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명원, 그 아픈 조각들

2012. 12. 25. 08:00삼국지 기행/삼국지 기행

원명원을 그들은 세상 모든 정원 중 으뜸이라는 의미인 "園中之園"이라고 한다는군요.

그 넓이가 천안문 광장의 8배나 되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황실 전용 정원이랍니다.

황실 전용 정원이라 하면 극소수의 사람을 위한 곳이라는 말이 아닌가요?

그렇다면 이 넓고 아름다운 곳을 몇 사람이 즐기며 돌아다닐 때 그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았을까요?

아무리 좋은 경치도 매일 보면 시큰둥하지 않을까요?

 

오늘은 제일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고 원명원을 상징하는 철저하게 파괴된 서양루를 보렵니다.

서양루의 위치는 위의 지도를 참고하세요.

바로 장춘원이라는 곳 위에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구주 경구에서 복해를 지나 서양루로 오는 길에 전혀 볼 게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위의 사진처럼 대부분 터만 남아 있는 그런 곳이 전부더군요.

산책하기는 이만한 곳도 없습니다.

아까 입구에 그렇게 많던 사람도 여기는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있었던 건물의 용도나 크기 등을 적어놓은 안내판 정도는 세워두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며 상상만 하라는 말이겠지요.

그러면 입장료도 받는 상상만 하고 받지 않으면 어떻겠어요?

 

그러나 이 건물의 실제 모습은 위의 사진과 같지 않을까요?

이런 멋진 건물을 서양 오랑캐들이 불을 질렀나 봅니다.

청나라의 가장 강성한 시기에 만든 황실정원이라면 이 정도는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당시에 더는 세금을 올리지 않겠다고 큰소리 탕탕 칠 때가 아니겠어요?

 

장춘원으로 들어갈 때는 다시 입장료를 내야 합니다.

그러나 통표를 산 사람은 이곳도 볼 수 있으니 원명원은 통표를 사서 구경하는 게 유리하네요.

 

원래 원명원은 1709년 강희제가 차기 황제 감으로 점찍었던 넷째 아들 옹정제

윤진에게 하사한 여름별장이었다네요.

옹정제는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가 선물한 이곳을 대대적으로 보수하여 황실 정원으로 꾸몄다고 하네요.

아들을 위해 이런 정원을 선물할 정도의 부모라면 정말 대단한 부모입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니 별 게 아니군요?

뭐 나라까지 자식에게 상속했으니...

정원 정도는 아주 겸손한 선물이 아니겠어요?

미안하지만, 佳人은 자식에게 해 줄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들아... 정말 미안하다. 

 

그러나 그 후 청나라 황제 중 가장 예능감이 풍부하고 풍류를 즐겼다고 소문이 난 건륭제 때

지금의 규모로 확대하여 만들었다 하네요.

건륭제는 원명원만 아니라 그 주변의 장춘원과 기춘원까지 추가하여 규모를 세 배나 넓이고 서양의 정원

전문가까지 데려와 유럽풍의 정원을 만들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합니다. 

바로 지금의 서양루가 그때 만든 정원이라네요.

 

이런 멋진 정원이 서양에까지 소문이 나는 바람에 오히려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이곳을 와보고

 자기네 나라에 중국풍의 정원을 꾸몄다 하니 세상은 요지경입니다.

원래,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게 아닌가요?

 

프랑스의 대문호라고 소문이 난 빅토르 위고라는 사람은 프랑스 성당의 보물을 모두 모아도 원명원의 한구석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는 정신 나간 소리를 하기도 했다고 하네요.

세상의 어떤 것도 그 나름의 가치를 지니고 있지 그게 비교 대상입니까?

빅토르 위고의 판단력이 겨우 그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단 말입니까?

아! 그냥 인사치레였나 봅니다.

 

세상에 가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비교한다는 것은 순위를 매기겠다는 말이지만, 서로 다른 가치를 지닌 곳에 있는 것을

어찌 하나의 기준으로 결정한단 말입니까? 

좌우지간 이런 이유로 서양에서는 동양의 정자가 널리 유행하는 계기가 되었다니 세상은 요지경 속입니다. 

