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무원의 탐미주의가 바로 알람브라일까요?

2016. 1. 22. 08:00스페인 여행기 2014/그라나다

알람브라 궁전은 워낙 유명한 곳이기에 세계 각지로부터 많은 사람이 방문합니다.

위의 사진을 보니 히잡을 두른 모슬렘이 아닌가 생각되네요.

그들은 이곳을 방문해 어떤 감정을 느낄까요?

조상의 위대한 건축술에 감탄할까요?

아니면 빼앗긴 이 궁전에 대한 분한 마음이 들까요.

 

알람브라 궁전은 이슬람 건축과 내부 장식에 있어 최고봉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지 싶습니다.

사실, 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유럽에서는 모든 예술 분야가 잠시 휴식기에 들어갔습니다.

로마도 사실은 그리스 문화를 그대로 베껴 신도 모셔오고 모든 예술을 모방하면서 발달했겠지만...

그마저 로마가 패망한 후 유럽은 휴식기 동안은 모든 분야에서 이슬람 문화에 뒤처져 있었지 싶네요.

 

그런 가운데 이슬람 무어족이 유럽에 발을 걸치며 유럽 대륙에 한 줄기 빛이 되었을 겁니다.

이 시기를 지나고 유럽에 문예부흥운동이라는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났으니까요.

어찌 보면 르네상스 운동의 불을 댕긴 게 이슬람이라고 한다면 억지라고 할까요?

 

그라나다는 이베리아 반도 최후의 이슬람 왕조가 번창했던 도시가 아니겠어요?

아무래도 제일 오래 버틴 곳이기에 이슬람 문화가 가장 끈적거리는 곳이 그라나다이지 싶습니다.

가장 깊게 대못을 박고 살아왔는데 가톨릭 국가는 그 대못 빼느라 고생 좀 했겠습니다.

이렇게 생각했지만, 그들은 그런 색을 지우기보다는 서로 융화하며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런 열린 마음 때문에 알람브라 궁전이 살아남았을 것이고 우리 같은 사람도 구경 오게 되네요.

전부 그런 열린 마음만은 아니겠지만...

 

그러나 원래 알람브라 궁전이 있던 자리는 그 이전에 이곳을 지배했던 로마 제국이 요새로

건설한 성곽이 있던 곳이었지요.

그 위에 알람브라 궁전이 들어선 것이네요.

이 말은 이미 로마는 풍수지리에 능통한 사람이 있어 지금의 알람브라 궁전터가

명당자리라는 것을 알았다는 말이 아닌가요?

이슬람 세력이야 얼떨결에 그 터 위에 다시 요새를 만들었지만,

자꾸 위협을 느끼기에 아예 요새 안에 궁전을 세웠을 것이고요.

위의 지도처럼 해가 갈수록 가톨릭 세력은 남으로 밀고 내려옵니다.

그러니 그런 좋은 땅의 힘을 받고 그 자리는 2천 년이 넘도록 이 땅에서 땅땅거리는 자리가 되었잖아요.

늘 느끼는 위험으로부터의 탈출구가 아름다운 건축에 몰두했던 탐미주의였을까요?

 

아무튼 그들은 공포를 해소하는 방법으로 아름다움을 택했던 게 분명합니다.

레콩키스타로 기독교 세력이 이슬람 세력의 마지막 근거지였던 그라나다를 점령하자 이슬람 마지막 왕조는

아름다운 알람브라 궁전을 버리고 바다 건너 아프리카 땅으로 갔다고 합니다.

그때 떠나며 했다는 말, 그라나다를 잃는 것보다 알라브라 궁전을 잃는 게 더 마음 아프다고 했잖아요.

 

처음 이 땅에 숟가락 놓고 슬그머니 들어와 아예 이 지방의 주인이 되어 살아온 지 어언 800여 년.

땅땅거리며 땅의 기운을 받아 이곳에 멋진 궁전을 짓고 살았지만, 이제 그 땅의 기운이

"붉은 성"이라는 알람브라 궁전에 붉은 석양으로 물들이기 시작합니다.

열흘 붉을 꽃이 없다고 했나요?

여기는 800여 년 동안이나 붉었는걸요.

 

저번에는 조상끼리 서로 주고받아 빅딜에 성공해 한동안 조용히 살았잖아요.

코르도바를 순순히 돌려주는 조건으로 그라나다와 그 인근 지역의 자치권을 보장받았는걸요.

그야말로 도마뱀이 자기 꼬리 떼어주고 살았듯...

게다가 조공도 매년 듬뿍 바쳤는걸요.

그 약속은 세월과 함께 사라지고 자꾸 방을 빼라고 하네요.

 

나스르 왕조의 마지막 왕인 보아브딜은 더는 버틸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신하들과 함께 알람브라 왕궁을

그대로 양도한다는 말을 가톨릭 양왕에게 전하라 하고 퇴로를 열어 줄 것을 요구합니다.

그 조인식을 그동안 가톨릭 대사를 맞이하며 한껏 거들먹거리고 폼 잡았던 대사의 방에서 했다지요?

