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위에 떠있는 섬, 무섬마을

2022. 5. 4. 04:00금수강산 대한민국/경상북도

무섬마을을 대표하는 모습이 바로 위의 사진에 보이는 "S"자형 태극문양의 나무다리가 아닐까요?

저 나무다리 사진 때문에 많은 여행자가 무섬마을을 찾아오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처럼 작은 하나가 주는 의미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지 싶습니다.

 

지금은 그저 관광객의 눈길을 끄는 그런 평범한 나무다리지만,

이 나무다리는 옛날에는 무섬마을 사람에게는 세상과 무섬마을을 이어주는 영혼의 끈인 셈입니다.

오늘은 이 다리가 있는 무섬마을을 구경하려고 합니다.

 

무섬마을은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文殊面) 수도리(水島里)에 있는 전통마을로

국가민속문화재 제278호라고 합니다.

마을이 아직도 옛 모습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그런 마을이라는 의미겠지요.

 

마을 이름이 물 수(水)에 섬 도(島)를 써서 수도리라고 정한 이유가 바로 물속에 있는

섬처럼 보였기에 그리 정했지 싶습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마을이 많지만, 무섬마을이라고 마을이라는 말이 있으면 주민이 사는 그런 마을이지요.

사람이 살지 않는 인공적으로 만든 관광용 마을은 마을이 아니라 민속촌처럼 촌이라고 부르지 싶습니다.

 

마을이 있는 곳의 모습이 강물이 3면으로 휘감아 돌아나가는 형국이라 마치 하회 마을과도 같은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회 마을처럼 그렇게 널리 알려진 곳이 아니지만, 이 마을만의 독특한 나무다리가 있기에

재미있는 모습을 구경하려고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섬은 아니지만, 위의 사진처럼 섬처럼 보이고 마을로 들어가는 다리는 세 곳인데 왼쪽에 다리는 얼마전에 건설한

콘크리트 다리고 예전에는 가운데와 오른쪽 위에 보이는 외나무 다리를 통해서만 들어갔다고 하네요.

 

자동차로 마을로 들어가는 콘크리트 다리를 건너면 왼편 뚝 위로 자동차를 수 십 대 정도 세울 수 있는

무료 주차장이 있고 오른쪽으로도 차를 세울 수 있습니다.

마을의 입장료는 없습니다.

 

이곳에서 사랑비라는 드라마도 촬영했나 봅니다.

요즈음 어디를 가나 드라마나 영화 촬영을 한 곳은 마을 홍보를 위해 이런 홍보물을 게시해 두지요.

촬영 장소는 주로 다리에서만 이루어졌나 봅니다.

 

마침 도착한 시각이 12시가 넘었기에 우선 식당을 찾아 점심 식사부터 해결합니다.

차를 세운 곳 바로 앞에 무섬마을 관광안내소가 있고 그 뒤로 무섬식당이 있네요.

무섬마을에는 식당이 별로 보이지 않는데 오늘은 유일하게 이곳만 문을 열었네요.

 

차로 이곳에 오는 도중 식당도 별로 보이지 않았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어 무조건 들어갔습니다.

요즈음은 기온이 차지 않아 실내보다는 이런 야외 식탁에서 먹는 게 더 좋지 싶습니다.

 

이 집의 메뉴판입니다.

메뉴도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습니다.

 

우리는 청국장을 시켰는데 결과적으로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청국장에 밥만 나올 줄 알았는데 간결하지만, 밑반찬에 채소 비빔밥이 함께 나왔는데 의외로 맛도 좋고 내용도 좋습니다.

다만, 주의할 점은 야외이기에 들고양이가 많아 수시로 우리 음식을 노리고 있어 한눈팔지 말아야겠더라고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식사도 마쳤으니 마을 구경이나 시작할까요?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지도상으로는 제일 위편이고 입구에서 보면 왼쪽 끝에 있는 아도서숙(亞島書塾)이라는 건물입니다.

오늘은 양반도 평민도 모두 함께 공부했다는 조용한 선비의 마을이라는 아도서숙을 제일 먼저 만났네요.

 

지형적으로는 육지의 섬처럼 생겼지만, 이곳에 살았던 마을 청년들은 개화기에 서울과 중국, 일본에 유학하여

신문화를 일찍 받아들이고 1920년대 후반에는 신간회 영주지회, 영주 청년동맹을 이끌며

영주 사회운동의 핵심 역할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이곳 서숙에서 공부만 가르친 게 아니라 체력도 소중하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바로 위의 사진에 보이는 서숙 앞에 있는 백사장에서 공을 차는 등 운동 시간도 주기적으로 가졌다고 하네요.

정말 신식 교육을 하려고 했나 봅니다.

 

바로 그런 힘의 원천이 바로 아도서숙이라고 하겠네요.

일제강점기에 이곳은 바로 주민의 계몽활동과 항일운동의 근거지가 되었답니다.

아도(亞島)라는 말은 아시아 조선의 섬인 수도리를 의미하고 서숙(書塾)은 서당을 말하지요.

