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의 잔 다르크 쯩 자매 이야기

2009. 7. 30. 00:20동남아시아 여행기/베트남 종단 배낭여행

베트남의 도로는 역사 속의 유명 인물의 이름을 따서 만든 도로들이 많이 있다.

그중 하이 바 쯩(Hai Ba Trung)이라는 이름을 가진 도로가 거의 모든 도시마다 있다.

이 이름은 쯩쯩 짝(Trung Trac 徵側)과 쯩 니(Trung Nhi 徵貳)라는 자매를 기리기 위해 붙인

이름으로 하이(Hai)란 베트남어로 둘이라는 말이고 바(Ba)란 우리말로 여사에 해당하는

존칭이라고 하니 하이 바 쯩은 두 사람의 쯩 여사라는 의미다.

 

당시 베트남은 중국의 지배 아래에 있었고 새로운 태수로 소정(蘇定)이라는 사람이 부임했다.

그는 매우 탐욕스럽고 포악한 인물로 묘사되었다.

중국은 후한 말기로 매우 혼란스러웠고 중앙의 지배능력이 점차 약화가 되어

본국에서 베트남에 파견된 태수의 힘이 매우 강했다.

 

흥 브엉(雄王) 시대의 수도였던 퐁 쩌우의 메린현을 다스리던 락장(酪將 : 베트남 초기의

계급사회酪社會라고 한다)의 딸로 AD 14년 태어난 자매 중 큰 딸인 쯩 짝은 이웃 고을인

쭈 찌엔(朱鳶) 현의 락장인 티 싸익(詩索)과 결혼을 한다.

그러나 포악한 태수인 소정은 티 싸익과 다른 락장들이 반란을 모의했다는 이유로

살해하자 쯩 짝은 여동생인 쯩 니와 함께 AD 40년 군사를 일으킨다.

 

쯩 자매의 호소에 접한 다른 고을이 호응하여 함께 군사를 일으키며 반란군은

순식간에 현 65개를 함락 시킬 정도로 기세가 대단했다.

이에 놀란 소정은 중국으로 줄행랑을 치고 만다.

 

반란에 성공한 쯩짝은 메 린을 수도로 삼고 쯩 브엉(徵王)이 되었다.

이것이 베트남에 전해 내려오는 쯩 자매의 반란이며 중국에 대한 베트남 최초의 저항

사건으로 당시의 베트남은 모계사회로 여성의 권리가 매우 강했던 시절이다.

 

후한의 광무제는 쯩 자매의 반란을 한의 지배를 뿌리째 뒤흔드는 중대한 도전이라고 보고

42년 4월 마원(馬援)이라는 장수를 복파장군(伏波將軍)으로 임명하고 남 비엣에 파견했다.

 

마원은 8.000명의 정규군과 중국 남부에서 징병한 12.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랑 박(浪迫)에

주둔했고 대치하는 사이에 반란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락장들의 이탈이 가속화되며

전투가 벌어지자마자 쯩 자매는 크게 패하고 대부분의 군사는 죽거나 포로가 되고 만다.

지금 중국의 계림 시내에 복파산이라는 산이 있고 그 산 아래에는

아래처럼 복파장군 마원의 동상이 있다. 

 

쯩 자매는 저항하며 계속 싸웠으나 42년 말 결국 마원에게 붙잡히고 다음 해 1월 소금에 절인

자매의 목은 한나라의 수도인 낙양으로 보내졌다. (중국의 기록)

그러나 베트남의 기록으로는 쯩 자매는 막다른 곳에 몰리자 자매는 손을 잡고 강으로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고 전한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불과 29살의 꽃다운 나이였다.

 

비록 3년간의 짧은 기간에 독립을 얻었을 뿐이지만 오늘날까지도 쯩 자매는

중국의 지배에 저항한 베트남의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다.  

 

그녀는 프랑스의 오를레앙의 처녀라는 잔 다르크처럼 베트남의 잔 다르크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한 번 불붙기 시작한 독립의 열망은 200년이 흐른 AD 248년 끄우 쩐에서

코끼리를 타고 군사를 일으킨 찌에우 어우라는 부인이 있다.

몇 달 동안 격렬한 전투를 벌였지만, 그녀는 끝내 한나라의 대군에 패하고 나서 살해된다.

찌에우 부인의 반란은 베트남에서 여성이 이끈 마지막 반란이며 토착 지배 계급이

일으킨 최후의 저항이었다.

 

중국 한나라가 통치한 이후 근 1.000여 연간을 베트남은 중국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중국과 천 년 전쟁에서 독립을 이룩했다고 자부하고 있다.  

 

쯩 자매나 찌에우 부인의 이름은 지금도 베트남의 수도인 하노이 외에도 대부분의 도시마다

거리 이름으로 남아 민중들의 마음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