 사는 동네나 마찬가지가 되고

또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생기게 마련이 아니겠어요?

여기 장강에도 주유소 배가 있습니다.

 

장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로 걸어서 건너는 사람도 보이네요.

저 다리 위를 걸어 건너는 일은 아찔한 경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100만 대군 이야기를 계속하렵니다.

우선 가장 중요한 먹는 문제를 생각해 봅니다.

당시의 사람은 현대인과는 달리 무척 밥을 많이 먹었을 겁니다.

고증에 의해서도 옛날 사람의 밥그릇은 현대인의 두 배고 그 양도 수북이 올려 담을 정도였다니까요.

더군다나 덜수같은 병사는 오랜 행군과 전투는 순전히 밥심으로 싸웠을 테니까요.

 

군사를 잘 먹이는 장수가 유능한 장수였고 이게 잘못되면 전투도 하기 전에 패하고 말잖아요.

우리가 공명의 일차 북벌에서 실패한 가정전투에서 마속이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산 위에 진을 침으로

산 아래를 봉쇄당해 물을 구할 수 없어 밥을 먹이지 못해 결국, 전투다운 전투도 해보지 못하고

가정을 빼앗기고 말았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먹이지 못하면 밤만 되면 군사는 삼배 바지 방귀 새듯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지잖아요.

 

얼마 전까지 우리도 하루에 700g의 쌀이 정량이라 했습니다.

당시의 사람은 하루에 통상 1.000g 이상의 쌀을 소비했을 겁니다.

적게 잡아 그렇다는 말입니다.

지금은 700g도 제대로 먹지 않을 겁니다.

 

왜?

원래 옛날 사람의 식사량은 우리의 두 배도 넘었다고 하니까요.

그 이유로는 밥 외에는 달리 먹을 게 많지 않았다 합니다.

지금은 밤 말고도 먹을 게 무척 다양하고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당시는 주로 힘만 쓰는 육체노동만 했던 시절이라 식사량이 우리가 상상한 이상이었을 겁니다.

살아가는 일이 육체노동이었고 특히 전쟁을 치르는 병사에게는 물어보나 마나가 아니겠어요?

힘을 쓰려면 그 칼로리는 밥으로 보충해야 했고 자연히 많이 먹어 위가 커져 위~ 대한 사람이 되었을 겁니다.

 

아주 쓸데없는 이야기는 내일도 계속 하렵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장강은 오늘도 유유히 흐릅니다.

세상의 영웅이라고 했던 사람이 이 장강을 수없이 지나갔을 겁니다.

장강은 옛 강이지만, 물은 옛 물이 아닌가 봅니다.

그러나 오늘 佳人도 이 강을 지나갑니다.

이런 길을 지나가며 佳人은 역시 쓸데없는 이야기만 하는 소인에 불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