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스티아누스 황제와 테오도라 황후

2016. 4. 11. 08:30이탈리아 여행기 2015/라벤나

 

위의 사진에 보이는 모자이크는 아주 유명한 작품입니다.

그냥 작품이라고 하기보다는 보석처럼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클릭하시면 더 큰 이미지로 보실 수 있어요.

모자이크의 세상인 이곳에서의 압권은 바로 위의 사진에 보이는 모자이크가 아닐까요?

바로 테오도라 황후가 시종을 거느린 모습을 그린 모자이크 작품입니다.

 

 

이런 작품이 산 비탈레 성당 안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라벤나는 초기 기독교의 중심지로서 황금기를 구가하던 때라 그 작품의 질이

대단히 뛰어나고 성당 외부의 모습은 붉은 벽돌을 쌓아지었기에 이목을 끌지

못하지만, 내부의 모습은 화려함으로 눈을 의심하게 합니다.

 

 

개인적으로 종교가 없는 사람이라 성당 내부의 모습에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하지만, 이런 작품을 보면 눈이 번쩍 떠지고 호흡이 가빠옵니다.

예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佳人일지라도 말입니다.

 

위의 사진에 가운데 둥그런 공 위에 앉은 이는 예수의 모습이고 양쪽으로 천사의

모습이고 제일 왼쪽의 사람이 바로 이 성당이 있는 자리에서 순교한 성자 비탈레로

예수께서 순교자의 관을 건네고 있으며 제일 오른쪽에서는 에클레시우스 대주교가

성당을 바친다는 의미로 성당의 모형을 건네고 있죠.

 

 

순간 소름이 돋습니다.

뒷머리가 쭈뼛 솟아오르는 기분이 듭니다.

이게 붓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라 돌을 붙여 만든 모자이크이기에 더 그렇습니다.

 

 

성당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석관 하나가 보입니다.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 탄생을 경배하는 장면을 묘사한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모자이크 작품 속에 석관이기에 작품의 질이 많이 떨어지지요?

 

테오도라 황후는 유스티아누스 1세의 부인으로 이 성당이 완공되던 해인

548년에 사망했다고 하며 시종의 모습에서 그 얼굴표정까지 섬세하게

표현하기 쉽지않은 모자이크로 나타냈다는 점은 놀랍습니다.

황금색을 배경으로 양쪽으로 시종을 거느린 당당한 모습의 황후를 바라보는

일만으로도 충분하며 생전의 황후와 시종의 모습을 그렸으니

아마도 실제 얼굴과 흡사하지 않겠어요?

 

 

위의 사진에 보이는 모자이크 작품은 유스티아누스 황제와 그의 주변 인물을

보여주는데 인물의 특징과 표정까지 어떻게 모자이크로 상세하게 만들었을까요?

부창부수라 했나요?

 

 

부부는 이곳 성당에 모자이크로 남아 서로 마주 보며 아직까지도

변치 않는 사랑을 나누고 있습니다.

이곳 라벤나 성당의 특징은 겉모양은 붉은 벽돌로 쌓아 볼품이 없지만,

안에만 들어가면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화려하다는 겁니다.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아주 쓸데없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절대로 알고 싶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흔히 테오도라를 말할 때 비잔틴 역사상 가장 강력한 권한을 지닌 여성으로

명석한 두뇌로 황제를 보필한 최고의 여성으로 평가하여 동방 정교회는 부군인

유스티아우스와 더불어 성인으로 인정하기도 하지만, 창녀 출신으로 사악한 악녀에

방탕한 요부로 평가하기도 하는 극과 극의 평가를 받는 여자입니다.

 

 

아버지가 일찍 죽자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를 따라 배우의 길로 나섰다 합니다.

당시 배우란 지금의 인기 있는 그런 생활이 아니라 기록에 따르면

매춘과 같은 그런 일을 한 여자였다네요.

뭐 지금의 배우도 가끔 그런 일을 하는 사람도 가끔 있기는 하지요.

그러나 주업과 부업이 구분되어야 하는데 그때는 배우의 주업이 매춘이었다 합니다.

