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유산, 필암서원(筆巖書院)

2023. 1. 30. 04:00한국의 서원과 향교

 

필암서원을 들어가는 입구에는 위의 사진에 보이는 홍살문이 보입니다.

홍살문은 예의를 갖추어 경의를 표하는 신성한 장소임을 알리는 붉은 칠을 한 문이지요.

홍살문 옆에는 하마석(下馬石)이라는 돌이 설치되어 있어 누구나 이곳에서 말에서 내려

예의를 갖추고 걸어 들어가야 한다는 의미지요.

 

 

이제 우리도 홍살문을 거쳐 안으로 들어가며 필암서원(筆巖書院)은

어떻게 구성되어있나 보렵니다.

필암서원은 1590년 하서 김인후(1510-1560)의 후학과 호남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건립되었으며 1786년 하서의 제자이자 사위인 고암(鼓巖)

양자징(梁子澂)(1523-1594)을 추배 하였다네요.

 

 

특히 필암서원은 1659년 필암으로 사액을 받았으며, 하서 김인후 선생은

호남에서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된 점에서도 이 지역의 선비 문화를 대표하는

서원이라고 하며 이곳 필암서원도 공부하는 곳을 앞쪽에 배치하고 제사 지내는 곳은

뒤쪽으로 배치한 전통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구조를 보여줍니다.

 

 

위의 사진에서 보시는 대로 나지막한 유민산이 뒤를 감싸고 있는 가운데 평지에 자리 잡은

필암서원은 선현에 대한 제사 공간과 교육 및 학문 수련의 공간, 휴식공간 그밖에

장서 보관 기타 시설 등 조선시대 서원의 기본구조를 잘 갖추고 있습니다.

 

 

홍살문을 지나면 제일 먼저 서원으로 들어가는 문루인 확연루(樓然樓)가 있습니다.

확연(樓然)이라는 말은 "하서 선생의 마음이 맑고 깨끗하며 확연하게 크고

공평무사하다."는 의미의 확연대공(廓然大公)을 집자한 말이라고 하네요.

 

 

이는 널리 모든 사물에 사심이 없이 공평한 성인의 마음을 배우는 군자의 학문하는 태도를

뜻한다는데 안으로 들어와서 보면 2층 누각 형태의 건물로 조금 다른 느낌이 듭니다.

확연루는 서원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진리 추구의 엄중함으로 압도하네요.

 

 

이곳은 교류와 휴식의 공간으로 2층 누각은 유생들의 휴식을 위한 목적의 공간이라고

하며 특히 위의 사진에 보이는 확연루의 현판 글씨는 우리도 잘 아는

우암 송시열이 직접 쓴 글이라고 합니다.

대단히 소중한 현판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확연루 누각 아래의 문을 통해 들어오면 눈앞에 보이는 건물이 청절당(淸節堂)이

보이는데 이 건물이 강학 활동을 위한 핵심적인 건물입니다.

유생들의 강학 공간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집이네요.

이 건물은 옛 진원현 객사를 여기다가 옮겼다고 합니다.

 

 

편액은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의 글씨라고 하네요.

청절당이란 이름은 우암 송시열이 쓴 하서 선생 신도비문 중 청풍대절(淸風大節)이라는

구절에서 인용한 것이라고 하고 또 청절당 처마 밑의 사액 현판 필암서원(筆巖書院)은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의 글씨고요.

 

 

청절당 내에는 백록동(白鹿洞) 학규(學規)가 보이는데 부자유친 등 삼강오륜 중 오륜으로

정했으며 또 정조대왕의 어제(御製) 사제문(賜祭文), 문묘종사(文廟從祀) 반교문(頒敎文),

교서(敎書), 정조대왕 전교(傳敎)등의 편액이 걸려 있으며 또 여러 사람의 시문이

걸려있는데 특히 하서의 제자였던 송강 정철(鄭澈)의 시판(詩板)도 걸려 있습니다.

 

 

청절당 앞으로는 마당이 있고 양쪽으로 두 개의 건물이 마주 보고 있는데 진덕재와 숭의재라는

건물로 이 건물의 용도는 유생들의 기숙과 개인학습을 하던 곳입니다.

단순한 민도리집 양식의 동재, 서재라고도 부르는 데 있는데 서원에 기숙하면 수학하는

유생(儒生)들이 거처하는 공간입니다.

 

 

위의 사진에 보이는 동재인 진덕재(進德齋)는 선배들이 기거하던

일종의 기숙사인 셈이겠네요.

가운데 마루를 두고 양쪽으로 온돌방이 보입니다.

 

 

서재인 숭의재(崇義齋)는 후배들이 기거하였던 곳이랍니다.

선배들과는 달리 가운데 마루는 없고 4개의 온돌방이 연결된 모습입니다.

편액은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의 글씨라네요.

