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당이라는 태산사(泰山祠)가 있는 무성서원

2023. 8. 23. 03:00한국의 서원과 향교

정읍 무성서원은 특이하게도 생사당(生祠堂)이라는 건물이 있습니다.

보통 서원에는 선현이나 공자를 모신 제향 공간은 뒤쪽에, 강학 공간은 앞쪽에 배치되는

전학후조(前學後廟)의 모습을 볼 수 있지요.

 

그러니 공부하는 강학영역은 앞에 배치하고 제향을 위한 영역은 뒤로 배치하지요.

물론, 여기도 같은 구조임에는 분명합니다.

다만, 당시에 살아계신 분을 모신 생사당이라는 게 다르네요.

 

그러나 제향공간인 주로 높은 학문이 높은 돌아가신 분들의 위패를 모신 공간인데

생사당은 다른 곳과는 달리 당시 살아계셨던 고운 최치원(崔致遠)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만든 사당이라는 것이 특이합니다.

 

그러나 무성서원은 고려 말에 쇠약해졌다가 1483년(성종 14) 상춘곡을 지은 문인 정극인(丁克仁)이 세운

향학당(鄕學堂)이 있던 지금의 자리로 이전되었다 하네요.

 

그 뒤 1549년(명종 4) 신숙주의 손자이며 이 지역 현감을 지낸 신잠(申潛)의 생사당을 짓고 태산사에

배향하였으며 1630년(인조 8) 정극인, 송세림(宋世琳), 정언충(鄭彦忠), 김약묵(金若默),

1675년(숙종 1) 김관(金灌) 등 이 지역에서 성리학을 보급하고 학문을 정리한 7분의 위패를 모심으로

이곳 태산사에 모두 7위의 위패를 추가 배향하였다지요.

 

1696년(숙종 22) 최치원과 신잠의 두 사당을 병합한 뒤 무성(武城)이라고 사액(賜額)되어

서원으로 개편되었으며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네요.

그렇기에 강학보다는 배향이 더 강조된 모습을 볼 수 있네요.

 

매년 봄가을 두 번 이곳에서 제향의례를 올린다고 하네요.

그리고 다른 서원과는 달리 매월 음력 초하루와 보른 두 번에 걸쳐 봉심을 봉행한다고 하고요.

이런 행사가 계속 이어졌기에 유네스코에서도 세계유산으로 산장한 이유 중 하나가 되었지 싶습니다.

 

이 서원은 1868년(고종 5) 경 대원군의 서원 철폐 시에도 훼철(毁撤:헐어 부수어서 걷어 버림)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그 뒤 계속적인 중수와 보수를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어

유네스코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9개 중에 하나로 선정되었지 싶습니다.

 

서원으로 들어가는 외삼문에는 누각 형태로 만들어 보기에도 좋습니다.

이 누각을 현가루(絃歌樓)라고 하는데 외삼문 대신 1891년 건립된 전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의 모습입니다.

 

유생들이 모여 강학을 했던 명륜당 뒤로 돌아와 바라본 현가루의 모습입니다.

 

현가루(絃歌樓)는 논어에 나온 글인 현가불철(絃歌不輟)에서 따온 말로 

거문고를 타며 노래가 그치지 않는다는 뜻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힘든 상황이 되어도

학문을 계속한다는 의미라고 하네요.

 

다시 보아도 아름다운 누각이 아닙니까?

유생들이 공부를 하는 도중 이 누각에 올라 세상 사는 이야기도 나누며

머리도 식히는 그런 공간이 아닐까요?

 

현가루 문을 들어서면 1828년 중건된 전각이 보입니다.

위의 사진은 명륜당(明倫堂)의 모습입니다.

정면 5칸이고 측면 2칸의 전각이네요.

 

이 전각의 용도는 유생이 공부하던 강학공간인 강당이라고 합니다.

좌우로 방이 배치되어 있고 중앙에 3칸의 마루가 시원하게 앞뒤로 트여있습니다.

이 대청마루에 유생들이 모여앉아 학문을 익히고 토론을 하였을 모습이 떠오릅니다.

 

강딩 전면에 걸려있는 무성서원이라는 현판을 보면 병자년 11월이라고 적혀있는데

1696년 사액되었음을 볼 수 있네요.

임금께서 학문에 더욱 정진하라고 내린 사액이지요.

 

위의 사진은 강수재(講修齋)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서원은 기숙사로 동재와 서재로 두고 서로 마주 보며 나누어져 있지요.

그러니 이곳에서 머물며 공부하는 유생을 상급생과 하급생 두 부류로 나누어 기숙하는 방법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무성서원은 동재인 강수재 하나만 남아있다고 합니다.

 

원래 서재인 흥학재(興學齋)가 있었다는데 사액 후에 고직사였던 전각을

기숙사인 강수재로 변경해 사용했다고 하네요.

그러면 선후배가 같은 방에서 기숙했다면 서로 사이에 불편했을 듯하네요.

 

당시에 유생이 적어 그랬을까요?

그랬기에 이곳은 강학보다는 재향이 강조된 서원이라고 했나 봅니다.

 

병오창의 기적비입니다.

1905년 일제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듬해인 1906년 6월 13일 면암 최익현, 둔헌 임병창 선생의

주도로 호남 최초로 무성서원에서 의병이 일어난 역사적인 현장을 기념하기 위해 1992년에 세운 비입니다.

 

통정대부 전비서 신용희 불망비라는 비가 있네요.

이 비는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인 1925년에 세운 것이라고 합니다.

통정대부를 지낸 신용희를 잊지 말자는 의미의 비석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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