 

결국, 신하를 이끌고 바로 뒤에 보이는 시에라 네바다 산맥을 넘어갈 때 뒤돌아서 이 아름다운 알람브라 궁전을

다시 한 번 바라봅니다.

햇볕을 받은 알람브라 궁전은 왜 그리도 처연한지...

아름답다 못해 눈이 시릴 정도였다네요.

영원히 가슴 깊게 간직하려고 오랫동안 말없이 바라보다 눈물을 흘리며 돌아섭니다.

 

엄청난 크기의 높은 성벽...

37개의 당당했던 감시탑도 지금은 그저 모두 포기하고 돌아서야 하는 보아브딜 왕은 조상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며 가꾸었던 이곳을 버리고 패주해야 하는 자신이 그렇게 미웠을 겁니다.

그의 조상은 이곳만 가꾼 지 벌써 250년 이상을 투자했습니다.

그런데 포위된 지 1년도 되지 않아 보아브딜은 포기했습니다.

 

오랜 세월 온화한 기후 속에서 즐겁게 살아왔는데 하나씩 가톨릭 세력에 빼앗기다 마지막 남은

이곳마저 빼앗기며 그 아름다운 알람브라 궁전도 버리고 이슬 피할 집도 없이 노숙자 신세가 되어

아프리카로 도망간 처지를 누가 알겠습니까?

그때 그들이 떠나며 한다는 말이 패망하는 것보다 알람브라를 버리는 게 더 가슴 아프다고 했다나요?

그만큼 알람브라 궁전은 아름답기로 정평이 난 곳인가 봅니다.

아마도 이슬람 건축의 최고봉이니 백미니 걸작이니 하는 말은 빈말이 아닌가 봅니다.

 

알람브라는 군사적 요새지만, 사실 그 이상의 구조물이라 봐야 하겠지요?

세상을 향해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아름다운 건축물이 어떤 것인가 알려주었고

물로 없는 높은 언덕 위에 만든 화려한 정원은 환락의 극치고 내 여자를 사랑했다고 그 집 안 사내는 모조리

불러들여 참살했던 잔인한 피의 무대였고 이슬람이 가톨릭에 선물한 최고 불후의 명작이 이곳이 아닐까요?

 

시에라 네바다 산맥과 그라나다 대평원이 만나는 교차점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인 알람브라 궁전이 있습니다.

이 왕궁은 외부적으로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만들었고 군사적으로는 난공불락이라는

뉘앙스를 풍기기 위해 만들었을 겁니다.

자기 세력 하에 있는 백성에게는 강한 지도자가 있어 안심하라는 의미고 북으로부터 서서히 조여 오는

카스티야 왕국에는 넘보지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였을 겁니다.

 

그러다 보니 대를 이어 왕위에 오른 지도자는 기념식수나 하듯 궁전 하나씩 지었나 봅니다.

이렇게 세상을 향해 통치자는 자기 세력을 과시하려고 했지만, 사실은 두려움 때문에 그랬을 겁니다.

개가 심하게 짖는 일은 공격하기보다는 방어를 위한 행동이니까요.

중국의 만리장성이 그랬고 명나라가 쌓은 서안 성벽은 황제가 전투 중 적국에 사로잡힌 일 때문에 불안해

세상에서 가장 튼튼한 성벽으로 쌓았습니다.

 

그래요.

여기 알람브라가 바로 이베리아 반도 북부와 북서쪽에 강한 힘을 지닌 카스티야 왕국과 북동부의 아라곤 왕국이

서로 힘을 합하여 레콩키스타라는 국토회복운동의 힘을 느끼자 주변의 이슬람 세력은 하나씩 그들의 힘에

소멸 하여가고 있었습니다.

이미 유럽은 종교전쟁인 십자군 전쟁으로 가톨릭과 이슬람은 서로 함께 살 수 없다고

사생결단 하던 시기가 아닐까요?

그라나다의 전성기는 누가 뭐래도 이슬람 나스르 왕조가 1238년부터 약 250년간 통치했던 시기일 겁니다.

그러나 세월은 또 다른 권력을 만들어 내고 원래의 주인이라 자처하는 세력이

이민족의 지배를 용납할 수 없었나 봅니다.

 

이제 하나씩 사라지는 세력을 바라보며 마지막 이슬람 세력인 이곳 그라나다의 나스르 왕국은 그런 세상을

바라보며 영원히 적으로부터 보호받고 싶어 생각해낸 것이 인류의 위대한 유산인 알람브라 궁전이 아닐까요? 

그래서 일찍이 점차 북으로부터 밀고 내려오는 가톨릭 세력을 보며 왕은 점차 남으로 내려오며 명당을 물색하러

산에 오르다 옛날 로마 제국이 세웠던 군사요새를 바라보게 되었을 겁니다.

그 장소는 사비카 언덕으로 초기에 이베리아 반도로 진출한 그들 선조가 바로 여기를 보수해

요새로 만들었던 곳입니다.

 

앞뒤로 바라보니 세상에 이만한 명당이 또 없습니다.

