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월성(慶州 月城)과 석빙고

2022. 5. 11. 04:32금수강산 대한민국/경상북도

경주 여기저기를 걸어서 다니다가 언덕 위로 월성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어 찾아갑니다.

지금은 발굴 조사 중이라 우리같은 사람은 형태는 전혀 가늠할 수 없고 폐허로 보이네요.

 

첨성대 구경을 마치고 계림 옆으로 돌아서 언덕 위로 올라갔습니다.

 

월성은 경주 시내를 흐르는 남천, 북천, 서천의 안쪽 구릉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신라의 왕궁터라고 합니다.

원래 이름은 월성인데 반월 모양이라고 하여 조선시대부터 반월성(半月城)이라 불려 오늘에 이른다네요.

높지는 않지만, 이곳에 오르면 경주 분지가 한눈에 들어오기에 경주 전체를 조망할 수 있네요.

 

남쪽으로는 위의 사진 아래에 보이는 남천이 흘러 외부의 적으로부터 자연적인 방어선이 되었고

동쪽과 북쪽, 서쪽은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넓은 도랑인 인공해자를 파 천연의 궁성을 만들었네요.

궁성 안에는 왕궁을 비롯해 많은 전각이나 부속건물이 있었겠지만, 지금은 빈터만 보입니다.

 

경주에 있는 월성은 모양이 반달 같다 하여 “반월성(半月城)” 또는․“신월성(新月城)”이라고도 하며,

왕이 계신 곳이라 하여 “재성(在城)”이라고도 불렀다고 합니다.

둘레 2,400m이며 사적 제16호로 지정된 곳으로 현재 부분적으로 성벽과 성안의 건물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폐허 상태로 있다가 최근에 발굴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며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변화되지 싶습니다.

외부에서 올려다볼 때는 규모가 크지 않아 무슨 궁궐이 있었지 하는 생각을 했지만, 실제로 올라가 보니

성안이 넓고 자연경관이 좋아 궁성으로서의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곳입니다.

 

그러나 이 월성이 완전히 복원사업이 끝나면 천 년 신라의 위용을 자랑하는

대단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 싶습니다.

무척 기대가 되는 곳입니다.

 

이곳은 서기 101년 파사왕 22년에 신라의 왕성으로 축성되어

신라가 망하는 서기 935년까지 궁궐이 있었던 곳이라고 합니다.

신기하게도 궁성터 언덕 위에 있는 소나무가 모두 왕궁이 있는 방향으로 굽어져 있네요.

 

월성의 성은 돌과 흙을 섞어 싼 토석 축성인데 길이가 1,841m이며, 성내 면적이 193,585제곱미터라고

하며 동에는 동궁과 월지와 연결되고 북으로는 첨성대가 있으며 남에는 남천의 시내가

하나의 방위선 역할도 하게 되어 있더라고요.

 

삼국사기에 의하면 석탈해왕(昔脫解王)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토함산정에서 경주시내를 조망하다가

이 월성 자리를 길지라 생각하고, 원래 이곳에 살고 있었던 호공(瓠公)이라는 사람에게 꾀를 내어

이곳을 차지했다고 하며 남해왕이 그 이야기를 듣고 석탈해왕을 사위로 삼았으며,

신라 제4대 왕이 되었다는 전설도 전해온다고 하지요.

 

그 후 파사왕(婆娑王) 22년(101)에 여기에 성을 쌓고 옮긴 다음부터

역대 왕이 이 월성에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성은 신라 역대 왕들의 궁성이 되었으며 나라가 커짐에 따라 부근 일대가 편입되기도 하였는데,

특히 문무왕 때 안압지(雁鴨池), 임해전(臨海殿), 첨성대 일대가 편입, 확장되는 등 신라의 중심지였을

것으로 동서 길이 900m, 남북 길이 260m이며 성 안의 면적은 약 19만 3845㎡나 된다네요.

 

해자(垓子) 시설도 발견되어 현재 복원 중인데 어느 정도는 볼 수 있을 정도로

거의 완공 단계에 접어들었네요.

해자 양쪽 석축의 간격은 동쪽으로 가면서 넓어져 최고 20여m까지 넓어지다가,

문지 앞에서는 10m 정도의 길이에 1.5m의 폭으로 좁아졌으며,

서쪽으로 가면서는 다시 넓어졌다고 하네요.

 

해자는 이와 같이 모두 121m가 성 주위에 돌려졌음이 확인되었고 또 이 해자 부근의

문지 북측 지점에서 동북으로 뻗어 있는 목책(木柵)을 발견하였다네요.

 

이 목책은 약 1.5m 간격으로 기둥을 세우고 옆으로 다시 원목을 차곡차곡 가로 댄 것이었는데,

수로를 위한 방책으로 보고 있다고 합니다.

 

월성 내에는 경주 석씨의 시조를 모시는 숭신전(崇信殿)이 있었으나, 1980년에 석탈해왕릉(昔脫解王陵)

남쪽으로 옮겨졌고 현재의 월성 내에는 1741년에 월성 서쪽에서 이곳으로 옮겨 만든

석빙고(石氷庫, 보물)만 남아 있더라고요.

석빙고는 조선 시대에 만든 것이라네요.

 

위의 사진에 보이는 석빙고 출입문 이맛돌에는 숭정 기원후 재신유 추팔월 이기 개축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처음 만들 때는 나무로 만들었다는데 영조 14년 경주 부윤 조명겸이

지금의 모습처럼 돌로 다시 만들었다네요.

처음 위치도 지금의 자리 서쪽으로 약 100여 m 떨어진 곳에 있었다네요.

 

월성이 있는 곳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