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의 효정(猇亭)고전장

2014. 6. 18. 08:00삼국지 기행/삼국지 기행

 

2012년 11월 24일 여행 37일째

 

오늘은 드디어 삼국지에 나온 3대 전투장 중 한 곳인 이릉전투가 벌어졌다는

효정(猇亭)고전장이라는 곳을 구경합니다.

이곳은 예전에 삼국지연의를 읽는 도중 어떤 곳일까 무척 궁금했던 곳이었습니다.

이릉전투에 대해서는 내일 다시 알아보고 오늘은 효정 고전장을 먼저 구경합니다.

터미널 부근의 숙소에서 이곳으로 가는 방법은 시내버스 103번을 이용하면

바로 경구 문 앞에 세워줍니다.  (2원/1인) 정말 쉽죠?

 

 시내에서 효정 고전장 경구 입구까지 거리가 제법 멀고 버스로 50분 정도 걸리네요.

9시에 도착해 들어가려니까 입구가 너무 낡아 귀신이 나올 것 같습니다.

왜 아니겠어요.

그 옛날 여기에서 촉한의 유비가 이끌고 온 많은 사람이 불에 타죽었기에 고향이 멀어

돌아가지 못해 구천을 떠도는 촉한의 귀신이 많을 겁니다.

 

유비를 따라 함께 이곳으로 온 익주의 병사는 유비가 혼자 살겠다고 백제성으로 도망가는

바람에 이곳에 떨어져 집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귀신이 되어 이곳을 떠돌고 있을 겁니다.

촉한의 귀신뿐 아니라 이곳은 지형적으로 방어와 수비가 용이한 곳으로 그 후에도

 여러 전투가 벌어지며 많은 사람이 죽은 곳이기에 귀신이 많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입장료가 40원에 반표는 20원입니다.

중국의 관광지 입장료치고는 무척 저렴하죠?

저렴하다고 하면 뭔가 내용이 부실하다는 말일 겁니다.

버스는 입구를 지나 잠시 언덕을 올라 후문에 내려주는데 지금 정문은 수리 중으로

이곳 고전장 경구 자체는 무척 낡아 전면적인 보수를 하는 중인가 봅니다.

 

후문 입구로 들어가면 우선 앞에 큰 누각이 보입니다.

관우를 모신 곳이라 합니다.

관우는 뭐가 잘나 이렇게 여기에다도 만들어 놓았을까요?

이 모든 사건이 관우로부터 시작되지 않았나요?

그곳에 있는 아가씨가 자꾸 들어오라 합니다.

"왜 그래~ 아가씨! 난 유부남이야~"

 

이유는 관우상에 절하고 돈을 내라는 말인가 봅니다.

방명록을 내밀어 읽어보니 가끔 한글도 보입니다.

관우가 佳人에 절을 하면 절값으로 돈을 낼까 몰라도 내가 절하고 또 내가 돈도 낸다고요?

관우가 뭘 잘했다고 여기다 모셨나요.

관우 한 사람의 잘못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고 한실의 부흥이라는 꿈마저 불살라졌잖아요.

서천의 젊은이가 이곳에서 얼마나 많이 죽었습니까?

관우라는 사람 때문에...

 

이곳 효정산 고전장 앞으로는 장강이 유유히 오늘도 흘러갑니다.

물론 여기는 삼협을 지난 물이 싼샤댐도 지난 곳입니다.

여기서 조금만 아래로 내려가면 그 유명한 형주성이 있지요.

 

풍광도 좋습니다.

오늘은 적벽대전이라도 벌어지나요?

무척 많은 배가 강 위에 보이네요.

 

효정 고전장은 위의 사진에서 보시듯이 장강이 흐르는 곳에 험준한 절벽에

잔도를 만들어 왕래할 수 있는 곳입니다.

강변은 평탄하나 이곳에 이르면 바로 사진처럼 산이 불쑥 솟아올라 쉽게 지날 수 없는

곳으로 삼협을 통과한 장강이 이창을 지나며 남으로 흘러 이곳 효정산을 지나

다시 동으로 흐르며 징저우를 지나고 우한에 이릅니다.

이릉에서 이곳만 지나면 바로 그렇게 원했던 형주도 코앞입니다.

 

험준한 삼협을 지나 막 평지로 나가려는 곳으로 이곳만 틀어막으면 통행이 어려운 곳이라

하며 물론 지금이야 여러 곳으로 고속도로며 기찻길이 생겼지만, 옛날에는 이 길이

바로 촉한에서 징저우로 가는 길목인 숨통과도 같은 곳이라 생각됩니다.

 

여기가 바로 육손이 유비를 막기 위해 마지막 보루로 여긴 곳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여기가 무너지면 형주는 바로 촉한에 떨어지고 동오의 운명은 바람앞에 등불과도 같은 신세가

되기에 위의 사진처럼 좁은 잔도를 통과해야 하기에 정말 수비하기에는

이만한 곳도 드물지 싶습니다.

좁은 잔도 외에는 길이 없기에 아무리 많은 군사가 온다고 해도

크게 의미를 부여하기 어려운 지형입니다.

 

그 뒤로 삼우원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유관장 삼형제를 모신 곳인가 보네요.