뒤로는 시에라 네바다 산맥이 병풍처럼 자리하고 있어 천연 방어망이 되고 앞으로 어느 누가 오더라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그라나다 대평원이기에 100여 m 높이의 사비카 언덕은 하늘이 내린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성곽보수부터 시작하며 방어 요새인 알카사바 공사를 시작합니다.

앞쪽으로 군사 보루를 만들고 나니 그 뒤로 궁전을 만들고 싶었을 겁니다.

그래야 밤에 다리라도 쭉 펴고 잘 게 아니겠어요?

 

왕국 건설을 하고 나니 이번에는 멋지게 인생을 보내고 싶었나 봅니다.

그래서 생각한 게 정원이 아니겠어요?

헤네랄리페...

그곳은 에덴동산을 꿈꾼 산물이지 싶습니다.

이렇게만 해도 폼나게 살 수 있지만, 권력이란 놈이 어디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생각한 게 부릴 수 있는 왕가와 귀족 그리고 일반 백성입니다.

그들을 위해 만든 게 메디나라는 거주지역일 겁니다.

 

이제 좀 안심이 되나요?

그래도 불안해 성벽 증축에 또 매달립니다.

엄청난 높이의 성벽을 절벽 위에 세우고 그도 불안해 사방을 감시할 감시탑을 37개나 세웁니다.

그중 갑이 바로 벨라의 탑으로 제일 앞에 세웠습니다.

얼핏 바라보면 갑옷을 입고 중무장한 것처럼 말입니다.

단순 무식하게 보이고 위압적으로 생겼지요.

탑은 사각형으로 층층이 쌓아 올렸습니다.

 

사실 탑의 목적은 감시입니다.

그러나 벨라의 탑은 그 지방에 사는 이슬람 백성에게는 안심하라는 메시지고 호시탐탐 국토 회복하겠다는

가톨릭 세력에게는 쉽게 함락시킬 수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이니 단념하라는 그런 메시지였을 겁니다.

"여기는 나스리 왕조의 관리지역이고 여기서 짱은 우리다!"는 그런 의미 말입니다.

그러니 주변의 이슬람은 우리 나스리 왕조를 믿고 무조건 복종하고

적은 함부로 깝치지 말라는 그런 의미 말입니다.

그래서 서쪽 끝 제일 잘 보이는 곳에 가장 당당하게 잘생긴 벨라의 탑을 세우지 않았을까요?

 

삼면이 절벽이라 절벽 아래 자갈과 모래에 그리고 황토를 물에 개어 틀에 찍어 쌓아 올렸고 외부로는

석회를 발라 시멘트처럼 단단하게 만들었을 겁니다.

자연히 이곳에서 채취한 황토이기에 신토불이고 붉은 흙으로 벽돌을 찍었기에 자연히 요새 이름이

붉은 도시라는 의미의 "마디나트 알람브라"라고 불렀나 봅니다.

그뿐 아니라 탈리아스라 부르는 탑을 산마다 세워 봉화대와 같은 역할을 맡겨 그 부근을 지나는 장사꾼에게

가톨릭 세력의 동태를 예의 주시하며 불안 속에 지냈다네요.

그런 전달이 바로 벨라의 탑에 마지막으로 보고되었을 겁니다.

 

실제 이런 시설을 통해 그라나다 왕국에서는 1246년 그라나다의 북쪽 66km 떨어진 하엔이라는 지역이

카스티야 왕국의 페르난도에 의해 점령되었다는 소식을 반나절도 되지 않아 접했다 합니다.

그만큼 불안에 떨며 북쪽의 움직임에 무척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나 봅니다.

원래 사람의 일이란 눈에 보이지 않고 소문으로만 듣는 일이 눈에 보이는 일보다 더 불안하게 하잖아요.

이런 소식이 자꾸 알람브라 궁전으로 전달될 때마다 불안감은 더 심해지는 겁니다.

그랬기에 나스리 왕국은 전쟁을 통해 가톨릭 세력을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협상을 통해

이곳 그라나다만이라도 자치권을 인정받고 싶었을 겁니다.

 

하엔을 점령한 페르난도와 협상을 통해 세비야 지역을 점령하는 일에 앞장서 협조하며

잠시 더 그라나다의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합니다.

먼저는 코르도바를 넘겨주는 조건으로 안달루시아의 나머지 지방의 자치권을 부여받았는데...

그러며 시간을 벌어 더욱 튼튼한 요새를 만드는 일에 시간을 보냈을 겁니다.

이게 바로 바둑에서 이야기하는 팻감으로 더 버텨보자는 속셈이지요.

그런 일은 단지 시간을 벌다 보면 묘수가 떠오르라는 바람일 뿐입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그래도 이들이 어떤 민족입니까?

바로 사막을 고향으로 살아온 그런 민족이 이슬람의 무어족이 아니겠어요?

사막에서 물을 다루는 기술은 가히 천하에 제일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지 싶네요.

우리야 배달의 민족이기에 배달만 시키면 물이 안방까지 오지만...