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t forget 93... 세계문화유산 스타리 모스트

2019. 7. 26. 09:00발칸반도·모스크바 2018/보스니아

모스타르에서 1박을 하고 아침에 산책을 겸해 다시 구시가지를 걸어봅니다.

어제 낮에는 그렇게 혼잡했던 스타리 모스트의 모습이 이렇게 한가하게 변했습니다.

2018년 5월 13일 일요일의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어제 미리 코토르로 가는 표를 샀기에 아침식사를 한 후 버스 출발 시각에 맞추어

버스 터미널로 나가기만 하면 되네요.

오늘은 아침 산책을 하며 보았던 모스타르의 모습을 찍은 사진을 보며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같은 곳일지라도 시각을 달리하면 또 다른 느낌이 들잖아요.

 

어제 낮과 밤에는 골목길이 미어터지고 다리 위는 여행자로 붐벼서 걷기조차 쉽지 않았는데...

이른 아침의 모스타르는 상가 문마저 모두 닫혀 정적감만 감돕니다.

아침 산책은 이런 맛에 하게 되지요.

 

낮에는 아마도 다리 규모와 비교하면 세상에서 제일 붐비고 복잡한 다리가 이곳이 아닐까요?

이런 곳에서는 두 손을 들고 사진을 찍기에 여행자는 꼭 소지품을 주의해야 합니다.

공연히 기분에 들떠서...

 

사실 모스타르로 접근하는 교통편은 무척 불편합니다.

두브로브니크나 스플리트에서 접근하기도 쉽지 않고 사라예보도 험준한 산맥을 넘어와야 하고...

그래도 많은 사람이 찾는 이곳은 무엇인가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1993년 11월 9일 보스니아-크로아티아 전쟁 중 이 다리를 누가 점령하느냐에 따라 전쟁의 승패와 직결되는

아주 중요한 거점이었답니다.

 

따라서 크로아티아 방위 평의회 부대는 차라리 파괴해버리자는 결론에 도달해 당시 크로아티아 군대의 지휘자였던

슬로보단 프랼랴크는 다리 파괴를 명령했고 그는 전쟁이 끝난 후 구유고슬라비아 형사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다리가 파괴되기까지 427년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한결같이 고고하게 보존되어 있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다리 주변에 93년을 잊지 말자는 글이 여러 곳에 보이더라고요.

아직도 이들이 가슴에는 그때의 일을 잊지 못하고 앙금이 남아있나 봅니다.

 

그러나 잊지는 말되 이제는 용서를 해야 하지 않겠어요?

부서진 다리가 다시 이어졌으니까요.

세상에 용서만큼 처절한 복수는 없잖아요.

그러나 용서란 당한 사람 입장에서 해야지 가해자가 용서한다고 용서가 되는 일은 절대로 아닙니다.

 

오래된 다리가 부서진 다리가 되었다가 다시 이어진 다리가 되었습니다.

부서진 다리 파편을 강바닥에서 모두 건져 그 자재를 이용해 다시 건설함으로 유네스코에서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게 되었지 싶습니다.

부서져 가루가 된 부분은 다시 새로운 돌로 다듬어 만들었겠지만요.

 

네레트바 강이 모스타르를 동서로 나눕니다.

지역만 동서로 나누는 게 아니라 이곳에 거주하는 크로아티아계와 보스니아계 간의

민족도 나누고 있는 벽과 같은 존재죠.

주로 동쪽은 이슬람교를 믿는 보스니아인이 거주하고 서쪽은 가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인이 거주했다지요.

 

그러나 내전을 겪는 동안 또 주변의 크로아티아와의 전쟁으로 두 지역은 앙숙이 되고

이웃으로 수천 년을 함께 살아온 그들은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슬픈 이야기가 남아있는 곳이네요.

다리를 건너 다니다 보면 두 지역의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 것을 알 수 있다고 하네요.

그러나 뚜렷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고 분위기가 그렇다는 말이겠지요.

 

누구는 프라하 카를교와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와 더불어 이곳 스타리 모스트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세 개의 자리 중 하나라고 평가하기도 한다지만...

