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 시인의 집(Casa del Poeta Tragico), 폼페이

2017. 8. 10. 09:00이탈리아 여행기 2015/폼페이

폼페이의 골목길을 걷다 보면 벽마다 위의 사진처럼 상징적인 조형물이 남아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고 이것은 골목 이름이나 집 문패일 것이고 글을 모르는 외국인도

쉽게 골목길을 찾게 하려는 배려가 아닐까요?

아래 대리석에 적어놓은 것은 넓은 폼페이를 발굴할 때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구역 표시를 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러니 위의 지역은 제7지구 5구역이라는 의미지 싶습니다.

 

이런 모습은 지금의 문패와 같은 역할을 했지 싶습니다.
아니면 골목길의 이름을 이런 식으로 표시했던지...

위의 집은 아마도 상인으로 해상무역을 했던 집이 아니었을까요?

 

로마의 어느 도시나 그 핵심지역은 포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곳 폼페이도 예외는 아니겠지요.

지금 우리는 포룸 뒤로 들어와 구경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도시의 핵심구역과 가까운 곳이라 구경거리도 제일 많을 겁니다.

이 지역은 상업지구로 보이고 저택이 제법 많은 곳으로 폼페이에서 가장 구경거리가 많은

곳이며 포룸 주변은 항구로부터 들어온 물산이 대량으로 거래되었다고 하면

이 지역은 폼페이 시민이 살아가는 일상적인 상업지역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금도 폼페이 유적 안에 있는 유일한 카페테리아가 여기에만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따라서 유적의 모습도 도롯가로는 대부분 상가건물로 지었고

그 안으로 사람이 거주하는 주택이 있는 그런 형태입니다.

 

게다가 네거리의 모퉁이 집은 가게 규모가 제법 크게 지었으니

역시 상권분석이 예나 지금이나 같다는 말이지요.

항구는 배가 들어오면 활기를 띠었다가 다시 조용해지는 곳이라면

여기는 늘 혼잡한 곳이었을 겁니다.

이 지역으로부터 아직 발굴하지 못한 오른쪽과 위로는 많은 주택이 밀집해있는 곳입니다.

만약, 그곳도 발굴해 공개하면 또 어떤 놀라운 모습을 구경할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제법 구모가 큰 저택을 찾아봅니다.

오늘 구경할 집은 비극 시인의 집(Casa del Poeta Tragico)입니다.

 

입구부터 심상치 않습니다.

아주 험상궂은 개 그림이 바닥에 그려져 있네요.

집으로 들어가는 현관 입구 바닥에 모자이크로 무서운 개를 그렸습니다.

 

집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이 그림을 보호한다고 막아놓아 옆으로 돌아 들어가야 하네요.

그러니 개 타일 때문에 입구를 다른 곳에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모자이크로 만든 개는 무서운 이빨을 드러내고 굵은 쇠사슬에 묶여 문 앞을 지키고 있습니다.

비록 그림일지라도...

바닥에 새긴 글자는 라틴어로 카베 카넴(CAVE CANEM)이라고 쓰여있습니다.

라틴어로 썼기에 무슨 심오한 의미가 담겼나 생각되지만, 이 말은 "개 조심"이라는 말이라 합니다.

만약 그날, 이 개가 쇠사슬에 묶여 있었더라면 어딘가 묻혀 석고가 되어있을 텐데...

이 집은 누가 뭐래도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개 그림이 그려진

개를 키우며 살았던 집이지 싶습니다.

 

이 집의 이름이 비극 시인의 집이라고 부르는데 이런 이름이 붙은 이유로는

비극 시인이 살았다는 게 아니라 이 집 벽화에 그리스의 비극 시인의 작품 모습이

프레스코화로 그려져 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랍니다.

 

아마도 연극 리허설 장면이 프레스코화로 그려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겠지요.

이 집은 소설 폼페이 최후의 날의 배경이 되기도 한 집이랍니다.

 

이곳 폼페이도 여러 부류의 사람이 살았을 겁니다.

부자도 있었고 평범한 사람도 살았고...

이 집처럼 중산층도 많았다네요.

물론, 덜수 같이 조금 부족한 사람도 살았을 것이고요.

 

폼페이에서는 조금만 규모가 큰 집은 위의 사진에 보이는 아트리움이라는 구조가 있습니다.

집 안으로 들어가면 제일 먼저 만나는 곳이죠.

용도는 지붕에서 흘러내리는 빗물을 모으는 구조물입니다.

폼페이는 도로에서도 보았듯이 빗물을 모아 재활용을 했던 곳이라는 반증이네요.

 

집의 형태는 대체로 네 곳이 모두 건물로 막힌 사합원 형태의 집이 제법 많습니다.

개방적이지 않다는 느낌이 듭니다.

무역하던 곳이라 경제적으로 부유해 외부에 노출시키지 않고 지키려는 마음이 강했나요?

 

돈이 있는 사람은 주로 집 내부의 벽을 그림이나 프레스코화로 장식했습니다.

외국과 무역을 통해 해외의 진기한 물건도 많았을 것입니다.

위의 사진에 보이는 그림은 조금은 촌스럽게 보일지 몰라도 우리나라에서도

본 듯한 그런 화조도도 보입니다.

 

때로는 어떤 그림은 역사적인 이야기를 남기기도 했고 신의 모습을 그려 넣기도 했습니다.

벌써 예술을 사랑하며 살았다는 말일까요?

어쩌면 이런 그림을 통해 당시 사회상도 엿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런 집 내부만 보더라도 이미 기원전부터 폼페이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었다는 말이기도

하며 예술에 투자한다는 말은 기본적인 삶의 수준은 넘어섰다는 말이잖아요.

돌이나 벽돌을 쌓아 집을 지었고 내부는 회벽을 칠했기에 프레스코화나

벽화를 그리기 좋은 여건이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내부를 그림으로 장식을 많이 했지 싶습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이곳 폼페이에 그려진 많은 벽화 중 많은 부분은 그리스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고 합니다.

이는 이곳에 처음 자리를 잡고 살았던 세력이 그리스에서 건너온

사람들이었다는 말이기도 하겠지요.

당시 유럽 문화의 원류는 그리스라는 말이기도 하고요.

아마도 정신세계까지 그리스의 영향이 크지 않았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