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부 출가 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2008. 12. 12. 00:19중국 여행기/소주, 항주, 상하이 여행

매헌은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였으며 1918년 덕산 공립 보통학교에 입학을 하나

이듬해 3.1 독립만세 운동을 보며 영향을 받고 식민지 교육에 반기를 들고 자퇴한다.

서당인 오치서숙(烏致書塾)에서 유학자 매곡 성주록 선생의 문하생으로 한학을 배우며

이때 매곡으로부터 매헌이란 아호를 받게 된다.   

 

 

이 기간에 매헌은 300여편의 한시를 지었다.

조국에서 야학의 개설을 통하여 문맹퇴치 운동을 하며 농민독본등 4권의 책을 저술한다.

이곳에는 매헌의 발자취가 순서대로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제 우리는 사진을 통하여서 만이라도 님의 발자취를 따라 가 보자.

아래 사진은 중국으로 건너가기 전 국내에서의 활동내역이다.

 

 

점차 매헌에 대한 감시와 조사등으로 조국에서의 활동에 제한을 받자 계몽운동보다 독립이우선 되어야 한다고 깨닳은 매헌은 장부 출가 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란 유서를 남기시고 조국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을 하게 된다.

이때 매헌의 나이 23살.....

그의 숭고한 독립의 소망을 마음에 깊이 간직한체.....

 

 

처음에는 만주지역으로 갔으나 칭따오를 거쳐 이듬해 24세때 상하이에 오게 된다.

김구선생을 만나 살신구국(殺身救國)의 뜻을 전한다.

이제 매헌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역사적 만남으로 이상을 실현할 계기를 마련한다.

 

 

이곳 상하이에서 야채상을 하며 기회를 보던중 1932년 상하이사변 전승 축하 기념식겸 왜왕의

셍일 기념 행사가 홍구공원에서 열린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들을 응징할 계획을 김구선생과

힘께 세웠다.

김구선생은 거사에 사용할 폭탄제조를 상하이 병공창에서 근무를 하던 김홍일에게 의뢰하고

모든 일을 계획대로 진행한다.

4월 26일 매헌은 태극기 앞에서 자필로 서명을 하고 한인애국단에 정식으로 입단을 하고

태극기 앞에서 아래에 보이는 증거사진을 찍었다.

거사 3일전......     

  

 

4월 29일 11시40분(한국시간 12시40분) 상해 홍구공원에서 전승기념 축하식중 열병식이 끝나고 마지막 순서인 일본 국가가 끝나갈즈음 단상을 향하여 물병형 폭탄을 투척하였다.폭탄은 단상 중앙에 정확히 떨어졌으며 굉음과 함께 축하식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시라카와 대장 이하 침략의 군,관,민 수괴 7명을 응징하게 된다.장부 출가 생불환을 몸으로 실천한 애국지사의 홍구공원 의거에 관한 자료다.

 

 

 

이곳 梅亭에는 아무도 없다.

이곳에 전시된 사진과 전시물들을 살펴보자.

잠시 살펴보고 사진을 찍고 있는데 안내원이 나타나 설명을 한다.

한국인인 佳人이 알이 듣기도 어려운 한국말을 중국 안내인이 이야기 한다.

佳人이 한국인인데도 한국말을 이렇게 못 알아 듣다니.....

그냥 전시물을 읽어보는게 더 이해가 빠르겠다.

 

 

아래 사진은 일본에 의하여 매헌이 총살 당할때 사용된 십자가 기둥이라고 한다.

매헌은 25살 꽃다운 나이로 그의 목숨을 조국 독립에 바쳤다.

꽃다운 나이란 여자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남자 나이 25세라면....

1932년 12월19일 아침 7시40분 일본 가나자와 교외 미고우시 육군 공병작업장에서 총살형으로 순국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아름다운 청년이었던 매헌은.....

마지막 조국의 푸른 하늘도 쳐다 보지 못하게 눈도 가린체..... 

 

 

매헌의 마지막 장면은 佳人의 발걸음을 떨어지게 하지 않고 오랫동안 붙잡는다.

조금 가까이 다가가 찍은 사진을 다시 보자.

매헌이 처형장에서 소리쳤던 "대한독립 만세 !!!!"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듯 하다.

 

 

또 사진 몇장 더 보자.

도시락과 물병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도시락 폭탄은 사용하지 못하고 현장에서 체포될때 압수되었고 투척한 것은

물병에 든 물병형 폭탄이었다.

 

 

왼편에 작은 것은 매헌의 도장이고 오른쪽 시계는거사를 하던날 떠나기 전 김구선생님과 교환한

시계다.

 

 

매헌이 쓰신 편지중에 일부내용을 그분의 동생이 쓰신 글이다.

이상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위하여 이 길을 택하였노라고....

 

 

아래 글은 농업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내용이다.

농민을 본위로 한 정치, 경제, 문학, 예술과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농민독본의 말씀이다.

 

 

1945년 해방이 되고 일본에 있던 매헌의 유해는 1년후인 1946년 7월에 그렇게 그리던 독립된

조국의 땅으로 이봉창과 백정기 두 분의 유해와 함께 봉환되었다.

세분의 유해는 광복이후 최초의 국민장으로 엄수되었으며 효창공원 3의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방명록에 자취를 남기고 나왔다.

어린 꼬마가 남긴 글에서 좋은 도시락을 먹고 싶단다.

아이야~~ 여기에 있는 도시락은 나라를 구하는 도시락이고 네가 먹고 싶은 도시락은

너 혼자만 살리는 도시락이란다.

객지에 아이를 데리고 나와 부모가 밥을 굶기면 안 되는데...

아~~ 이런~ 벤또라고 쓴 글도 보이네,,,,,

이제 점심 먹을 시간이 되었다.

어느 아이의 부모인지 모르겠지만 꼭 오늘 점심은 제발 좋은 도시락으로 먹이세요.

만약 아이가 저 도시락을 탐내다가는 잘못되면 우리 모두 폭탄 맞습니다. 

 

 

우리에게는 매헌처럼 이런 아름다운 분들이 계셔서 희망을 이어 갑니다.

그래요....

우리들에게는 꿈이 있어요.

 

매헌은 장부 출가 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라고 하시며 집을 나섰다는데

佳人은  무엇을 위하여 오늘도 집을 나서고 있을까요?

그러나 백수는 집을 나서지 않습니다.

단지 블로그에만 들어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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