이제 이곳은 갈등의 상징에서 화해의 상징으로 변한 아름다운 다리임에는 분명합니다.

 

427년이란 오랜 세월 동안 변치 않은 모습으로 이 자리를 지켰던 스타리 모스트는 1993년 11월 9일

보스니아 내전이 한창일 때 60여 발의 포탄이 다리를 향해 집중적으로 떨어지며 완전히 사라집니다.

당시의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있습니다.

 

이때 내전이 크로아티아 정부의 개입으로 이 지역에 살아가던 크로아티아계 민병대를 지원함으로

이슬람을 믿는 보스니아계와의 전투로 치달았다고 합니다.

북쪽의 사라예보는 세르비아의 지원으로 세르비아계가 이슬람계의 보스니아계를 공격하고...

이슬람교를 믿는 보스니아인은 설상가상이 되었네요.

 

전쟁의 양상을 보면 민족 간에 서로 다른 종교 때문에 가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와 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가

결국은 이슬람을 믿는 보스니아계를 양쪽에서 공격한 모습이지요.

이 또한 종교전쟁의 후속으로 같은 뿌리지만, 조금씩 변해가며 원수처럼 서로 총부리를 겨누니

종교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 이슬람을 이곳에 뿌리내리게 했던 오스만 제국이 물러갔으니 이 지역의 이슬람을 믿는 보스니아계도

모두 지구 상에서 없애겠다는 생각이었을까요?

 

그런 일이 있고 난 후 크로아티아 군 대변인은 다리가 전략적으로 중요했기에

자신들이 고의로 포격을 가했다고 했다네요.

다리 포격을 내렸던 지휘자는 그 후 재판에 회부되었다고 하고...

그러나 다른 편에서는 오히려 보스니아계가 부쉈다고도 하고요.

 

그 후 내전이 종식되고...

이 지역의 치안을 담당했던 헝가리군의 잠수부에 의해 강바닥에 떨어진

다리 파편을 하나씩 건져 올리게 되었답니다.

때마침 터키 정부에서는 국가 기록보관소에서 스타리 모스트의 원 설계도를 찾아내었고...

이 설계도는 다리가 이렇게 부서질 줄 알았단 말입니까?

 

터키의 에르 부(Er-Bu)라는 건설회사에서의 시공으로 2001년 6월 7일 다시 다리 공사가 시작되었다네요.

이미 포격으로 부서져 사라진 곳은 이 지방에서 생산되는 대리석을 다듬어 만들고 사용 가능한 파편 1088개는

퍼즐 맞추듯 돌조각을 하나씩 짜 맞추어 복원이 시작되었답니다.

 

드디어 2004년 7월 23일 파괴된 지 11년 만에 준공식이 열렸다고 합니다.

이 화해와 치유라는 다리의 상징성 때문에 준공식에는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을 비롯해 미국의 빌 클린턴,

영국 황태자 찰스 등 세계 10개국의 정상이 참석했다고 합니다.

 

Don't forget 93이라는 글자...

이들에게는 아마도 93년도에 크로아티아에 의한 내전을 잊지 않겠다는 의미겠지만,

크로아티아에 가면 또 이처럼 잊지 않겠다고 전쟁 당시의 피해 상황을 박물관에 전시해두었더라고요.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이들은 서로가 가해자이면서 또 피해자라는 말인가요?

세르비아에 의한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공격, 크로아티아에 의한 모스타르 포격,

세르비아에 의한 보스니아 사라예보 공격...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세르비아의 공격을 멈추라는 유엔과 유럽연합의 권고를 무시하는 바람에

세르비아 시내가 유엔과 유럽연합의 폭격에 당했다고 거기도 잊지 말자고

 당시에 폭격당한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습니다.

 

보스니아는 위로는 세르비아의 공격에 한없이 당하고 아래로는 크로아티아에 또 말도 못 하고 당하고...

물론, 일방적인 것은 아니고 내전상태지만, 무기의 열세 때문에 많이 당했다는 게 다른가요?

결국, 불쌍한 것은 보스니아라는 말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