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 시뇨리아 광장

2016. 4. 26. 08:30이탈리아 여행기 2015/피렌체

단테 생가(?) 구경을 마치고 바로 옆에 보이는 골목길로 접어듭니다.

이번에 찾아갈 곳은 시뇨리아 광장입니다.

시뇨리아 광장은 격동의 피렌체를 그대로 보아왔던 역사의 현장이랍니다.

피렌체를 찾는 사람 중 이곳 광장을 찾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겁니다.

 

좁은 골목길 사이로 높은 탑이 있는 건물이 보입니다.

그리고 아래는 청동 기마상이 보이고요.

이 건물이 바로 팔라죠 베키오라고 흔히 베키오 궁전이라고 부르는 곳이네요.

 

두오모가 있는 곳은 종교의 일번지라면 여기는 정치의 중심이고 사건의 일번지인 곳이죠.

그렇기에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 늘 이곳이 시끌시끌해지는 곳이라 합니다.

오늘은 여행자로 북적이고 있네요.

이제 광장으로 들어가 봅니다.

 

많은 인파가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광장을 메운 것은 사람뿐이 아니라 예술작품들도 가득합니다.

요즈음 이곳 광장은 정치적인 구호는 보이지 않고 예술작품이 대신하나 봅니다.

예전에 피렌체에 무슨 일만 생기면 주민은 이곳 광장에 모여들어 갑론을박했지 싶네요.

 

이곳에 오면 누구나 처음 만나는 작품은 바로 그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작품인 다비드상이죠.

물론 진품은 아카데미아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지만...

다비드는 다윗이라지요?

 

바로 골리앗과 싸운 타고난 싸움꾼 말입니다.

거대한 골리앗을 이 연약한 다비드가 이기다니...

그의 모습은 연약한 모습이 아니라 어깨가 당당한 건장한 청년으로 보입니다.

물론 아직은 성숙한 사내의 모습은 아니겠지만...

 

이 작품은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에서 끝난 후 새로 들어선 시민정부가 미켈란젤로에 의뢰해

만들었다눈데 재미있는 일은 미켈란젤로는 메디치 가문의 양자로 들어가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반대편에 섰다는 점이니까 럼 이 다비드상은 반 메디치가의 상징이란 말인가요?

당시 시민정부는 다비드고 메디치 가문은 막강한 권력을 지녔던 골리앗이라는 의미지 싶습니다.

 

그 옆에는 몽둥이의 화신 헤라클레스가 카쿠스를 때려잡는 모습의 석상이 보입니다.

이 석상은 또 시민정부를 무너뜨리고 다시 이곳을 지배했던 메디치 가문의 알렉산드로가 명령해

만들었다고 하니 이런 예술작품으로 서로를 견제하고 경쟁했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카쿠스는 헤라클레스가 잠든 사이 소 8마리를 훔쳐갔다가 붙잡혀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그렸다고 하는데 메디치 가문이 시민정부에 복수하는 의미일까요?

 

지암 볼로냐의 작품 코시모 1세의 청동 기마상입니다.

지암 볼로냐는 볼로냐에서 보았던 네튜노의 분수를 만든 사람이죠.

피렌체에는 이전에 왕이 없었으나 이 사람이 처음으로 피렌체 1대 왕인

코시모 1세의 모습이라고 하네요.

 

암만나티가 만든 넵튠의 분수입니다.

베키오 궁전 모서리에 있으며 이 분수 옆에서 한때 불같은 삶을 살았던

사보나롤라의 화형식이 벌어진 곳이라네요.

 

시뇨리아 광장은 당시 피렌체 정치의 1번지인 정청이 있는 곳이고 이 광장에서

무수히 많은 역사적이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중 하나가 사보나롤라의 이야기가 있었던 현장이 아니겠어요?

르네상스의 중심에서 성숙기를 맞아 이곳 피렌체는 그야말로 황금기를 누렸다고 합니다.

 

메디치 가문의 예술에 대한 투자는 최고조에 달했나 봅니다.

메디치 가문은 교황까지 배출하는 명문가가 되어 미켈란젤로와 동갑이었던 메디치가의

조반니는 교황 레오 10세로 선출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네요.

그런 교황이 미켈란젤로의 후원자가 되니 양자로 메디치 가문에 들어간

미켈란젤로의 앞날은 그야말로 탄탄대로...

 

경제적 부흥기를 맞이해 당시 피렌체는 향락으로 치달았나 봅니다.

원래 돈이 풍족하면 인간은 자꾸 향락으로 빠져들어 가잖아요.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를 강하게 비판하며 나선 사람이 있었답니다.

다름 아닌 메디치 가문의 후원으로 설립된 산 마르코 원장인 사보나롤라라는 신부였다고 합니다.

 

당시 갑질로 유명한 부패한 성직자와 권력자에 대한 비판은 많은 사람의 호응을 얻게 되었다지요.

그는 알프스를 넘어 치로가 피렌체의 부패와 향락을 벌하기 위해 올 것이라 설교했다고 합니다.

메디치 가문은 몰락의 길로 접어들고 프랑스의 샤를 8세가 군대를 이끌고 베네치아로 넘어오니

샤를이 바로 치로였다네요.

의 예언이 현실과 우연히 들어맞아 버린 겁니다.

 

신통방통하게도 사보나롤라의 예언이 딱 들어맞는 순간이 아닌가요?

이에 사보나롤라가 다시 전면에 서서 설교하니 많은 지도층은 물론 일반 시민들까지 그를 불같이

따랐을 것이었지만, 프랑스는 반 프랑스 연합군에 밀려 패퇴하고 돌아가니 그들의 편에 섰던

피렌체는 고립되고 이는 경제적인 문제로 결부돼 극심한 경제난에 처하게 되었다네요.

 

이에 사보나롤라는 한층 더 나가 금욕생활을 주장하고 당시까지 피렌체의 전통 카니발 축제까지

금지하고 카니발용 의상이나 소품 등 모든 사치와 방탕의 상징을 이곳 시뇨리아 광장에 모아 불을

질렀다는데 무 극단적인 행동으로 점차 시민들이 등을 돌리고 교황마저

그를 가톨릭에서 파문시켜버리니...

결국, 프랑스의 패퇴로 사이비 예언자라는 게 들통나고 만 셈입니다.

 

그는 바로 이곳 시뇨리아 광장에서 위의 그림처럼 교수형에 처해지고 그의 시신은 이 광장에서

불태워지며 한때 불같이 일어섰던 그도 역시 불 속으로 사라지고 만 셈입니다.

불로 일어선 자는 불놀이만 하다가 불로 사라지고 만 건가요?

그의 생각은 당시로는 많은 적을 만들었지만, 너무 방탕했던 시대에 경종을 울린 셈입니다.

 

그의 시신을 불태운 지점이 넵튠 분수 옆에 보이는 둥근 금속판으로 표시해 두었습니다.
이제 피렌체는 메디치 가문의 지배도 끝나고 금욕주의를 표방했던 신정 정치도 막을 내리니

이로써 새로운 세상인 공화정을 수립한 시민 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다고 합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방탕한 사회도 문제지만, 너무 극단적인 금욕생활도 시민의 호응을 받기는 쉽지 않나 봅니다.

세상은 강압적인 틀에만 얽매이게 하는 것보다는 조금은 느슨한 방법이 좋지 싶습니다.

그러나 너무 풀어주게 되면 질서가 무너지니 이 또한 쉽지마는 아닌 일이 아니겠어요?

개개인 스스로가 질서를 지키고 살아가는 곳이 가장 바람직한 사회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