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서원, 소수서원 사료관과 선비촌

2022. 9. 21. 04:00한국의 서원과 향교

아름다운 전각이 보입니다.

아래로는 연못이 있어 멋을 한층 더 냈네요.

오늘 이야기는 소수서원 뒤에 있는 사료관과 선비촌을 구경하려고 합니다.

 

선비촌은 위의 사진에 보듯이 서원 뒤의 죽계천 너머에 있는데 이곳은 원래 사람이 살던 곳이

아니라 조선시대 선비들의 삶터를 재연해 놓은 인위적이 곳이네요.

따라서 선비촌에는 고택 숙박체험이나 전통 혼례 등 여러 가지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라고

하는데 사전 예약제로 운영하는지 오늘은 체험 프로그램이 없는 듯합니다.

 

죽계교를 건너가면 충복각과 열부각이 보입니다.

이 전각은 조선말 반남 박씨댁 규수가 여흥 민 씨 가문으로 출가를 했으나 남편이 일찍 병사하며

홀로 지내던 중 이웃 천석꾼이 흑심을 품고 나쁜 소문을 내는 바람에 관아에 호소했으나

받아주지 않아 자결을 했다고 합니다.

 

이 과정을 지켜본 집안 하인 고만석은 마님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한양으로 올라와

고생끝에 임금에게 알려 마님의 억울함을 풀어주었다고 합니다.

(위의 사진에 나오는 새끼 꼬는 하인은 고만석이 아니기에 내용과는 무관함)

 

그 후 소수서원이 주체가 되어 전국 유림이 발의하여 두 사람의 가상한 뜻을 기리고자

나라에 상소하여 순조 22년(1822년)에 열부 박 씨에게 정려(旌閭)를 내렸고 고만석에게는

철종 14년(1863년) 같은 정려를 내림으로 이곳에 열부각과 충북각을 세우게 되었답니다.

 

선비촌은 다른 곳처럼 그냥 예전 삶의 현장처럼 꾸민 것이 아니라 다양하게 공간을

구성했고 두암고택 등 가난함 속에서도 바른 삶을 중히 여긴다는 우도불우빈((憂道不憂貧)이라

는 공간이 있는데 이 공간의 구성은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청빈한 삶을 살았던

선비들의 모습을 느낄 수 있도록 꾸몄다고 합니다.

 

다음은 자신의 수양에 힘쓰고 집안을 올바르게 다스린다는 의미인 수신제가(修身齊家) 공간입니다.

예전의 선비들은 늘 바르게 살기 위해 자기부터 옳바른 삶을 추구하는데 힘을 기울였겠지요.

김상진家, 해우당 고택 등이 이 영역의 집이라고 합니다.

 

또 살아가는 도중에 편안함만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의미인 거무구안(居無求安)의 공간도 보입니다.

김문기家나 만죽재가 이런 명상과 풍류를 즐기면서도 자신의 안위를 우선시하지 않고 현실의

잘잘못을 비판한 영주지방의 선비의 굳은 기개를 볼 수 있는 공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회에 진출하여 이름을 드높인다는 입신양명(立身揚名)의 공간입니다.

위의 사진에 보이는 두암고택, 안동 장 씨의 종가 등이 이 공간의 영역으로 중앙 관직에 진출하여

다양한 활동을 하였던 영주 선비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고 하는 영역입니다.

 

이런 공간을 만든 이유는 우리 민족의 생활철학이 담긴 선비정신을 높이고 사라져가는

전통문화를 재조명하여 윤리도덕의 붕괴와 인간성 상실의 사회적 괴리현상을 해소해 보고자

충효의 현장을 재연했다고 보입니다.

이제부터 위에 언급했던 여러 집안 구경을 하면서 소수서원에 관한 이야기로 오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소수서원 후문으로 나가면 거기에는 사료관이라는 건물이 있습니다.

바쁘지 않으면 여기는 들러보고 가는 게 좋지 싶습니다.

소수서원을 이해하는데 많은 사료가 전시되어 있기에 도움이 되네요.

 

소수서원은 평소 고려말 대유학자인 안향(安珦)을 흠모하던 주세붕이 이곳 풍기 군수로 부임한

이듬해인 1542년(중종 37), 안향선생의 고향에 사묘를 세워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다음 해

1543년에는 학사를 건립하여 사원(祠院)의 체제를 갖추며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움으로 시작되었다네요.

위의 사진 속의 책자는 심원록이라고 하는 지금의 방명록과 같은 것이네요.