 

 

이번에 보시는 건물은 제향 공간으로 들어가는 태극문양이 그려진 세 개의 문이라는

내삼문이 보이는데 내삼문은 처음 외부에서 들어오는 확연루 누각 아래 외삼문과는 달리

아무나 드나들 수 없고 늘 닫혀있고 봄, 가울로 제를 올릴 때만 문이 열리는데

가운데 문으로는 사람이 드나들 수 없는 문이라고 합니다.

 

 

내삼문 왼쪽에 보니는 건물은 경장각(敬藏閣)으로  일반 서원과 어울리지 않는 화려함이

가득한 3칸의 건물이 있는데, 정조대왕이 하서 김인후를 문묘에 종사하면서 내려 보낸

내탕금으로 세워졌으며 이곳에는 인종(仁宗)이 세자 시절 손수 그려 하서 김인후에게

하사하신 묵죽도(墨竹圖)와 묵죽(墨竹) 그림의 판각(板刻)을 보관하고 있다네요.

 

 

이 묵죽도는 훗날 하서 선생의 높은 절의(節義)를 표시하는 상징물이 되었답니다.

주심포식 팔작지붕으로 귀공포와 네 모서리에 3마리의 용머리가 돋보이고 용머리와

국화문(菊花紋)을 조각한 것도 어제(御製) 묵죽(墨竹)을 보관하기 때문이라 합니다.

 

 

특히 위의 사진에 보이는 경장각(敬藏閣)이라는 편액은 정조대왕 어필(御筆)로

벌레 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망이 쳐져 있습니다.

특히 어필이기에 존엄하고 신성하게 생각하여 현판을 가렸다고 합니다.

 

 

내삼문 앞에는 춘추 향사(享事) 때 쓰기 위해 희생(犧牲)을 묶어 놓고 검사하는 계생비(繫牲碑)가

있으며 지금 사진에 보이는 앞면의 필암서원 계생비라는 글자는 송재 송일중이 썼다고 하네요.

이 비는 묘정비(廟庭碑)도 겸(兼)하고 있는데 뒷면에 서원의 건립 취지와 연혁 등이 기록되어 있고

비문은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이 찬하고 글씨는 석촌(石村) 윤용구(尹用求)가 썼다고 합니다.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토담 동쪽 밖에는 장판각(藏板閣)이라는 건물이 하나 보이는데

양쪽으로 습기가 잘 통하도록 만든 시설도 보이는데 이곳은 유생들의 학습을 위한

책을 인쇄하기 위한 목판을 보관하는 곳으로 여기에 하서전집(河西全集) 649판,

초서천자문 18판, 해자무이구곡 18판, 백련초해 13판 등 목판 700여 매를

보관하고 있는 장소라고 합니다.

 

 

장판각 옆 동쪽에는 서원을 관리하는 노비(奴婢)의 우두머리나 하급 관리자가

거처하는 툇마루와 부엌이 달린 한장사(汗丈舍)라는 건물이 있습니다.

 

 

위의 사진처럼 장판각과 나란히 위치해 있기에 언듯 보면 대단히 의미 있는

건물로 생각되는데 아마도 장판각에 보관된 소종한 자료를 지키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경장각(敬藏閣)을 지나 내삼문 안으로 들어가면 제향 공간인 작은 규모의 우동사(祐東祠)가

있고 이곳에는 하서(河西) 김인후의 신위(神位)가 봉안(奉安)되어 있으며,

좌측면에 고암(鼓巖) 양자징(梁子澂)이 종향(從享)되어 있다네요.

우동(祐東)의 의미는 송시열의 신도비명에 "하늘이 우리 동방(東方)을 도와(祐)

하서 김 선생을 종생(鍾生)하게 하였다"의 뜻이라네요.

편액은 주자(朱字)의 글씨를 집자하였다고 전해온답니다.

 

 

우동사로 들어가는 내삼문 왼쪽에는 봄가을로 제례를 준비하는 전사청(奠祀廳)이

있으며 이곳에는 봄, 가을 제례 때 사용하는 제기들이 보관된 곳이라고 합니다.

또 제사를 지낼 때 필요한 음식도 이곳에서 준비하는 공간입니다.

 

 

이번에 보이는 아주 작은 건물은 정방(淨房)이라고 부르는 건물입니다.

용도는 지금의 화장실이지요.

뒷간 또는 측간이라고도 부르는 그런 곳입니다.

 

 

서쪽 담장 너머 별도 공간에 작은 마당 둘레의 민도리집 양식 건물들이 있는데,

이곳은 서원을 관리하는 수호인(守護人)이 거처하는 고직사(庫直舍) 건물입니다.

직사(直舍), 창고(倉庫), 행랑(行廊)으로 구성되어 있다네요.

서원 운영의 보조업무를 담당하는 사람들이 기거하던 건물이라고 합니다.

 

필암서원 무료 주차장 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