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8. 27. 09:00ㆍ발칸반도·모스크바 2018/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는 이 도시를 다스렸던 라구사 공국 시절에 해양 중계무역을 통해
정말 엄청난 부를 축적했던 곳이라네요.
마지막으로 나폴레옹의 침공으로 화려했던 라구사 공국은 사라지고...
좋은 시절은 그때뿐이었다고요?
지금 이곳 두브로브니크는 미어터지는 몰려오는 관광객 때문에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1991년에 이곳에 벌어진 참상은 이렇게 아름다운 두브로브니크를
지옥으로 만든 사건이었지요.
오늘은 그 지옥 속으로 잠시 다녀옵니다.
나폴레옹의 침공으로 라구나 공국이 사라진 후 최근에는 다시 한번 두브로브니크는
눈물을 흘려야 했고 유고연방 해제 과정에서 연방 탈퇴를 선언하자 세르비아의
무차별 공격에 두브로브니크는 크게 고통받았다네요.
올드타운 안에 있는 집 중 절반 이상이 포탄을 맞았으며 성벽에 직접 떨어진
포탄만도 100여 발이나 되었답니다.
그러니 그때 부서진 집의 지붕은 지금 모두 깨끗하게 복원되었다고 하니
우리가 보고 아름답다고 탄성을 지르는 빨간 지붕은 아픔의 상징이요,
역사의 증인인 셈이죠.
이들의 피와 눈물과 땀이 스며들어 더 붉은색으로 보이나 봅니다.
사건의 내용은 이랬다고 합니다.
1991년 10월 크로아티아가 유고 연방으로부터 탈퇴를 결정하고 독립을 선언하자
세르비아를 주축으로 유고 연방의 군대가 이곳 두브로브니크에 몰려와
세르비아계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3개월 동안 엄청난 포격을 가했다고 합니다.
아니? 보호한다면 무차별 포격을 가하다니요?
지상의 낙원이라고 했던 두브로브니크가 지상의 지옥으로 변했던 기간이죠.
영국의 극작가였던 조지 버나드 쇼가 그랬나요?
"지상에서 낙원을 보고 싶은 사람은 두브로브니크로 오라.
"그런데 이 기간의 두브로브니크는 지상의 낙원이 아니라 바로 지옥의 모습이었습니다.
유고연방의 군대가 이곳 두브로브니크를 폭격한다는 소식이 매스컴을 통해 타전되자...
이때 프랑스의 작가며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인 장 도르메송이 제일 먼저
아름다운 도시 두부로브니크를 구하고자 처음으로 나섰다고 합니다.
이에 동조하는 많은 사람이 나섰지만, 해안이 봉쇄되어 두브로브니크로 들어갈 방법이 없자...
이에 생각해 낸 것이 헬기를 타고 두브로브니크 상공에서 낙하하는 방법을 생각해내며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하려고 했고 공중 폭격을 막는 방법이기도 했다네요.
이를 우리가 말하는 일종의 인간사슬 작전입니다.
그러니 이 계획은 너무 위험이 크기에 실현되지 못했답니다.
그래서 다시 생각해낸 것이 '그릴라 두브로브니카'라는 이름의 범선을 타고
두브로브니크로 들어가는 방법을 택했다네요.
위의 사진을 보니 두브로브니크의 참상을 알리는 박물관 앞에
"세상의 그 어떤 보물도 자유와는 바꿀 수 없다."라고 세계 많은 언어 외에도
우리 한글로도 적혀있습니다.
1991년 10월 24일 범선이 두브로브니크 근처에 도착하자 유고연방의 해군에서
총을 겨누고 돌아갈 것을 명령해 상륙해보지도 못하고 다시 돌아가게 되었답니다.
이들은 프랑스로 돌아와 매스컴을 통해 전 세계로 포격 중지를 호소하자
미국을 위시해 여러 단체가 포격 중지를 호소했고...
이렇게 시간이 흐르며 두브로브니크는 심각한 피해를 보았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목록에서
사라질 리스트에 오르게 되었고 전쟁이 끝난 후 주민 모두 합심해 옛 모습대로 복구에 온 힘을 쏟아
1994년 사라질 위기의 리스트에서 삭제되는 영광을 얻어 지금의 모습으로 남았다고 합니다.
당시 유고연방에서 독립을 선언하자 세르비아는 이곳에 사는 소수인인 세르비아계를
보호한다는 허울뿐인 명분으로 8개월 동안 포위하고 2천여 발의 대포로
무자비한 공격을 감행했다지요.
세르비아계를 보호하기 위해 다른 민족은 죽어야 합니까?
위의 사진을 보면 당시 폭격을 당한 건물을 볼 수 있습니다.
성안의 824개 건물 중 68%가 포탄에 상처를 입었고...
314발은 거리와 광장에 떨어졌으며, 111발은 성벽에 직접 떨어졌다고 합니다.
위의 사진에 표시된 곳이 바로 세르비아의 폭격 지점입니다.
삼각형 표기는 지붕에 떨어진 곳, 사각형은 건물에 떨어져 화재를 당한 곳,
둥근 표시는 도로에 직접 떨어진 표시라고 합니다.
두브로브니크를 이 잡듯이 폭격했고 이런 곳에서 살아남는다는 일은 기적에 가깝다고
생각되며 이런 무자비한 폭격 때문에 지진에도 거뜬하게 살아남았던 많은 건물이
인간이 저지른 폭격 때문에 사라지게 되었다네요.
여기 당시의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한 공간이 스폰자 궁에 남아있습니다.
희생자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고 아직도 이들을 잊지 못하고 찾아와
눈물 흘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이런 무자비한 폭격 때문에 지진에도 거뜬하게 살아남았던 많은 건물이
인간이 저지른 폭격 때문에 사라지게 되었다네요.
그러나 이때의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사이에 있었던 일보다 그 이전에 크로아티아는
나치에 연합해 세르비아계에 대한 무자비한 살상의 과거가 있었기에
그때의 일도 작용해 세르비아가 공격했음은 부인하지 못하겠네요.
역사란 이렇게 서로 고통을 주고받나 봅니다.
결국은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져야만 될 테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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