 

위의 사진 속의 책자는 사마방목이는 것으로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 명부라고 합니다.

소과에 합격한 진사, 생원의 이름과 나이 본관  그리고 주소가 기록되어있다고 합니다.

학업으로는 큰 성과응 거둔 사람의 명단이라고 보입니다.

 

이후 1548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李滉)은 서원을 공인하고 나라에 널리 알리기 위해

조정에 백운동서원에 대한 사액(賜額)과 국가 지원을 요청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1550년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 사액되었고, 아울러 국가의 지원도 받게 되었다네요.

 

명종(明宗)은 대제학 신광한(申光漢)에게 명하여 사서오경(四書五經)과 성리대전(性理大全) 등의

서적을 하사하였다네요.

이러한 조처를 통해 소수서원은 공인된 교육기관으로서, 이후 다른 서원들의 설립과 운영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고 하며 향교는 공립학교라고 한다면 서원은 명문 사립학교 정도라고 봐도 되겠지요?

 

이는 서원이 단순한 향사와 교육 기능 수행만이 아닌, 지방 사림(士林)들의 정치,

사회 활동에 중심 역할을 하는 곳이라는 의미도 포괄하고 있어 소수서원의 설립과 발전 내용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겠네요.

사액을 받기 이전까지 백운동서원은 풍기 사림들의 호응을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서원이 풍기에 세워지긴 했으나 유생의 교육을 풍기지역에 국한하지 않고

경상도 내 각 군현 유생들에게도 교육 기회가 개방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풍기지역의 사람이 호응하지 않은 이유는 일종의 텃세라고 봐야 할까요?

 

하지만 사액을 받고, 국가에서 인정한 사학(私學)의 위치를 굳힘에 따라 풍기의 사림들도 점차

적극적으로 서원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소수서원(紹修書院)은 소수의 유생들만 위한 서원이 아니라 "학문을 이어서 닦는다."라는 의미라고

하며 이 말은 기페지학(旣廢之學) 소이수지(紹而修之)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이미 무너진 학문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는 말이라네요..

 

이처럼 소수서원이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한 부분을 담당하면서 향촌 사림의 정치적 사회적

기구로 정착되자 이후 전국에 서원들이 설립, 운영되어 조선시대 사학의

중심기관으로 발전하였다고 하네요.

 

그 뒤 1633년(인조 11) 주세붕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서원의 지나친 건립과 부패로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훼철(毁撤)되지 않고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하지요.

 

서원을 유지하려면 향사도 올려야 하고 또 유생이나 교수 등 많은 사람의 식생활도

해결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금전적으로 도움이 필요하지 않겠어요?

독지가나 나타나 큰 도움을 주기 전에는 경제적인 문제는 서원 운영에 있어 가장 큰 문제가 되겠네요.

 

그래서 1546년(명종 1)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안현(安玹)은 유생의 정원(10명), 

공양 절차(供養節次), 서원 재정, 경리관계를 규정한 사문 입의(斯文立義)를 만들어

서원의 경제적 기반을 확충하고 운영 방책을 보완하는 데 주력했다고 합니다.

 

백운동서원은 나라로부터 약 30 결의 토지 및 18명의 노비, 4명의 원직(院直) 등을 소유함으로써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다고 하네요.

 

처음에는 과거 시험공부 위주의 학교로 인식되고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의 입시위주의 교욱과 크게 다르지 않았나 봅니다.

당시에는 아무래도 입신양명은 과거에 급제하는 일이잖아요.

 

그러나 너무 공부에만 매달리지 않도록 이황(李滉)에 의해 과거를 위한 독서보다는 수기(修己)나

강명도학(講明道學) 위주로 변화를 추구했다고 합니다.

 

특히 그는 1548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뒤 을사사화로 고초를 겪은 다음

관료로서 군주를 보필하고 경륜을 펴기보다는 학문의 연구와 교화, 특히 후진의 양성을 통해

학파를 형성함으로써 향촌사회를 교화하고 나아가 장래의 정치를 지치(至治)로 이끌 인재를

확보하겠다는 생각에서 지방 유생의 강학과 교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서원 출신으로 구성된 유생들로 파벌을 초래하여

붕당의 문제를 야기하기에 이르렀지요.

결국, 대원군에 의해 서원철폐라는 큰 사건을 겪게 되는 단초가 되었다고 봐야겠네요.

소수서원과 선비촌이 있는 곳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