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 무성서원(井邑 武城書院)

2023. 7. 26. 03:01한국의 서원과 향교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탐방 중 오늘은 정읍에 있는 무성서원을 찾았습니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많은 서원 중 유네스코에 의해 한국의 서원으로 선정된 9개 서원을

모두 방문해 보는 것을 목표로 돌아보는 중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전북지역에서는 유일하게 선정된 정읍의 무성서원을 찾았는데

위의 사진에 보듯이 민가 건물이 서원으로 들어가는 입구 홍살문 옆까지 있어

조금은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유네스코에서도 인정한 세계적인 우리의 역사인데 허술하게 골목길 안에

방치된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서원 입구에 비석을 모아두어 보존한 것은 좋습니다.

 

우리나라 서원은 그 설립 목적이 성리학에 기초를 둔 이상적인 지식인을 기르고

지역의 대표적인 성리학자를 사표로 삼아 제향 하며 지역사회의 공론을 형성하는 일이라고 하지요.

 

따라서 설립자는 국가가 아니라 개인이나 지역 유지들이 모여 세웠기에 공립학교의 역할을 했던

향교와는 달리 사학의 개념인 교육기관인 셈입니다.

 

그렇기에 성리학을 사회적으로 확산하는 일에는 크게 기여했지만,

학맥을 형성하여 끼리끼리 뭉치는 폐해도 생기게 되고 지방 사회에서나 중앙무대로 진출하여

정치에서도 학파를 형성해 붕당을 조성하는 문제도 내포하게 되었지요.

 

1868년(고종 5) 경 흥선대원군에 의해 많은 서원이 철폐를 당하게 되었는데

당시 훼철되지 않은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라고 하네요.

 

이런 결과 때문에 긍정적임 면과 부정적인 면을 함께 가지고 있었기에 사회에 기여를 하기도 했지만,

반대로 분란을 조성하고 정파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리는 폐해를 야기하기도 했겠네요.

 

무성서원은 신라말 이 지방 태산군에 군수로 부임하여 유화적인 교화로 선정을 베푼

고운 최치원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무성서원이 아니라 처음에는 태산사(泰山祠)가 그 기원이라고 하네요.

 

그러나 고려말 태산사가 훼철된 후, 1483년에 정극인이 세운 향학당이 있던 지금 자리로

옮겨 중건되었고 1844년에 중수되었다고 하네요.

 

그 사이 1615년에 서원으로 건립하여 태산서원이라고 칭했으며

1696년 숙종 25년 임금에 의해 지금의 명칭인 무성서원(武城書院)으로 사액(賜額)되었다고 합니다.

 

무성서원은 우리가 보아도 다른 서원과는 다른 매우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네요.

위의 사진을 보면 현가루라는 누각이 보이는데 그 안으로 들어가면 강학영역으로 

유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전각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서원은 강당의 양 옆에 유생들이 기거하는 동재와 서재가 있는데 비해

무성서원은 유생들이 기거하는 강수재와 서원을 관리하는 고직사가 사당, 명륜당 등

서원의 핵심 부분으로부터 분리되어서 담장 오른쪽밖에 나와 있습니다.

 

위의 사진에서 보면 분리되어 있는 모습을 확실히 볼 수 있네요.

오른쪽에 비각이 보이고 그 뒤에 강수재가 있습니다.

 

위의 사진처럼 말입니다.

왜 강학영역에서 따로 독립시켜 담장 밖에다가 기거하게 했을까요?

 

이러한 구조적 특징에 대해서는 무성서원이 다른 서원에 비해 유생의 교육을 위한 강학보다는

학문이 높고 본받을 만한 덕을 지닌 분들의 위패를 모신 모신 제향 공간으로서의

상징성이 더 크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고 하네요.

 

무성서원은 지금까지 다녀보았던 다른 서원과 비교하면 서원 면적이 좁은 느낌이 듭니다.

지금의 주변 환경도 제일 좋지 않아 보이고요.

서원 주변에 민가가 바짝 붙어있어 서원만의 고즈넉한 느낌이 전혀 들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