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에는 역사가 있습니다.

2014. 7. 16. 08:00삼국지 기행/삼국지 기행

지난번에 이어 오늘도 박물관을 좀 더 구경해야 하는 이유는 중국의 박물관은 새로 지은

거대한 최신건물에 많은 유물을 전시해 제법 시간을 내어 구경할만하죠.

춘추시대를 거치며 중원은 이제 너 죽고 나만 살자는 전국시대에 접어들며

나라 간에도 인정머리가 점점 사라집니다.

 

춘추시대라고 해서 전쟁이 없었겠어요?

그래도 춘추시대는 전쟁을 하더라도 항복만 하면 조상에게 제사 지낼 수 있게

배려했지만, 전국시대로 접어들며 오나라와 월나라처럼 대를 이어

사생결단에 뿌리까지 뽑아내려 하게 되었을 겁니다.

 

더 큰 땅을 갖고 싶고 더 많은 백성을 거느리고 싶었나 봅니다.

더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리려는 아름다운 마음에서 그랬으면 오죽 좋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은?

 

당시는 제후국과 군주국이 있어 서로 간의 질서가 지켜졌지만, 시간이 흐르며

제후국 간의 영토 싸움과 군주국이 되기 위한 노림수만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중원은 늘 나라 사이에 싸움만 있었나 봅니다.

 

드디어 기원전 473년 월나라 구천은 범려와 문종을 거느리고 대군을 동원하여 오나라로

쳐들어 오고 부차는 백비를 대장군으로 삼아 전투에 내보내나 

몇 번 싸우다가 월나라에 투항하고 맙니다.

백비는 그동안 월나라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해 투항을 하였으나 바로 죽임을 당합니다.

 

이제 오나라 도읍은 완전히 월나라군에 포위를 당하고 더 이상의 싸움은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감지한 부차는 사나이답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자살을 택합니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시작한 월나라와의 피 말리는 전투에서 승리했고 구천을 포로로

데리고 와 자신의 마부로 채용을 하여 망신을 주었고 서시의 도움으로 중원의 맹주자리에 까지

올라 한 시대를 호령하며 살아왔던 풍운아 부차는 이렇게 지는 석양이 되어 인생의 황금기를

서시와 함께 살며 사랑하며 그리고 천하를 호령하며 보냈으나 서시와의 사랑은

너무 아픈 사랑이었습니다.    

아~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부차는 죽을 때 비로소 알아갑니다.

이로써 오월동주니 와신상담이니 하는 말을 남긴 오나라와 월나라의 치열한 패권다툼은

드디어 막을 내립니다,

 

오월동주라는 말이 있는 오나라와 월나라

와신상담...

이 얼마나 원수를 향한 강한 집념입니까?

복수를 하기 위해 섶에 누워 자고 쓸개를 빨아야만 했을까요?

결국, 서시와 정단을 더블포스트로 앞세운 구천이 부차를 멸하며

대를 이은 복수에 복수는 끝을 냈지요.

 

위의 사진처럼 당시 마차와 말의 모습이 선명한 유적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오나라와 월나라 사이의 전쟁 모습과 함성까지 들리는듯합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드라마틱한 이야기 입니다.

 

오나라가 무너지던 날 범려는 고소대 아래서 서시를 극적으로 만나고 둘이서 태호라는

큰 호수로 도망을 갑니다.

두 사람은 일엽편주 작은 쪽배를 타고 물안개 자욱한 안갯속으로 사라졌다고 합니다. 

이 장면에서 멋진 그림 나옵니다.

 

그 후 두 사람은 '사랑밖엔 난 몰라'라며 부귀영화도 모두 버리고 유유자적 이름도 바꾸어

오호를 유랑하며 세상사를 잊고 살았다고 합니다.

범려는 사랑이 뭐고 정이 무엇이고 인연과 약속을 소중히 여긴 머찐 놈... 

범려라는 그놈이 있어 서시의 인생은 불행하거나 슬프지 않습니다.

 

사랑이란 화려한 궁궐 속에서 하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사치스럽게 살면서도 할 수 있지만,

오두막에 살며 쪽배를 타면서 고생스럽게 살아가면서도 할 수도 있습니다.

행복이란 누구와 함께 나누며 사느냐에 따라 결정이 되니까요. 

 

나중에 범려의 편지가 구천에게 도착합니다.

"폐하! 이 편지를 읽으실 때쯤 이미 저와 서시를 찾으실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월나라가 오나라의 원한을 갚기 위하여는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소원이 이루어진 지금은 폐하께 더 이상 필요치 않고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존재입니다.

서시의 미모는 폐하마저도 미혹할 수도 있으려니와 저 또한 전쟁에 이김으로 세력이 커져

오히려 폐하의 머리만 아프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이만 작별을 고합니다. 짜이찌엔~"

 

이 편지는 태호의 주변에서 범려의 옷으로 보이는 주머니에서 발견되어 사람들은 모두

두 사람이 호수에 뛰어들어 자살했을 것이라 말합니다.

박물관은 이런 역사가 남아있기에 천천히 구경하며 그때로 돌아가 볼 수 있어 좋습니다.

 

그리고...

혼자만의 엉뚱한 상상도 함께하며 말입니다.

당시 병사의 모습인가 봅니다.

 

병사만 중무장한 게 아닌가 봅니다.

전투에 투입된 마차를 끄는 말도 중무장했나 봅니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지 싶습니다.

그러나 전쟁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지금의 피리 같은 악기도 보입니다.

 

위에 사진에 보이는 악기는 지금도 사용되는 악기입니다.

중국의 소수민족인 동족이나 묘족에서는 위에 보이는 악기를 지금도 연주되고 있습니다.

루셩(芦笙)이라고 했던가요?

 

위의 사진은 지금으로 치면 드럼이라고 불러도 좋겠습니다.

음악은 인간의 삶을 한층 윤택하게 만들어 줍니다.

 

편종이라고 불러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 크기가 엄청나 연주하는 사람이 왔다 갔다 무척 힘든 악기로 보입니다.

처음에는 제사에 주로 사용했다 합니다.

 

편경일까요?

돌로 만들어 늘 편종과 함께 연주되는 악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악기도 악기지만, 그 악기를 받치는 받침대를 무척 아름답게 만들었습니다.

 

거문고로 보입니다.

지금은 줄도 남아있지 않지만, 그때는 무척 청아한 소리를 냈을 듯합니다.

 

이번에는 좀 다른 유물을 살펴보겠습니다.

동으로 만든 유물입니다.

 

이런 정도의 기술이라면 만들지 못할 물건이 없겠습니다.

흙으로 만든 것도 아니고 동으로 만든 그릇이 아니겠어요?

 

바로 앞의 서진 중 손잡이 부분만 확대해 봅니다.

용 두 마리가 양쪽에 붙어 기꺼이 손잡이가 되겠답니다.

발이 다섯 개면 황제를 위한 것이고 네 개면 그냥 아무나 가질 수 있겠네요.

 

우리에게도 익숙한 술잔입니다.

그런데 이런 잔으로 술을 마신다는 일이 무척 불편해 보입니다.

 

정말 정교하고 아름다운 장식으로 만들었습니다.

유물을 보고 있노라면 당시의 세상으로 들어간 느낌입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내일은 박물관에 소장된 또 다른 유물을 구경하렵니다.

우한에서는 박물관을 구경하고 고금대를 들릴 예정입니다.

그다음 우한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황학루를 구경하고 화타의 고향이며

조조의 고향인 보저우로 가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