 

세상에 언제나 늘 잘나가는 것만 아니지요.

아편전쟁은 중국이라는 나라가 당시에 얼마나 병든 용이었나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워낙 거대한 용이었기에 한번 병이 나면 치료하기 더 어렵습니다.

그놈의 병든 용은 창칼을 들 필요도 없고 이쑤시개 하나만 들고 콕~ 찔러도 제풀에 쓰러질 정도였잖아요.

아래 사진처럼 말입니다. 

 

수술로 환부를 도려내야 하지만, 그 수술 부위가 머리라고 하면 어쩌지요?

화타를 부르면 또 조조처럼 도끼로 머리를 뽀개고 날카로운 칼로 뼈에 생긴 환부를 "빠각빠각" 소리가 날 정도로

긁어내자고 할 게 아니겠어요?

 

이곳 원명원도 1860년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에 의해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하고 맙니다.

그 잿더미가 되는 과정 또한 재미더군요.

어디 1860년으로 잠시 "백 투 더 퓨처?"

 

그때가 바로 홍콩 해안에서 벌어진 애로우호 사건은 제2 아편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했지요

시름거리며 제대로 홀로서기도 어려운 청나라는 자기 처지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체면과

격식에 얽매어 상황을 오판하게 되고 그해 4월 광동에서 드디어 전쟁을 선포하게 되었다네요.

 

겨우 16.000여 명의 영국 프랑스 연합군은 6개월 만에 베이징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 정도에 이르면 항복을 해야 하지만, 청나라 정부는 또 오판하고 연합군에 만약 철수하지 않으면

40여 명의 연합군 포로를 죽이겠다고 협박을 하게 됩니다.

지피지기하면 지지 않는다 하지 않았나요?

이런 엄포는 늘 중국의 전매특허인가요?

중국은 순리보다는 자주 목소리만 높입니다.

 

10월 6일 베이징에서 다시 전투가 시작되고 청나라 군대는 개전이 되자마자 변변하게 전투도 하지 못하고

베이징 시내에서 북으로 도망하게 됩니다.

왜 바로 도망갈 싸움을 했느냐고 물어보면 틀림없이 작전상 후퇴라고 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게 하필이면 청군의 도주로가 원명원 앞을 지나게 되고 이를 추격한 연합군은

원명원의 보물을 보게 되었답니다.

이게 바로 원명원의 비극이 시작하게 된 이유입니다.

원명원의 눈물은 알고 보면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지요.

 

다른 곳으로 도망을 갔다면 아마도 원명원은 무사히 그대로 남아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곳도 위안이겠지만...

연합군은 원명원을 그대로 두지 않고 서양 개떼처럼 달려들어 보물을 약탈하고

그다음 청군을 따라 추격하면 좋았을 텐데...

이곳에 불마저 질러버립니다.

 

그때가 1860년 10월 18일로 이곳의 불길이 자금성에서도 환히 보였다 하니 도주를 하더라도

길을 제대로 골라 도망해야지 이런 국보급 건물 부근을 지나면 안 됩니다.

그 후 서태후가 많은 돈을 들여 복원사업을 벌였지만...

여기만은 복원하지 않았나 봅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당시 유럽 연합군의 군사가 겨우 16.000명으로 중국이 자랑하는 인해전술로

비유하면 상대도 되지 않는데 어찌 그리도 허망하게 후퇴만 했을까요? 

당시 청나라군 사령관에 물어보면 틀림없이 작전상 후퇴라고 하겠지만...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세상에는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그런 일이 가끔 일어나더군요.

남미의 잉카제국이 스페인군에게 허무하게 패망하며 잉카의 추장인 투팍 아마루가 포로로 잡힌 일도

그런 일 중의 하나일 겁니다.

당시 잉카의 군사는 80.000여 명이었고 스페인군은 200명도 채 되지 않은 군사였습니다.

투팍 아마루는 결국, 꾸스꼬 광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며 콘도르가 되어

안데스 산맥을 날아다니고 있답니다. 

그 노래가 바로 "철새는 날아가고"라는 노래라 했던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