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블라호 성당과 루자 광장

2019. 8. 28. 09:00발칸반도·모스크바 2018/크로아티아

 

필레 문을 들어서 곧장 뻗은 두브로브니크의 가장 번화한 길인 플라차 대로를 따라서

끝까지 가면 그곳에는 위의 사진에 보이는 제법 넓은 광장 하나가 나타납니다.

이 광장 이름이 루자 광장(Trg Luža)이라고 합니다.

 

 

이 광장을 중심으로 두브로브니크의 주요 건물들이 모여있는 곳이더라고요.

이유로는 지금의 두브로브니크를 있게 만든 항구를 끼고 있는 곳이었으니까요.

필레 문은 육지를 통해 드나드는 문이라면 이곳은 항구에서 들어오는 첫 광장이거든요.

 

 

두브로브니크는 해상 무역을 통해 번창했던 곳이라 당연히 여기가

가장 번화하고 화려한 곳이 아니겠어요?

따라서 이곳을 지배했던 세력이 머물렀던 관청이 있었을 것이고

그에 따른 여러 가지 업무처리를 했던 검역소나 세관 등...

그러니 그때나 지금이나 이곳은 두브로브니크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머무는 곳입니다.

 

 

광장을 중심으로 스폰자 궁(Sponza Palace)이 보이네요.

이 건물은 옛날 라구사 공국 시절에는 세관으로 사용된 건물이라고 합니다.

 

 

당시 두브로브니크 항구의 세관이란 지금과는 달리 교통상 접근이 쉽지 않은 육로보다는

훨씬 편리한 해상을  통해 거의 모든 사람이 드나들었던 곳이리라 생각되네요.

게다가 당시 중세는 대량으로 화물 운반이 배를 통해 이루어졌던 시기가 아니겠어요?

 

 

대항해시대를 맞이해 동서양의 물적 교류가 육로인 실크로드를 통해 오스만 튀르크를

경유했던 시기가 해양을 통한 대서양 시대로 넘어갔던 것을 우리도 보았잖아요.

위의 사진은 스폰자 궁 내부의 모습입니다.

 

 

위의 사진은 결혼식이 많이 열린다는 

성 블라호 성당(Crkva svetoga Vlaha, 또는 블레이세)이 있습니다.

 

 

성 블라호는 성벽 입구인 필레 문 위에 새겨놓은 석상이 있었잖아요.

그는 두브로브니크의 수호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성자라고 하네요.

성당 안에 모셔진 은으로 만든 성 블라호 상은 화재나 지진에서도

크게 손상되지 않았다고 하네요.

 

 

여기 성당 파사드에도 제일 위에 그의 조각상을 올려 두었네요.

 

 

크지는 않지만, 바로크 양식의 기품 있는 성당이 아닙니까?

이곳 성당 입구 돌계단은 많은 여행자가 앉아 잠시 쉬는 곳으로도 유명하네요.

주로 단체여행객은 필레 문으로 들어와 플라차 대로를 걸어 여기까지 온 후 이곳에서

자유시간을 주기 때문에 늘 단체 여행객이 쉬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겠더라고요.

 

 

이 교회는 지진과 화재로 소실되어 처음 지었던 모습은 이미 사라졌고

지금의 모습은 1715년에 베네치아 출신의 건축가 마리노 그로펠리에 의해

새로 지은 것이라 합니다.

 

 

이렇게 성 블라호는 두브로브니크의 수호성인으로 존경을 받고 있지요.

그래서 두브로브니크를 걸어 다니다 보면 위의 사진에 보듯이 성 블라호 상을

어디서나 쉽게 마주할 수 있더라고요.

 

 

성 블라호에 관한 이야기 한 토막을 들어 봅니다.

971년 베네치아 공국의 배들이 물과 음식을 공급받겠다며

위의 사진에 보이는 두브로브니크 항구에 정박해 있었답니다.

 

 

며칠 뒤 대성당의 스토이코 신부가 항구로 드나드는 성 블라호 성당에

문이 열린 것이 이상해 성당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는데 성당 안에는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이 서 있더라네요.

 

 

 

그 모습이 마치 우리나라에 전해오는 산신령 느낌이 아닐까요?

자신의 이름이 블라호라고 말하며 베네치아가 항구에 머무는 이유는 불시에

라구사 공국을 점령하기 위한 것이라고 귀띔 하며곧 이곳 두브로브니크를 무력으로

 공격할 것이라고 미리 대비하라고 했다네요.

 

 

신부는 즉시 이곳을 다스렸던 지도자인 렉터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렉터는

성의 모든 문을 닫고 군사를 배치해 무사히 베네치아의 공격을 막아냈다고 합니다.

이에 신부는 조각가에게 그의 모습을 설명해 조각으로 만들어

성당 파사드에 남겨두었다고 합니다.

 

 

가운데 타원형 돔이 있고 입구에 넓은 계단이 있습니다.

매년 4월 3일 두브로브니크에서는 그를 기리기 위해 축제를 연다고 하네요.
광장 한 곳에서는 작은 오노프리오 분수(Mala onofrijeva fontana)도 보이고요.

 

 

35m 높이의 시계 종탑(Clocktower)은 제법 높게 보이네요.

그 종탑은 두브로브니크 시청사(City of Dubrovnik)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광장 한가운데는 위의 사진에 보이는 석상 하나가 있습니다.

1418년에 만든 올란도 기사상(Orlandov Stup:또는 롤랑)이라고 하는데

샤를마뉴 대제를 따라 무어인과의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운 프랑스 기사로

조각가 보니노 다 밀라노의 작품이라고 합니다.

 

 

특히 무역을 통해 경제적으로 풍족했던 도시인 라트비아 리가나 독일의 브레멘 같은

곳에서도 볼 수 있는 기사상으로 이곳 두브로브니크도 무역으로

흥청거렸던 곳이기에 이런 기사상을 만들었을까요?

올란도 기사상은 주로 독일과 그 주변국에 많이 보이고

독일 아래에는 여기가 유일한 곳이라 합니다.

 

 

올란도는 이슬람과의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운 기사라고 하니 이곳에 올란도 기사상을

세운 이유는 이슬람의 침입에 두려움을 가졌다는 의미이지 싶습니다.

중세에는 올란도 기사상이 있는 자리는 법령을 알리는 장소로 사용되었고요.

지금은 축제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곳으로 사용되고 있는 석상이라고 합니다.

 

 

재미있는 이야기인데 올란도 기사의 오른쪽 팔꿈치부터 손목까지의 팔뚝 길이가 51.2cm인데

이는 옛날 두브로브니크 공화국의 길이 단위인 1엘(Ell)의 표준단위로 사용 중이라고 하네요.

당시 이 길이를 직물 거래의 기본 치수로 계산했다지요.

또한 바닥에 8 각형 기단이 있는데 이 기단의 길이도 도량형의 단위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런 이유는 예전에 이 광장이 두브로브니크의 시장터였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상인과 고객 간의 다툼을 예방하기 위해 이 팔뚝을

도량형의 기본으로 삼아 이용했다고 합니다.

이 또한 현명한 방법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그래서 이 팔뚝을 "두브로브니크의 팔꿈치"라고 부른답니다.

그러니 이곳에서는 "너 팔뚝 굵다."라고 하면 안 되고

"너 팔뚝 길이가 정확하네!"라고 해야 하지 싶기도 합니다.

오른손에 든 칼은 요정이 만들었다는 명검인 뒤랑달이며 왼손에는 방패를 든 모습이네요.

뒤랑달(또는 듀란들:Durandal)은 프랑스 서사시 롤랑의 노래에 등장하는 검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