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sar Liberator라는 알렉산드르 2세 살해 현장과 그 이야기

2019. 1. 4. 09:00동유럽, 발트3국, 러시아 2017/상트페테르부르크

피의 사원이라고 부르는 이 성당의 공식 명칭은 그리스도 부활 성당이라 합니다.

아마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가장 핫한 장소 중 한 곳이라 생각합니다.

명칭은 그리 유쾌하지는 않지만, 성당의 모습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성당은 넵스키 대로에서 알렉산드르 그리보예도프 운하를 따라가다 보면 보이는데...

중간 지점에 운하를 가로지르는 이탈리안 다리(Italian Bridge/Итальянский мост)가 있는데

그곳에서 바라보는 모습이 전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어 좋네요.

 

여기가 피의 구세주 성당의 모습을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는 포인트 중 한 곳이라고 생각됩니다.

다른 곳은 너무 좁기에 성당 전체의 전경을 한 프레임 안에 담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낮은 물론 밤의 풍경도 좋습니다.

 

오늘은 이 성당에 얽힌 알렉산드르 2세의 이야기입니다.

알렉산드르 2세는 로마노프 왕조의 12번째 차르랍니다.

본명은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로 러시아 근대화의 기수로 평가받는 군주라고 합니다.

원래 개혁에는 반대 세력이 있기 마련이고 그런 조직이 던진 폭탄에 맞아 유명을 달리한 비운의 차르이기도 하다네요.

 

그는 왕궁으로 가다가 바로 이 자리에서 정적이 던진 폭탄이 터져 피를 흘리며 쓰러졌던 흔적입니다.

바로 위의 사진에 보이는 곳으로 위는 캐노피로 덮어 둔 곳입니다.

그때 돌로 포장된 마차길이 예전 모습 그대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바로 위의 사진으로 성당 입구와 출구 쪽인 서쪽 끝으로 제단의 반대편에 보존되어있습니다.

원래 러시아 정교회의 성당 건립 원칙은 서쪽을 바라보고 동쪽 끝에 제단을 설치해야 하므로

살해당한 현장을 훼손하지 않고 고스란히 보존할 수 있네요.

 

그는 개혁 군주로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은 황제였다네요.

당시 크리미아 전쟁이 있은 직후라 경제적으로 나라가 무척 힘든 시기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는 개혁을 위해 러시아 농민들에게 자유와 권리를 부여한 농노 폐지를 시행한 사람이라네요.

 

2.300만 명이 넘는 농노가 자유인이 되는 엄청난 일이었다지요?

그랬기에 해방자 차르라는 의미인 차르 리버라토(Tsar Liberator)라는 명예로운 별칭으로 불린다네요.

그러나 이런 좋은 일에도 꼭 반대하는 집단이 있기 마련이지요.

 

그때의 상황은 이렇답니다.

1881년 3월 13일 러시아 제국의 차르인 알렉산드르 2세는 많은 사람의 요구를 받아들여 의회제도를 준비하기 위해

마차를 타고 궁을 향하던 길이였다고 합니다.

그 장소를 보호하기 위해 지은 성당으로 황금색 양파 모양으로 만든 종탑 바로 그 아래를 지날 때였답니다.

 

당시 사회주의 운동가며 인민의 의지파 소속인 그리네비츠키, 소피아 페룹스타야 등이 던진 폭탄이

차르가 타고 있는 마차를 향해 날아들었다 합니다.

그러나 그 마차는 프랑스 나폴레옹 3세가 선물한 아주 튼튼한 안전장치를 갖춘 방탄 마차였기에 안전했다고 합니다.

 

마차 안은 안전했지만, 밖에서 마차를 몰던 마부와 호위병이 다쳐 피를 흘리자 얼른 자리를 피하기는커녕

"나는 괜찮다!"라고 말하며 마차 밖으로 나와 부상을 입은 호위병과 마부를 수습하기 시작했답니다.

주변의 많은 경호원이 어서 현장을 피할 것을 종용했지만, 그는 함께 이동하던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차마

외면하며 혼자만의 안위를 생각할 수 없다고 마차에서 내려 부상자 구호를 손수 시작했다고 합니다.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함께 부상자를 구호하자고 외치며 손수 부상자를 돌보기 시작했다네요.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어찌 이런 대범한 행동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암살범 일행 중 또 다른 사람이 기다렸다는 듯이 또 폭탄을 던졌답니다.

 

두 번째 던진 폭탄을 맞은 차르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지는 않았고

위의 사진에 보듯이 팔 하나와 두 다리가 잘려나가는 중상을 입었답니다.

피투성이가 된 모습을 지켜본 신하들이 다가오자 "짐은 궁궐에서 죽고 싶다."라는 유언을 남겼다네요.

차르의 마지막 부탁대로 얼른 궁궐로 옮겼으며 차르는 궁궐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그 후 그의 아들 알렉산드르 3세가 새로운 차르에 오르고 이곳에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성당을 건축함으로 지금의 모습의 성당이 되었다네요.

물론, 새로운 차르가 된 알렉산드르 3세는 암살범이 소속된 정당의 정치범들에게

혹독한 피의 대가를 치르게 했다고 합니다.

 

성당을 건축하게 된 이유도 처음에는 시 의회에서 알렉산드르 2세를 추모하기 위한 기념비나

예배당을 건의했으나 아들 차르는 성당을 지으라고 했다네요.

그 자리를 원래대로 보존하기 위해 위의 항공사진처럼 성당이 운하 쪽으로 돌출되어 버렸습니다.

제일 오른쪽 황금 지붕 아래가 바로 그 현장이라고 하네요.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이곳은 제방 도로로 그때는 길로 사용되었던 곳입니다.

당시 흘린 피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고는 하지만 가까이 다가갈 수 없기에 자세히 볼 수는 없었습니다.

캐노피로 장식해 그 위를 지붕으로 덮어두었네요.

성스러운 추도의 장소로 오래도록 기억하려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