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7인"이라는 슬픈 영화의 현장

2018. 1. 4. 09:00동유럽, 발트3국, 러시아 2017/체코

여행기에 갑자기 영화 제목을 올려 당황하셨죠?

오늘은 아주 우울한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개봉되었던 "새벽의 7인"이라는 영화는 바로 이곳에서 있었던

역사적인 사건을 담은 영화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새벽의 7인이지만 원제는 "Operation Daybreak"입니다.

분명 어떤 아픈 사연이 남아있는 성당임이 분명합니다.

오늘 이야기는 그 영화의 장면을 위주로 여기에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댄싱 하우스를 돌아 오른쪽을 보면 성당 하나가 보입니다.

성당의 모습은 그냥 유럽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흔한 모습이지요.

그러나 이 성당 벽에는 총탄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습니다.

 

이 성당 이름은 키릴과 메쏘디우스 성당(Ss. Cyril and Methodius Cathedral/

Chrám svatých Cyrila a Metoděje)입니다.

키릴과 메쏘 디우 스는 그리스 출신의 형제 선교사였다고 합니다.

이 성당은 그리스 출신 두 성인에게 봉헌된 이 성당이라고 합니다.

 

2차 대전 당시 체코는 독일로부터 많은 수탈을 당하게 됩니다.

지리적으로 독일과 가장 가까운 곳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나치는 북유럽에서 확보한 양질의 철강을 체코슬로바키아로 운송했고 체코는 앞선 철강 제작

능력 때문에 이런 철강을 이용해 전쟁 무기를 만드는 기지로 탈바꿈하게 되었다네요.

지금은 독일계 회사로 넘어간 체코의 스코다 자동차 회사는 당시 나치 독일의 탱크를 생산하는

전진기지로 바뀌었다지요?

 

이때 체코의 망명정부가 영국에서 탄생하며...

그러나 자국에서 생산된 무기로 많은 연합국의 군인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망명정부는 미안하기도 하고...

영국을 제외한 유럽 전체가 거의 나치 독일의 수중에 떨어진 지 오래되었지요.

각국의 망명정부는 자국 내에서 활동하는 레지스탕스를 독려하고

점차 조직화하여 저항운동을 하게 됩니다.

 

이에 체코슬로바키아 망명정부도 후방교란 작전을 계획하며 망명정부로 모여든 군인 등에서

특별히 선발된 요원을 영국 특수부대와 함께 훈련하며 기회를 엿보게 되었답니다.

이때 체코슬로바키아에는 위의 사진에 보이는 나치 독일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며 히틀러의

오른팔이라는 게슈타포의 수장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파견 나왔다는 소식이 전해옵니다.

 

그는 프라하에 도착하자마자 계엄령을 선포하고 저항운동의 싹부터 완전히 제압하며

공포통치를 시작했으며 그는 오만하게도 그의 동선을 비밀에 부치지 않고 공개하고 더군다나

암살자로부터 방어가 쉬운 차보다는 모양새 나는 무개차인 컨버터블을 타고 다녔다네요.

 

드디어 1941년 12월 28일 요제프 가브치크와 얀 쿠비시를 포함한 특수요원 7명은

체코에 잠입해 하이드리히를 암살하기 위해 야간을 이용해 낙하산을 타고

 체코 플젠에 무사히 잠입합니다.

이들은 다시 저항운동을 하는 사람의 도움으로 프라하에 몰래 들어왔고 그들의 도움으로

숙식을 해결하며 하이드리히 암살 계획에 착수합니다.

 

여러 번 계획했지만, 갑자기 하이드리히의 동선이 변경되거나 너무 무모한 계획으로 

성공을 장담하지 못하는 일까지 생기며 시간만 흘러갔답니다.

좀처럼 기회를 얻지 못하며 프라하에 잠입한 지 어언 5개월이 지나갔답니다.

 

마침 하이드리히의 거처가 변경되는 일이 생겼다네요.

처음 프라하에 왔을 때 그는 제왕처럼 프라하성에서 거주했다는데 마음이 바뀌어 시내에서

20여 km 정도 떨어진 프라하 외곽의 큰 저택으로 옮기고

독일에 있던 가족까지 불러들였다네요.

 

이제 이렇게 되면 하이드리히의 암살 계획은 무척 쉬워집니다.

매일 그는 집과 시내의 집무실을 오고 가야 하니까요.

특수요원은 드디어 최적의 장소를 물색해냈습니다.

 

그의 저택에서 시내로 진입하는 길 중 전찻길과 도로가 함께 있으며 커브 길이 최적의

장소로 선정되는데 바로 위의 사진에 보이는 장소입니다.

하이드리히가 탄 차가 이곳을 지나기 위해 전찻길과 합류하는 커브 길에서 속도를 줄일 때

요제프 가브치크는 자동 소총으로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 현장에서 사살하는 방법입니다.

만약, 이 방법이 실패했을 경우를 대비해 뒤에 있던 얀 쿠비시가

탱크 폭파용 수류탄을 투척하기로 했답니다.

 

1942년 5월 27일 아침 10시 30분경 드디어 운명의 시각이 다가왔습니다.

하이드리히가 탄 차가 나타나고 차가 가까이 다가오며 속력을 줄이려는 찰나,

트램을 타기 위한 시민으로 위장했던 가브치크가 기관총을 싸고 있던 종이를 열고

하이드리히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지만, 기관총은 고장이 나며 격발 되지 않아

실패로 돌아가며 도주하기 시작합니다.