 

 

어린 나이지만, 뛰어난 미모와 연기력으로 뭇 남성에게 지금의 아이돌 같은 인기를

한 몸에 받았으나 그녀도 그런 방탕한 생활이 싫어 열여덟 살에 군인과 결혼을 해

콘스탄티노플을 떠나 리비아로 갔다가 버림받은 후 이혼을 하고 다시 원래 살았던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와 이곳에서 유스티아누스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었다네요.

 

 

당시는 천민과 귀족 간의 결혼이 금지되었던 시기라 그는 삼촌인 황제

유스티누스 1세에 부탁해 귀족과 천민 간의 결혼을 허락하는 법을 새로 만들게

했다는데 위의 사진 중 위로 보이는 사람은 복음서를 쓴 사람으로

그 위에 그들의 상징인 동물이 있습니다.

 

 

드디어 두 사람은 결혼에 성공하고 2년 후 삼촌이 후사도 없이 죽는 바람에

갑자기 황제의 자리에 오르니 테오도라는 졸지에 황후가 되고 만 겁니다.

누가 죽어 다른 누가 행복해진다니 사람 팔자 아무도 모릅니다.

 

 

산전수전에 야간전까지 많은 경험을 했던 그녀의 영리함과 유능함으로 남편

유 서방을 보필하기 시작하며 그녀의 능력이 서서히 드러나게 되었다네요.

그러던 중 그녀의 대범함이 나타난 것이 니카의 폭동이라네요.

 

 

그동안 텅 빈 황실 창고를 채우기 위해 세금을 과하게 걷는 과정에 중간에

일을 맡겼던 사람들이 욕심을 내는 바람에 민심이 흉흉해지기 시작해 드디어 황제가

참석한 전차경기장에 그 당시 사회의 큰 단체인 청색당과 녹색당이 하나로 뭉치며

 니카의 폭동이 일어나게 되었답니다.

 

 

니카란 전차 경기장에서 "이겨라"라고 외칠 때 그리스 말인 NIKA를 외쳤기에

니카의 폭동이라고 했으며 전차 경기는 중단되고 폭도로 변한 군중은 치안대를

습격하고 원로원과 성당 등 주요 건물에 난입해 불을 질렀기에

콘스탄티노플은 무법천지로 변해갔다네요.

 

 

군중은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고 황제 유스티아누스는 콘스탄티노플을 버리고

황급히 도망할 채비를 하자 이때 테오도라 왕비가 나서 황제를 가로막으며

이렇게 말했답니다.

 

 

"만약 지금 폐하께서 목숨을 부지하시기 원하신다면 폐하시어! 곤란할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돈도 있고 눈앞에 바다가 있고 배도 있습니다.

하지만 폐하시어! 다시 한번 생각해주소서.

그렇게까지 살아남은 뒤 과연 죽는 것보다 나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소첩은 자주색 옷을 가장 고귀한 수의라는 옛말을 굳게 믿사옵니다.

황제는 황제답게 떳떳하게 죽어야 합니다."

마치 佳人이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것처럼 쓰고 있네요.

 

 

당시 자주색 옷은 황제 외에는 누구도 입을 수 없는 색깔입니다.

이 말을 들은 황제는 측근의 장군을 불러 그가 이끄는 스칸디나비아 용병대를

이끌고 폭동을 제압할 것을 명령하니 용병대는 원형 경기장으로 성난 군중을

몰아넣고 무자비하게 제압하기 시작했다 합니다.

 

 

이때 3만 명의 군중이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 하네요.

이 일이 끝난 후 다시 평화가 찾아오고 황제는 주변 국가를 하나씩 복속시키며

비잔틴 제국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갖게 되었다네요.

도망칠 궁리만 하던 황제가 말입니다.

 

 

그의 치적으로 그동안 화재와 지진으로 부서진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아야 소피아

성당을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지었으며 유스티아누스 법전을 만들었다네요.

이때 다시 지은 아야 소피아 성당은 지금도 그 모습 그대로 남아 많은 여행자가 찾는

역사적 문화유산이죠.

이상은 여러분께서 전혀 알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습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모자이크란 색이 있는 작은 돌을 촘촘히 박아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하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그림 그리듯 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

이곳 라벤나가 비잔틴 모자이크 문화를 꽃피운 것도 동고트 족의 대왕이었던 테오도리쿠스가

어린 시절 볼모로 콘스탄티노플에 잡혀가 로마식 교육을 받으며 자랐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