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 알리기에리의 무덤을 찾아서

2016. 4. 13. 08:30이탈리아 여행기 2015/라벤나

라벤나에 단테 알리기에리와 관련이 있는 곳이 있다고 해 찾아갑니다.

단테의 원명은 두란테 델리 알리기에리(Durante degli Alighieri)라고 하네요.

이름이 복잡해 두란테에서 그냥 단테라고 줄여 불렀다 합니다.

 

그의 무덤이 이곳 라벤나에 있다고 합니다.

두란테 알리기에리의 의미는 "장수하는 날개 달린 자"라는 의미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장수는커녕 환갑잔치도 하지 못하고 고향도 아닌 곳에

눈도 제대로 감지 못하고 죽었답니다.

 

태어난 곳은 이곳 라벤나가 아닌 피렌체에서 알리기에리 가문에서 태어났다 합니다.

어린 시절 피렌체에서 보내던 단테는 9살 이른 나이에 이웃집 동갑내기

베아트리체를 먼발치에서 보고 그만...

뻑! 소리 나게 갔다는 말이겠지요.

 

사랑이란 나이 불문... 

이렇게 어린 시절을 한 여인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시린 가슴 부여안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운명은 인간의 뜻대로만 흘러가지 않잖아요?

12살 때 젬마 도나티라는 어린 여자와 약혼하게 되었답니다.

그 사람의 무덤을 찾아가다 보니까 위의 사진처럼 골목길 끝에 작은 사당이 보입니다.

 

골목 안으로 들어가나 작은 사당이 하나 있습니다.

이곳을 찾는 사람이 우리 말고도 또 있습니다.

그 사내는 동양의 먼 나라에서 찾아온 우리가 신기한가 봅니다.

 

사당 안의 모습입니다.

안을 들여다보니 고뇌하는 단테의 모습이 보입니다.

 

사당 뒤로 돌아들어 가니 무덤이 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고향을 그리며 잠들어 있습니다.

누구나 고향을 그리지만, 단테는 고향으로부터 버림받았다지요?

 

버림만 받은 게 아니라 사형선고를 받고 유랑생활을 하다가 이곳 라벤나에서

그의 거처를 마련해주어 죽기 전에 이곳에서 그의 대표작

신곡을 완성하고 생을 마감했다고 하네요.

 

단테는 늘 마음속에 베아트리체를 생각하며 살았지만, 결국 아버지가 추천했던

여자와 약혼한 지 14년 후 결혼까지 했다네요.

젠장!!! 이상과 현실은 이렇게 달랐습니다.

그러나 단테는 24살의 나이로 장가드는 순간은 물론, 베아트리체가 죽을 때까지

마음으로는 양다리를 걸쳤나 봅니다.

베아트리체가 죽은 지 2년 후 옛날에 예약했던 젬마 도나티와 결혼한 것을 보면 말입니다.

 

위의 사진이 당시 단테와 베아트리체가 처음 눈길을 주고받았던 피렌체의 베키오 다리입니다.

그는 아홉 살 때 처음 먼발치에서 베아트리체를 보며 사랑의 포로가 되었다죠?

아홉 살이라...

시인이 되려면 이렇게 일찍 사랑에 눈을 떠야 하나 봅니다.

 

그 후 세월이 흘러 9년이 지난 후 열여덟 살 때 베키오 다리 근처에서

우연히 다시 운명의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운명의 만남 당시의 단테와 베아트리체와 친구의 모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껌이나 짝짝 씹으며 동네 노는 젊은이 모습이 단테이며 제일 앞에 걸어오며

손에 꽃을 든 여인이 베아트리체라고 합니다.

그런데 베아트리체 옆에 걷는 친구는 요염한 자세로 단테를 홀리려는 듯하네요.

 

단테는 어린 시절 수도원이 경영하는 라틴어 학교를 다니며 신학을 비롯해

다방면의 폭넓은 공부를 한 모양입니다.

나중에 그 유명한 볼로냐 대학에서도 공부했고요.

정치에도 관심이 많아 피렌체 시협의회 회장직까지 맡은 것을 보면 말입니다.