 

하이드리히가 차에서 일어나 도망하는 가브치크를 향해 총격을 가하려는 순간 뒤에 있던

얀 쿠비시가 수류탄을 하이드리히가 탄 차를 향해 던집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수류탄은 차 안으로 떨어지지 않고 차 밖에서 터졌답니다.

오히려 차 밖에서 터진 수류탄 파편으로 수류탄을 던진 쿠비시가 부상을 당하며

그도 가브치크를 따라 다친 몸을 이끌고 도주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때 두 사람이 도주에 성공해 숨어든 곳이 바로 오늘 구경하는

 키릴과 메쏘디우스 성당의 지하입니다.

 

하이드리히가 차에서 내려 이들을 따라가며 권총으로 사격했지만, 갑자기 길바닥에

쓰러졌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차 밖에서 터진 수류탄 파편 하나가 약한 차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와 하이드리히의 늑골에 박혔답니다.

곧바로 인근 병원으로 옮겨 수류탄 파편 조각을 제거하는 수술에 들어갔지만,

파편에 묻어있던 세균이 몸 안으로 퍼지며 패혈증으로 며칠 만에 숨을 거둡니다.

 

이렇게 하이드리히의 암살 작전은 실패한 듯 성공한 것이죠.

이에 화가 난 히틀러는 체코에 대한 피의 보복이 시작됩니다.

대규모 조사를 거쳐 이들 요원과 관계가 되는 사람 13.000여 명이 체포당해

고문을 받으며 죽어갔습니다.

 

심지어 두 사람에게 영문도 모른 채 자전거를 빌려주었던 꼬마 여자아이까지도...

이때 처형당한 사람만 5천여 명...

요원들이 숨어 지냈을 것으로 생각되는 마을 사람 전체를 사살하고

또 다른 마을도 마찬가지로 나치 가스실로 보내졌답니다.

 

이것으로도 부족해 두 마을은 모두 태워버려 지도상에서조차 사라지게 되었답니다.

그래도 7명의 요원이 붙잡히지 않자 방송을 통해 소재를 알려주는 사람에게 10만 코루나라는

엄청난 현상금과 안전을 보장하는 약속을 내걸기도 했답니다.

 

이런 회유책과 더불어 엄청난 공포의 탄압을 시작하자 점차 신고가 접수되기

시작했으며 이때 이들과는 다른 루트를 통해 잠입했던 카렐 추르다라는

요원이 신고로 잡힙니다.

게슈타포는 그에게 엄청난 돈과 새로운 신분과 안전을 책임지고 평생 살 수 있는 거처까지

마련해 주겠다는 유인책을 냈고 추르다는 협박과 회유에 그가 알고 있었던

모든 정보를 넘겨주게 되었답니다.

레지스탕스가 활동하기 위해 머물렀던 프라하를 위시해

체코 내의 모든 안전가옥과 명단까지도...

 

이에 게슈타포는 이 정보를 바탕으로 모든 안전가옥에 대한 대규모 수색작전에 돌입하고,

1942년 6월 18일 새벽 3시 두 요원이 숨어 지내던 키릴과 메쏘디우스 성당에

700여 명의 병사를 동원해 완전 포위에 들어갑니다.

 

처음에는 요원을 생포해 처형함으로 저항의 싹을 자르고 공포심을 주려고 계획했지만,

요원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답니다.

 

이때 이 성당 안에 머물던 7명의 요원 중 첫 교전 2시간 만에 얀 쿠비치를 포함해 3명이

사망했다고 하며 나머지 요제프 가부치크를 포함한 4명의 요원은 항복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성당 지하에 있는 묘지로 일부러 들어가 더는 퇴로가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처음부터 생포를 염두에 둔 작전은 이들의 강한 저항에 부딪혀 실패로 돌아가자 결국,

이들이 저항했던 지하 묘지에 소방차를 불러 물을 부어 넣음으로 익사 작전을 시도합니다.

 

그때 소방 호스로 물을 붓던 입구가 바로 지금 보시는 총알 자국이

아직도 선명히 남아있는 이 환기구였다고 합니다.

 

이에 요원들은 잡혀 고초를 당하느니 스스로 운명을 결정하기로 하고

총알을 장전한 총구를 서로의 머리를 향하게 하고...

이렇게 아름다운 청년들은 나라를 위해 자신의 고귀한 생명을 불살라 버렸습니다.

 

조국을 배신했던 추르다가 이때 이곳에 나타나 7명의 요원의 얼굴을

게슈타포에 일일이 확인시켜주었다 합니다.

또 이들 7명의 요원을 숨겨주었던 키릴과 메쏘디우스 성당의 고라즈 주교 역시

게슈타포에 고문을 당하며 처형당합니다.

이로 인해 동방 정교회에서는 고라즈 신부를 성인으로 추대했다고 합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배신자 카렐 추르다는 나치가 약속한 포상금을 받고 칼 예르훗이라는 신분세탁을 하며

독일 여성과 결혼까지 하며 전쟁 내내 독일을 위해 많은 정보를 제공하며 살았다 합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그는 바로 체포되어 반민족 행위자로 낙인찍혀

교수형을 받고 처형되었답니다.

그날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지금도 이 성당에서는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내용을 영화화한 한 것이 새벽의 7인이라는 영화며

바로 이 성당이 그 역사의 현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