 

이곳에서는 항일을 고취시키는 그런 계몽운동을 벌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항일운동이 일경에 발각되며 결국 1933년 7월, 아도서숙의 운영위원들이 모조리 구속되고

아도서숙은 설립 5년 만에 불태워져 폐숙되었다고 합니다.

 

아도서숙은 우여곡절 끝에 2014년 마을 사람들의 증언과 자료를 토대로 복원되었다네요.

그러나 서당이나 서원 굴뚝은 대개 낮게 만들거나 기단에 가래 굴만 낸 경우가 많은데 여기는 다르네요.

아도서숙 굴뚝은 지나치게 크게 만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아도서숙 바로 아래에 있는 집입니다.

치류정(峙流亭)이라는 이름이 걸려있네요.

그러나 설명도 없고 문도 걸려있어 그냥 지나칩니다.

 

치류정 아래에 있는 집입니다.

김희규 가옥이라고 하네요.

행랑채를 겸한 대문이 아주 크고 집의 규모도 있지만, 모든 집이 개방한 곳이 아니라 밖에서만 봅니다.

 

무섬마을에는 예로부터 범죄가 별로 없어 위의 사진에 보이는 집처럼 많은 집이 담장이 낮고 대문조차 없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외부인이 마을로 들어오려면 나무로 만든 외나무다리를 건너야 하기에 금세 눈에 띄니...

지금은 대부분 민박집으로 운영되고 있나 봅니다.

 

그러나 일부는 쉽게 넘어올 수 없는 담장에 대문 또한 튼튼하게 만들었네요.

이 동네 사는 모든 주민이 일가친척일 텐데...

 

물 위에 떠 있는 마을, 무섬마을의가장 규모가 큰 집인 해우당(海愚堂)입니다.

수도리라는 비록 육지의 섬마을이라 했지만, 무섬마을은 바깥세상과 담장을 두르고 살지는 않았습니다.

외부와의 소통에 게으르지 않았고 아도서숙이라는 서당을 통하여 오히려 앞장서 외국의 신물물을 받아들였습니다.

 

따라서 누구라고 하면 한국인은 모두 알 정도의 이름난 사람의 방문이 이어졌고 다른 고을과 인맥을 넓혀 나갔다나요.

1876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지낸 해우당 김낙풍(金樂豊)이 처음 이곳에 들어와 집을 짓고

흥선대원군은 해우당을 방문하여 위의 사진에 보이는 해우당(海愚堂)이라는 현판 글씨를 썼고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는 1875년 오헌 박제연의 오헌(吾軒)이라는 당호 글씨를 남겼던 마을입니다.

 

의금부도사를 지낸 김락풍은 대원군이 권력을 잡기 전부터 친분을 쌓아 둘은 막역한 관계였다네요.

오헌(1807-1890)은 40여 년 관직생활을 하면서 종친이며 동갑내기 박규수(1807-1876)와 상당히 가깝게 지냈다지요.

이를 뒷받침하는 편지도 전해온다고 합니다.

 

1874년 박규수가 박제연에게 보낸 편지로 박제연의 손자가 과거시험 일로 서울로 왔다가

헛되이 가게 된 것을 위로하고 있는 내용이라고 합니다.

 

평면이 ㅁ자 형태의 기와지붕 집으로 앞면 6칸 옆면 6칸 규모로 무섬마을에서는 가장 큐모가 큰 집이라고 합니다.

중앙에 앞마당앞쪽에는  一자형모양의 사랑채, 뒤로는 ㄷ자 모양의 안채가 있네요.

개방적인 사랑채는 남자가 기거했고 안채는 여자가 기거한다는 유교적인 관습에 따를 집모양이군요.

따라서 이 해우당은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반가의 집 구조를 볼 수 있는 귀한 곳이네요.

 

반남 박 씨(潘南朴氏) 박수(朴)라는 사람이 맨 처음 이 무섬마을에 들어와 지은 집 짓고 살기 시작하며

무섬마을의 역사가 시작되었답니다.

그는 무섬의 서쪽 건너 마을인 머럼(머름, 원암, 遠岩)에 살다가 결혼 후 분가해 강 건너 이 땅에 자리 잡았다네요.

그때가 현종 7년인 1666년 경이라고 합니다.

 

위의 사진에 보이는 집이 바로 이 마을에서 제일 먼저 지었다는 만죽재(晩竹齋)라는 고택입니다.

원래 섬계초당(剡溪草堂)이라 했으나 박수의 8대손 만죽재 박승훈(1865-1924)이 중수하고

당호를 만죽재라 했다지요.

 

이후 그의 증손녀 사위인 선성 김 씨(宣城金氏) 김대(金臺)가 영조 33년인 1757년에

처가 마을인 무섬으로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무섬은 김 씨와 박 씨 두 집안의 집성촌이 되었다네요.

 

구한말에는 120여 가구에 주민 500명이 살았을 만큼 번성하기도 했다네요.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산업화가 진행되고 무섬마을도 여느 다른 농촌마을처럼 주민들의 이농이 늘면서

마을의 규모는 점차 줄어들어 지금은 50여 가구에 100여 명의 주민이 산다고 합니다.

 

무섬마을의 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