행동하는 양심이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당시 피렌체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옹호하는 기벨리니당과 로마 교황을 옹호하는

궬피당이 서로 격렬하게 대립 상태에 있었나 봅니다.

 

결국, 궬피당이 승리했으나 이번에는 궬피당이 다시 교황으로부터 자주를 취하자는 백당과

교황의 힘을 이용하는 흑당으로 나누어 싸우게 되니 여기서 흑당의 승리로 막을 내려

반대편에 섰던 단테에 추방령이 떨어졌다네요.

무슨 설탕 싸움도 아니고 흑당, 백당이 뭐 하는 겁니까?

이때부터 단테의 망명생활이 이어지고 여러 번 다시 세력을 규합해

다시 탈환하려 했으나 모두 실패했다네요.

 

후일 피렌체에서는 과거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면 사면하겠다는 연락을 받았지만,

그게 오히려 치욕이라 느낀 단테는 이에 응하지 않으니 피렌체에서는 단테에 궐석재판을

통해 사형선고를 내렸고 결국, 단테는 자신을 받아준 이곳 라벤나로 돌아와

라벤나 영주였던 귀도 라벨라의 보호 아래 신곡을 마무리했지만,

56세의 일기로 말라리아 때문에 생을 마쳤다네요.

 

망명생활로 이탈리아 전역을 돌아다니며 많은 글을 남기게 되고 후일 그 글이

이탈리아어의 근간을 이루는 표준어가 되었다네요.

그는 자기의 시 속에 네 명의 자식까지 낳은 부인에 대한 언급은 없고 한 번도

소유하지 못한 베아트리체에 대한 이야기인 "내 마음의 여주인"에 대한 환상만을

잔뜩 나열했다고 하네요.

속으로 딴 마음을 품은 줄 모르고 함께 살았던 마누라만 불쌍하게 살았네요.

 

원래 남의 떡이 더 커 보이고 남의 꽃밭에 꽃이 더 예뻐 보이기는 하지요.

어떤 사람은 그의 시가 베아트리체에게서 나왔다고도 합니다.

처음 본 순간 뻑하고 가버려 평생을 사랑했던 베아트리체와의 플라토닉 한 사랑이

그의 업적을 가져왔다고도 하네요.

 

단테는 1302년 피렌체에서 추방당한 후 이곳 라벤나에서 마지막 19년을 보내며

그의 대표작 신곡을 저술한 것으로 알려졌지요.

결국, 단테는 이곳이 그의 생명을 다한 곳이라 합니다.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죽는다는 일은 불행한 일입니다.

죽어서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까요?

피렌체에서는 그의 석관을 마련하고 여러 차례 단테의 유골을 돌려달라고 요구했지만...

 

피렌체에서 산타 크로체 성당에는 위의 사진에보이는 단테의 석관을 만들었지만,

결국, 속이 빈 석관으로만 남아있습니다.

석관 옆에 서서 기다리던 천사는 오지 않은 단테 때문에 피곤해 석관에 기대 누웠고

단테는 석관 위에서 하염없이 넋 나간 사람처럼 앉아있죠.
이게 바로 김칫국부터 먼저 마신 결과가 아니겠어요?

 

피렌체는 속죄의 의미로 단테의 사당을 밝히는 등잔불의 기름을 영원히 공급한다 합니다.

지금 위의 사진에 보이는 등잔불의 기름은 피렌체에서 영원히 지원한다고 하네요.

그 불은 오늘까지 꺼지지 않고 타오르고 있으며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은

따뜻한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수구지정(首丘之情)이라는 말이 있지요.

초나라 시인 굴원이 이런 말을 했지요.

"새는 날아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여우는 죽으면 머리를 언덕으로 향한다.

(鳥飛反故鄕兮, 狐死必首丘.)"라고요.

 

이 말은 여우도 죽을 때는 머리를 구릉을 향한다는 말이라죠?

구릉이란 바로 여우가 살았던 여우굴이 있는 언덕을 말합니다.

여우조차도 이럴진대 하물며 대문호라는 단테는 죽을 때 어땠을까요?

 

부디 오늘 고향을 향해 머리를 반듯하게 눕히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