전기불도 켜지않고 컴컴한 곳에 삼형제가 숨어서 무얼 하시나 모르겠습니다.

부끄러워 숨어 있나요?

 

그 뒤로는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의 도원결의를 한 모습을 재연해 놓았지요.

그런데 관리하지 않아 부서지기 일보 전입니다.

이런 곳은 그냥 이야기 속에서 중요한 곳이지 볼만한 곳은 없는 곳이지요,

전쟁이란 풍경 좋은 곳에서는 하지 않나 봅니다.

 

처음 이곳을 단장해 문을 열었을 때는 하루에도 수만 명의 많은 사람이 몰려와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찾는 이 아무도 없는 그런 곳이 되었네요.

그러나 오히려 유비에는 패전의 장소이기에 이런 모습이 더욱 어울린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역사적인 이야기만 남은 곳으로 볼 곳은 별로 많지 않은 곳이죠.

적벽대전이 있었던 곳도 그렇고 오장원도 가보면 실망뿐입니다.

원래 전쟁이란 게 모두 쓸어버린 곳이기에 이야기 속으로의 여행이 아니겠어요?

풍광이 뛰어난 곳은 전투가 벌어지면 집중력이 떨어져서 일까요?

 

울 마눌님마저도 구경하지 않고 문표 파는 아가씨와 입구에 머물겠다고 하네요.

삼국지에 관심이 없기에 혼자만 들어와 구경합니다.

경구 안에는 일하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없어 혼자 전세를 내 돌아보았습니다.

중국 여행을 제법 다녔지만, 여기처럼 혼자 전세내고 구경한 곳이 별로 없었습니다.

위의 사진 속의 잔도는 백만 명의 군사가 닥친다고 해도 외줄로 통과해야 하기에

육손은 이곳에 진을 쳤기에 유비를 막을 수 있었겠네요.

 

역시 장강 기슭에 절벽을 파낸 좁은 잔도만 있는 험준한 곳입니다.

강을 따라 움직이던가 산길로는 좁은 잔도 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강 위로 그때 만들어 군사가 겨우 한 줄로만 이동했을 좁은 잔도가 보입니다.

지금은 안전을 위해 난간을 만들어놓았지만, 그때는 안전장치도 없었을 겁니다.

 

옛날 군영의 모습으로 시멘트로 지었습니다.

중국은 이미 삼국이 패권을 다투던 시기부터 시멘트가 있었나 봅니다.

하늘이 내린 공명 같은 사람이 당시 있었으니...

 

관우의 큰아들 관흥이나 장비의 장자인 장포가 사용한 병영이라고

뻔뻔스럽게 적어놓았습니다.

물론 그런 형태라는 말이겠지만...

 

효정고전장 안에서 가장 깨끗하고 관리가 잘된 고령백탑입니다.

이곳은 군사적으로 고대로부터 무척 중요한 보루였나 봅니다.

진나라 때부터 청나라 시기까지 모두 여덟 차례나 전투가 이곳에서 벌어졌다 합니다.

 

이 말은 여기가 군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지형이라는 말일 겁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이곳을 좁은 잔도로만 통과해야 하니 방어하는 처지에서는

지키기 무척 쉬운 곳이 아니겠어요?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이 이곳에서 죽었을 것이고 그 원혼을 달래려고 백탑을 세웠다고

하는데 아마도 이곳을 떠도는 귀신 생산에 유비가 제일 많은 공헌을 했지 싶습니다.

수십만 명의 병졸을 불구덩이인지 모르고 숲 속에다 진을 치라 했으니까요.

덕분에 공명에게 어떤 놈이 숲속에다 진을 치라 했느냐고 욕도 먹었지요.

욕먹어도 싸다는 게 모든 이의 의견일 겁니다.

 

유비는 여기에다 진을 치고 여덟 달이나 주둔한 모양입니다.

당시 육손이 동오의 전군에 촉한의 군사와 맞닥뜨려 전투하지 말고 영채 내에 머물며

지키는 전략을 하달하며 전투가 소강상태로 접어들어 유비도 나오지 않은 적을 상대하기 어려워

여기에 진을 치며 머물렀나 봅니다.

 

당시 식수로 이용한 우물이랍니다.

많은 병사가 이곳에 주둔했기에 많은 식수가 필요했을 겁니다.

그래서 이 우물을 천 년 고정이라고 한답니다.

바로 절벽 아래 장강이 흐르지만, 그 물로 말미암아 조조도 혼이 났고 유비도 혼이 났다 합니다.

이렇게 마실 물도 골라 먹어야지 아무 물이나 덮석 먹다가는 수인성 질환으로

싸움도 하기 전에 먼저 자기 병사가 죽습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222년 촉한과 동오의 전투 때 유비가 효정산의 끝자락인 이곳 호아산에 주둔했을 때

병사가 아래로 흐르는 장강의 물을 먹고 배탈이 나자 이곳에 우물을 파게 하고

식수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이곳 우물이 이 지역에서는 유일한 우물이라 하며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직도

물이 흘러나오는 곳인데 적벽대전에서 조조가 철군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먹는 물 때문에

진중에 환자가 속출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